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SNS에 빠르게 확산된 밈이 있다. SM 신인 걸 그룹 에스파의 가사 중 한 구절, “에스파는 나야, 둘이 될 순 없어”. 이 은근한 긴장이 느껴지는 문장은 어떤 의미인가? 자신만이 복제되지 않는 유일한 원본이라는 뜻인가? 혹은 자신과 아바타는 같은 존재이기에 둘로 나뉠 수 없다는 뜻인가? 기획사가 의도한 답은 후자다. 한 멤버가 거울을 보며 춤을 추자 아바타가 따라 춘다. 어떤 멤버는 자신의 아바타와 노래를 한 소절씩 주고받는다. 그들이 SNS에 올린 모습들은 한데 모여 아바타로 탄생한다. 3D 캐릭터의 모습으로 현현한 가상세계의 아바타는 티저 영상부터 뮤직비디오, 음악 방송 무대까지 함께 오르며 인간 멤버들과 동일시된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미국 라이엇 게임즈에서 만든 K-팝 걸 그룹 K/DA다. 라이엇 게임즈는 게임 <리그 오브 레전드>의 여성 캐릭터 4인을 걸 그룹으로 데뷔시켰는데, 캐릭터에 어울리는 실제 인물들을 섭외했다는 점에서 K-팝 연예기획사와 출발은 다르지만 비슷한 기획이다. 아칼리는 (여자)아이들 전소연, 아리는 (여자)아이들 미연, 이블린은 매디슨 비어 등 실제 아티스트가 맡아, 게임 자본의 맛이 듬뿍 담겨 물 흐르듯 매끄러운 3D 랜더링 캐릭터들과 육성을 지닌 아티스트가 함께 라이브 공연을 펼친다. 게임 속 가상 캐릭터가 실존 인물의 목소리와 모습을 빌린 이 메타 아이돌 그룹은 유튜브 4억 뷰를 가뿐히 넘겼다.
세상이 참 많이 바뀌었나? 그렇지도 않다. 과거에 성공하지 못했을 따름이지,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기 때문이다. 버추얼 가수에 대한 욕망은 초고속 인터넷이 보급된 1990년대부터 태동했다. 일찍이 사이버 가수 아담이 있었다. 한국 최초 사이버 가수인 그는 가상 공간 에덴에서 1997년 12월 12일 태어나(놀랍게도 아직 23세다) 발라드 ‘세상에 없는 사랑’으로 20만 장 넘는 앨범을 팔아치웠다. 세상에 없던 이 사이버 가수는 구김살 없는 밝은 성격이나 자신은 인간이 될 수 없다는 비애를 마음 깊이 감추고 있으며, 존 레넌과 김치찌개를 좋아한다는 복합 K-아이돌적 캐릭터를 지니고 있었지만, 당시로선 음성 합성 기술이 역부족이었기에 가수 박성철이 정체를 감추고 노래했다. 센세이셔널했던 아담의 빠른 퇴장은 예견된 것이었다. 방송 출연을 위해 몇 분간 표정 변화를 구현하는 돈이 억 단위다 보니 수지 타산이 맞지 않았고, 2집 <EXODUS>를 끝으로 아담은 자취를 감추었다.
가상 아이돌에 대한 집념에 대해서라면 일본도 빼놓을 수 없다. 아담 이전에 호리프로에서 만든 최초의 가상 아이돌 다테 교코가 있었고, 지금도 현역인 보컬로이드 ‘하츠네 미쿠’가 있다. 미쿠는 AI는 아니지만 아담이나 교코 같은 마리오네트보다는 진화한 버추얼 가수다. 보컬 음악을 만들 수 있는 음성 합성 소프트웨어인 미쿠는 10년 동안 큰 인기를 끌었고, 소프트웨어가 업데이트될 때마다 새로이 태어났으며, 수많은 노래를 부르고 수많은 공연을 홀로그램으로 소화했다. 일본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욕망은 나아가 성우를 내세워 게임 및 애니메이션과 아이돌을 한데 묶은 미디어믹스 상품을 선보였다. 애니메이션 <러브 라이브! 스쿨 아이돌 프로젝트>의 아이돌 뮤즈와 게임 <뱅드림! 걸즈 밴드 파티>의 밴드들이 대표적 예다. 뮤즈의 성우들은 ‘살아 있는 뮤즈’로 불리며 내한 공연까지 했고, 뱅드림 성우들은 보컬뿐 아니라 기타부터 드럼까지 밴드의 모든 세션을 소화하는 ‘성캐일치’(성우와 캐릭터가 일치) 콘텐츠의 대표 주자다. 성우들이 앨범을 내고 공연을 하며 방송에 출연할 때 그들이 연기하는 캐릭터들은 게임, 애니메이션, 만화 등의 콘텐츠로 판매된다. 콘텐츠 제작사는 성우 프로덕션을 겸한다. 이 메타 아이돌은 2D부터 현실까지 오가는 그야말로 원소스 멀티유즈인 것이다.
