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내가 하루의 대부분을 보낸 곳은 ‘큰 집’이었다. ‘큰 집’은 큰할아버지의 식구와 손자들이 살고 있는 집이어서 ‘큰 집’이었지만, 우리 집보다 ‘큰 집’이기도 했다. 4인 가족이 단칸방에 살던 시절의 나에게 도보 5분 거리에 마당과 거실, 방이 여러 개 있는 ‘큰 집’은 정말 놀기 좋은 곳이었다. 몇 년 후, 우리 가족이 3개의 방이 있는 반지하 빌라로 이사 갔을 때, 큰 집은 그곳에서 도보 10분 거리에 위치한 신축 아파트로 이사했다. 내가 처음 경험한 아파트였다. 거실 밖으로 보이는 전망을 보고 놀랐다. 주차장 옆 놀이터를 보고 신이 났었다. 아파트가 살기 좋고, 놀기에도 좋고, 전망도 좋은 곳이라는 사실을 그렇게 알게 됐다. 하지만 40대인 지금 아파트를 바라보는 심정은 꽤 복잡하다.
주로 빌라에서만 살아온 나는 소주 한 병을 사려고 해도 상가 건물까지 걸어가야 하는 대단지 아파트의 삶을 이해하기 어렵다. (주상복합 아파트라면 오케이!) 아파트 환경 관리를 위해 관리실에서 내보내는 안내 방송을 견디며 사는 것도 자신 없다(군대도 아니고 기숙사도 아닌데…). 내 집에서 담배를 피우지 못하는 것도 싫다(물론 우리에게는 전자담배가 있다!). 아파트에 살기 위해 감내해야 하는 제약 가운데 가장 난감해 보이는 건 관리비다. 관리비는 아파트 내 환경을 쾌적하고 편리하게 유지하는 일을 비용으로 환산해 주민이 나눠 부담하는 것이다. 꼭 내야 하기 때문에 직장에서 은퇴한 후 아무런 소득이 없어도 감당해야 한다. 아파트는 계속 돈을 벌거나, 벌어놓은 돈이 많아야 편하게 살 수 있는 곳이라는 점에서 귀찮은 집인 셈이다.
하지만 역시 주로 빌라에서만 살아온 나는 언제든 주차하고, 또 언제든 차를 빼서 나갈 수 있는 아파트의 주차장이 부럽다. 동시에 자동차가 다니지 않는 길과 놀이터, 나무가 자라는 조경이 부럽다. 어린 시절 ‘큰 집’에서 본 것처럼 거실 밖 전망도 부럽다. 무엇보다 아파트를 사면 지금보다 조금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 가장 부럽다. 내가 믿고 발을 올릴 수 있는 경제적 사다리. 그래서 사람들은 내 집이어도 내 집이 아닌 것처럼 느끼게 만드는 온갖 제약과 규정을 감수하고 아파트에 매달린다. 나는 그걸 다 알면서도 서울 은평구의 작은 빌라를 샀다. 가진 돈이 별로 없었다. 요즘 누가 집을 자기 돈으로 사냐, 대출로 사지. 이런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 대출도 결국 내가 갚아야 할 돈이다. 그런데 내가 매달 버는 돈은 그리 많지 않다. 큰 대출을 받아서라도 아파트를 사야 나중에 집값이 오를 때 재산을 불릴 수 있는 거 아니냐. 그런 이야기를 들었지만, 매달 1백만원 이상의 돈을 갚아가면서 내가 누리고 있는 생활을 유지할 자신이 없었다. 사회인 야구팀의 선수로서 종종 경기를 뛴다. 글러브도 사고, 배트도 사고, 그 외 여러 장비를 산다. 때로는 캠핑을 가기도 한다. 당연히 텐트, 캠핑의자, 야전침대, 타프 등등 여러 장비를 샀고, 또 새로운 장비를 추가하고 있다. 친구도 만나고, 술도 마시고, 책도 사서 읽고, 영화도 보고, OTT도 거의 다 가입해서 내가 보고 싶은 영화나 드라마를 원할 때 본다. 그런 생활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대출을 받아 그나마 역세권에 위치하고, 엘리베이터가 있는 작은 빌라를 구입했다. 그러고 났더니, 몇 년 후 서울 지역의 아파트 가격이 치솟기 시작했다. 솔직히 후회했다. 많은 돈을 벌지 못해도, 삶의 질이 낮아져도 아파트를 샀어야 했을까? 무슨 배짱으로 그 사다리에 올라타지 않았던 걸까? 이제 무주택자가 아닌 터라, 아파트 청약은 꿈꾸기도 어렵다. 그만큼 아파트를 바라보는 내 심정은 복잡하다. 이번 생에서는 그저 내가 지킨 내 삶의 여유에 만족하는 수밖에. 지금보다 더 자주 야구를 하고, 캠핑을 가면서 즐겁게 돈을 써야 그때 아파트를 사지 않은 걸 그나마 다행으로 여기지 않을까? 아니, 그래도 아파트를 샀어야 했다.
WORDS 강병진(<생애최초주택구입 표류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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