과거의 나는 일본 드라마 방영 전, 분기별 리스트가 나오면 시청 계획을 짜두고는 했다. 그런데 요즘은 시들해진 지 오래다. 시놉시스를 보고 확 끌리는 것도, 보고 나서 전율을 느끼는 작품도 좀처럼 없다. 분기마다 두어 개 정도? 최근 본 일드 중에서는 <당신 차례입니다> <언내추럴> <저, 정시에 퇴근합니다> 등이 괜찮았다. 걸작은 아니다. 그중에선 넷플릭스 오리지널 <팔로워들>과 <살색의 감독 무라니시>(제목을 왜 이따위로 번역한 건지)가 제일 좋았다.
주변에 일본 영화와 드라마를 좋아하던 이들도 비슷한 상태다. 요즘 볼 게 없어. 보고 나면 다 비슷해. 개인이 느끼는 감각만은 아니다. 요즘 아니, 근래 10여 년간 일본 영화, 드라마, 만화 등은 눈에 띄게 활력이 줄어들었다. 최초의 트렌디 드라마로 불리는 오다 유지 주연의 <도쿄 러브 스토리>가 나온 것은 1991년. 한국 드라마 <질투>와도 닮아 있는 트렌디 드라마의 열풍은 일본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새로운 생활상을 보여주었다. 세련되고, 자유롭고, 풍요로운 일본의 풍경은 아시아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한국에서 일본 대중문화가 개방된 것은 1988년이다. 처음엔 4대 국제영화제에서 작품상, 감독상을 수상한 영화만을 개봉했다. 2000년 들어서 케이블 채널의 드라마 방영도 일부 가능해졌다. <춤추는 대수사선> <마녀의 조건> <뷰티풀 라이프>, 국내에서도 리메이크된 <사랑 따윈 필요 없어, 여름> 등 당시 한국에서도 방영된 일드 목록을 보면 지금도 두근거린다. 러브 스토리, 범죄물 등 모든 장르에서 수작들이 쏟아졌다. 당시 동남아에서는 일본 드라마와 J팝이 최고의 인기였다.
2003년, 도쿄에서 열린 <라스트 사무라이> 월드 프리미어 행사에 갔었다. 톰 크루즈가 일본의 사무라이 복장을 하고 싸우는 시대극을 할리우드에서 만든 것이다. 최고의 개그맨이기도 한 기타노 다케시 감독이 진행하는 프로그램에서 <매트릭스3>와 <킬 빌>을 분석하면서 어떤 일본 영화를 인용했는지 보여주었다. <킬 빌> 1편에는 오시이 마모루의 I.G.에서 만든 애니메이션이 삽입되었고, 수많은 일본 영화의 장면들이 모자이크되었다. 쿠엔틴 타란티노는 <킬 빌>을 후카사쿠 긴지에게 바쳤으며 <배틀 로얄>을 칭송했다.
<매트릭스>로 각광받은 워쇼스키 자매는 홍콩 영화와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의 열광적인 오타쿠다. <공각기동대>의 오시이 마모루를 존경하여, 일부 장면을 그대로 <매트릭스>에서 실사로 재현하기도 했다. 당시 할리우드의 신성 감독들은 일본의 만화, 애니메이션, 영화를 찬양하는 것이 트렌드였다. 또한 2002년 일본 애니메이션의 북미 수출액(극장 개봉, DVD 수익, 캐릭터 라이선스 수익 포함)은 43억5천9백11만 달러로, 일본이 미국에 수출하는 철강 수출액의 4배에 달했다. 그래서 일본 정부에서는 자국의 대중문화를 전 세계로 확산시키기 위해 ‘쿨 재팬’이라는 구호를 내세우며 열렬히 후원했다.
그런데 한순간이었다. 모방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성장하는 세계 대중문화의 주류에 끼어들자마자 일본 문화 붐이 시들해졌다. 영화, 드라마, 만화, 애니메이션, 대중음악 모든 분야에서 일본 작품들이 지지부진해졌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동력이 시원찮아졌다고 할 수 있다. 익숙하면서도 변주에 강하고, 대중적이면서도 개성적이었던 일본 대중문화의 뾰족한 지점들이 일순 뭉툭해진 것이었다. 일본의 대중문화가 2000년대 초반까지 엄청난 성장을 기록하고, 해외에서 인기를 끈 이유는 많다. 우선 경제적인 부가 확실하게 쌓여 있었다. 돈과 여유가 있어야 문화, 특히 대중문화는 발전할 수 있다. 1960~70년대에 놀라운 경제 성장을 이룩한 일본은 1980년대 미국을 위협할 정도로 경제적 부를 이룩했다. 소니와 토요타로 대표되는 일본의 기업은 미국 시장을 잠식했고, 엔터테인먼트 업계에도 손을 뻗었다. 뉴욕을 비롯한 대도시의 부동산을 속속 사들였다. 미술과 음악 시장에서도 일본 파워는 거셌다.
