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쇼리> 옥타비아 버틀러
장르를 전복시키며, 인종과 젠더 정체성을 담아낸 SF 소설로 휴고상과 네뷸러상을 휩쓴 독보적인 흑인 여성 작가, 옥타비아 버틀러. 그의 장편소설 <쇼리>를 한국에서 만날 수 있게 됐다. 쇼리는 흑인 여성 바이섹슈얼 뱀파이어로, 실험을 거쳐 햇빛에도 버틸 수 있도록 태어난 강한 개체다. 이 세계에서 피를 빠는 행위는 중독적인 쾌감을 주는 것으로, 피를 빤 인간과는 애착관계를 형성한다는 에로틱한 설정이 가미돼 있다. 기억을 잃은 쇼리는 인간 라이트와 공생관계를 시작하며 자아를 찾아나간다. 옥타비아 버틀러가 만든 뱀파이어 모계 사회 속 쇼리는 강인하고 매혹적이며, 이전엔 보지 못한 모던한 뱀파이어 주인공이다. 열대야에 읽기 좋은 오싹하고 진득한 이야기. 뱀파이어들, 공생인, 적들과 뒤얽힌 감정적 서스펜스를 좇다 보면 뱀파이어의 시간이 훌쩍 지나 있을 것이다.
② <어딘가 상상도 못할 곳에, 많은 순록 떼가> 켄 리우
무한한 테크놀로지와 유한한 육체, 그 아득한 괴리에서 발견해낸 숭고함. 중국계 미국인 SF 작가 켄 리우는 영혼과 육체, 테크놀로지를 아찔하게 뒤섞는다. 마이크로소프트사 프로그래머로 근무하다 하버드 로스쿨 졸업 후 변호사로 일한 경력은 과학 기술과 법률, 이민자의 정체성부터 중국 설화까지 가로지르며 작품 세계를 풍성하게 만든다. 그는 육체를 초월하려는 연구원의 실패를 통해 육체의 숭고함을, 3차원 너머 정신체로 영속하는 딸과 육체로 존재하는 엄마의 조우를 통해 인간의 정체성은 어디에 있는지 묻는다. 지난날의 지혜가 설득력을 잃은 시대에 인간으로 산다는 건 무엇을 의미할까? 작가는 동시대적 질문을 던지며 미래에 대해 쓴다. 이 책을 집어 든 밤, 잠들지 않아도 꿈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가장 최신의, 새롭고 가까우며 먼 미래를 읽을 수 있는 단편선.
③ <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 마리아나 엔리케스
어느 날 갑자기 여자들이 불에 타기 시작한다. 가정폭력 전문가들은 이 현상을 전염병 같은 것이라 진단한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현재 아르헨티나 문단에선 젊은 여성 작가들의 약진이 두드러진다. 조모에게 전설과 주술에 대해 들으며 자라난 마리아나 엔리케스는 아르헨티나 환상 문학의 전통을 이어받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다. 다만, 그의 텍스트에는 무시무시한 괴물 대신 국가 폭력, 군사독재의 유령, 그리고 아동 및 여성 학대가 등장한다. <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에선 강인한 여성들이 전면에 나온다. 파괴적이고 대담한 이들은 현실과 악몽을 오가며 억압된 욕망을 해방하고, 가부장제가 무너진 자리에 새로운 것을 싹틔운다. 수백 년간 불태워진, 마녀라 불린 이들이 목소리를 낸다. 환상이 실재에 침투하는 아르헨티나 문학 전통이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잠이 싹 달아날 만한 이야기다.
④ <뒷모습> 미셸 투르니에 글, 에두아르 부바 사진
“사람은 자신의 얼굴을 꾸며 표정을 짓고 양손을 움직여 손짓을 하고 몸짓과 발걸음으로 자신을 표현한다. 그 모든 것이 정면에 나타난다. 그렇다면 이면은? 뒤쪽은? 등 뒤는? 등은 거짓말할 줄 모른다.” 사진가 에두아르 부바가 찍고, 작가 미셸 투르니에가 쓴 모든 뒷모습에 대한 사진집이자 산문집이다. 배를 바다로 미는 뱃사공, 엎드려 기도하는 이들, 탈의하는 모델, 서로를 안은 연인, 아이를 업은 여성, 창밖을 보는 고양이…. 에두아르 부바가 포착한 수많은 뒷모습은 정직하고 골똘하다. 거기엔 의도도 표정도 없는 정적만이 흐른다. 그저 있는 그대로, 그렇게 존재하는 세계. 미셸 투르니에는 사진에 이런저런 각주를 붙이며 우리가 지나쳐온 숱한 뒷모습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잠이 오지 않는 밤, 침대 머리맡에 두고서 언제고 펼쳐 들기 좋은 책이다.
⑤ <불볕더위에 대처하는 법> 매기 오파렐
1976년 영국을 강타한, 기록적으로 뜨거웠던 여름, 나흘간의 이야기를 그려낸 소설이다. 은퇴한 아버지가 신문을 사러 가겠다고 나가서는 홀연히 실종된다. 아내는 세 아들딸을 호출해 오랜만에 모인다. 어머니에게서 아버지의 비밀을 알게 된 남매는 아버지를 찾기 위해 아버지의 친형이 있는 아일랜드의 한 수도원으로 향한다. 누구나에겐 각자의 사정이, 발화되지 못한 결함과 비밀이, 그리고 우연한 선택이 만든 뒤틀린 나이테 같은 인생의 결이 있다. 그리고 이상 기후처럼 돌발적으로 벌어지는 상황은 때때로 그런 것들을 갑작스럽게 돌출시키고, 삶은 이전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아일랜드에서 태어나 웨일스와 스코틀랜드에서 자란 작가 매기 오파렐의 차별 경험과 정체성이 읽히는 소설. 인생의 미스터리와 아이러니를 가족사에 담아낸 작품으로, 책을 덮고 나면 불볕더위에 대처하는 법을 조금쯤은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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