한·미·일을 막론하고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욕망은 뚜렷하다. 2D부터 현실까지 모든 플랫폼에서 팔 수 있는 아이돌을 추구한다는 것. 그렇다면 다른 사례들과 에스파가 다른 점은? 이 그룹은 실존 인물과 관계 없는 버추얼 가수가 아니고, 캐릭터에 어울리는 연기자를 섭외한 것도 아니며, 실제 인물을 바탕으로 모델링한 캐릭터를 내세운다는 점에서 더욱 과감하다. SM 총괄 프로듀서 이수만은 “마블의 MCU나 DC코믹스의 DCEU처럼, SMCU라는 세계관을 여는 포문이 에스파”라 말한다. 그런데 이것이 올바른 비교인가? 마블 히어로들은 연기자가 갈아 끼워질지언정 본체는 코믹스 캐릭터다. 가상의 캐릭터들을 무한히 변주하며 판매하는 것이다. 그런데 전후 관계가 바뀐다면? 실재하는 사람의 아바타를 가상세계 속에서 무한히 변주하며 판매하는 유니버스가 가능할 것인가? 설령 가능하다 해도 그것은 어떤 윤리적 문제를 야기할 것인가?
우려를 생략하고 이렇게 말해보겠다. 왜 엔터테인먼트는 가상 아이돌의 꿈을 꾸는가? 첫째, 실존 인물이 도달할 수 없는 플랫폼에서 벌어들일 수익이 배는 될 것이다. 둘째, 아이돌 당사자와 계약 해지 후에도 마음껏 가용할 수 있는 원천 IP를 확보할 수 있다. 셋째, 가상 아이돌은 어떤 망언도 하지 않으며, 이런저런 구설수와 열애설 따위도 없고, 계약 위반을 하거나 계약 해지 요구도 하지 않는, 오직 기획자의 뜻대로만 움직이는 완전 무결한 존재다. 심지어 나이도 먹지 않는 이 존재는 ‘아이돌’이라는 단어의 본래 뜻답게 이상적인 존재가 될 터다.
하지만 윤리를 떠나 과연 그런 아이돌의 세계가 재미있을까? ‘팬질’이란 실재와 허상 사이에서 그 간극을 가늠하고 덧씌우고 상상하며 즐기는 행위다. 또한 아이돌이란 대개 미성년에 가까운 나이에 기획사가 기획한 캐릭터를 입고 역할을 수행하며 자아와 표상 사이 간극을 조율하고 그 옷에 몸을 맞추며 때로는 그것을 비껴나거나 넘어서버리기도 하는 예측 불가능성을 품은 일이다. 그들은 기획된 상품이기 전에 불완전하고 흠결이 있으며 실패하거나 성장하는, 살아 있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이돌은 영원할 수도 완전할 수도 없으며, 그래서 매력적인 것이다.
SM 총괄 프로듀서 이수만은 “미래는 셀러브리티와 로봇의 세상이 될 것”이라 말한다. ‘셀러브리티’와 ‘로봇’의 세계. 실로 비정하고 두렵지만 그럴듯한 근미래다. 연예인만큼은 로봇이 대체할 수 없는 직업군이라 예측하는 것이리라. 현대 사회의 셀러브리티는 지금도 작품과 공연으로, ‘짤’과 ‘밈’으로 수없이 복제되며 소비되지만, 실재하는 그 자신은 원본으로서의 가치-벤야민식으로 말하자면 ‘아우라’-를 지니기에 로봇으로 대체될 수 없다. 그것이 셀러브리티를 유일무이한 존재로 만드는 동시에 리스크를 지니게 한다. 그렇기에 이수만은 셀러브리티의 역할을 로봇이 함께 수행해야만 한다는 역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오리지널리티를 확보하는 동시에 리스크를 지울 것. 유일무이하지만 대체할 수 있는 존재. 그것이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야심이다.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불로장생초를 갈구하듯 그런 IP를 원했고, 에스파로 포문을 열었다. “에스파는 나야, 둘이 될 순 없어”라는 문장이 품고 있는 긴장이 이제는 좀 다르게 보이지 않는가? 아이돌마저 로봇과 밥그릇 싸움을 해야 할 미래가 올지도 모른다는 선언. 하지만 나는 팬들이 아이돌이 허상의 존재인 동시에 인간이기에 그들을 사랑한다고 믿고, 그렇기에 이 기획은 허무맹랑한 것이라 생각한다. 인간보다 홀로그램을 사랑하는 세상이 가까이 왔을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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