1990년대 들어 버블 경제는 끝났지만 이미 일본은 선진국이었다. 1970~80년대를 거치면서 패션과 인테리어, 음식, 요트와 서핑, 카레이싱 등 라이프스타일의 변화와 영화, 재즈, 사진 등 문화 분야에서 축적과 확장이 이루어졌다. 보고 들은 것이 많으면 감식안이 생긴다. 취향이 발전한다. 게다가 일본은 서브컬처라고 부르는 만화와 애니메이션 등에서는 독보적이었다. 1970년대부터 해외로 퍼져나간 일본의 만화와 애니는 이후 엄청난 영향력을 보이기 시작했다. 돈이 있고, 독특한 취향이 있으니 일본 대중문화는 날로 성장해갔다. 그러나 문화는 사람이 만드는 것이다. 버블이 끝나면서 일본 사회는 침잠하기 시작했다. 일본의 사회학자 요시미 슈운야의 <헤이세이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은 일본 사회의 추락을 잘 보여준다. 이전까지 1억 인구 모두 중산층이 될 수 있다며 약진하던 일본은 1990년대 이후 ‘인생 플랜의 안정성 상실’과 ‘격차 확대가 불가역적’인 사회가 되었다. 미래의 꿈을 잃어버리고, 당장 눈앞의 작은 꿈들에 집착하거나 현실의 리얼리티와 멀어지는 이들이 많아졌다. 사회의 에너지가 급격하게 내부로 소멸해버린 것이다.
산업적으로 본다면, 일본은 자국 엔터테인먼트 시장이 크고 견고하기 때문에 안정된 수익에 집중했다. 국민성도 그런 면이 있다. 돌다리를 두들겨보고도 안 건넌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쟈니스의 스마프, V6, 킨키 키즈, 아라시는 1990년대부터 노래, 드라마, 버라이어티 등을 장악했다. 인기 때문이라지만 너무 심한 중복 출연이었다. 2010년대에는 인기를 끌었던 AKB48이 모든 방송프로그램과 잡지 표지와 화보를 휩쓸었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엄청난 인기를 끌며 DVD, OST, 피규어 등 나오는 상품마다 잘 팔리자 이후 애니메이션 업계는 안정된 수익을 보장하는 오타쿠를 집중 타깃으로 삼는 데 집중했다. 반대로 대중적 취향은 점점 희미해져서 익숙한 프랜차이즈인 <도라에몽> <명탐정 코난> <짱구는 못말려> 등과 인기 만화 원작 애니메이션만 인기를 끌었다.
2020년의 일본 대중문화는 사회적으로 활력이 떨어지고,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어지면서 안정된 시장만 쫓다가 무기력해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하지만 일본의 대중문화는 이제 끝났다는 결론을 내리기에는 섣부르다. 일본의 경제와 문화는 전체 규모가 크기 때문에 메이저만이 아니라 비주류도 체계적으로 끈질기게 성장해왔다. 이미 1960년대부터 침체되며 일본 대중문화의 비주류 취급을 받았던 영화도 독립 예술 영화 진영에선 수작이 계속 등장하며 산업과 예술 양면에서 지탱해왔다. 한국에서 1999년 개봉해 1백15만의 관객을 동원한 이와이 슌지의 <러브레터>도 일본에서는 미니 시어터에서 장기 상영된 인디 영화였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일본의 인디 영화는 계속 좋은 작품들이 나오고 있고, 새로운 시도를 하는 드라마도 있다. 공중파보다 자유로운 환경의 넷플릭스에서 만든 <팔로워들> <살색의 감독 무라니시>는 강렬하다. 음악에서도 시이나 링고와 아이코 같은 가수들이 여전히 현역으로 음반을 내고, 아이묭이나 수요일의 캄파넬라 같은 개성적인 뮤지션들이 활약하고 있다.
지금은 한국의 시대다. BTS와 블랙핑크, <기생충>을 만들어낸 한국의 대중문화는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고, JYP 프로젝트로 탄생한 아이돌 ‘니쥬’는 단연 일본 아이돌 산업의 가장 큰 이슈다. 이런 흐름은 당분간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한편 침체기를 맞은 일본의 풍경과 대중문화를 접하며 ‘낡은 미래’를 보는 듯한 느낌이 좋다는 이들도 있다. 정체된 사회이지만 또한 과거를 유지하며 되새김하는 사회. 앞서 말했듯 문화는 사람이 만드는 것이다. 그러니 일본 사회에 새로운 에너지가 생긴다면 문화 역시 힘을 얻고 도약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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