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폰SE가 출시됐다. 가장 대중적인 폰으로 가격대도 55만원부터 시작된다. 아이폰치고 저렴하다. 다른 제조사들도 잇따라 보급형 스마트폰을 출시하고 있다. 시장에서도 플래그십보다 보급형 제품이 각광받는다. 스마트폰 외에도 이어폰, 드론, 카메라 등 전 산업에서 보급형 제품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보급형 시대의 서막은 경기 침체가 장기화될 것이라는 전망에서 비롯됐다. 새로운 기술만이 진리인 테크 산업에서 맞닥뜨린 보급형 시대에 대한 고찰이다.
휴대폰 바꾸고 싶다. 이 말을 입에 달고 지낸 지 두 달째인데, 아직도 못 바꿨다. 게을러서이기도 하지만, 지금 허투루 돈을 쓸 때가 아니라서 그렇다. 이 글을 쓰기 직전에도 통장 잔고를 확인했는데 마음이 무거웠다. 점찍어둔 휴대폰은 플래그십 폰이다. 구입하면 지금보다 통신 요금이 더 나갈 게 뻔하다. 통장한테도 미안하고, 집에도 미안하고, 지금 쓰는 멀쩡한 폰한테도 미안하고. 여러모로 미안한 마음에 플래그십 폰은 포기했다. 또 경제 뉴스 댓글도 아끼고 버텨야 하는 시기라고들 한다. 동의한다. 현실은 이러하여도 물욕이 가라앉지 않는 건 왜일까. 플래그십 폰의 최첨단 사양에 매혹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가장 대중적인 아이폰이 출시됐다. 가격이 파격적으로 저렴한데 성능이 준수하다. 애플은 싼값으로 ‘퉁’치는 전략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세련된 마케팅을 잘한다. 값은 저렴해도 역사상 최고의 싱글 카메라를 탑재했다고 한다. 55만원대에서 가능한 최고 사양을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이 정도면 마음이 움직일 만한 명분이지 않나? 내가 팔랑귀라서 그렇다는 건 아니고. 성능 외에도 디자인이 정겨운 것도 마음을 뺏긴 이유다. 어쨌든 최고 사양인 256GB 모델이 76만원이다. 2년 약정 기준으로 한 달에 커피 한두 잔 덜 마시면 되는 가격 아닌가?
보급형 스마트폰을 출시하는 건 애플만이 아니다. 삼성도 보급형 스마트폰을 출시했다. 갤럭시 A51은 가격 대비 높은 사양을 갖췄다. 게임 잘 돌아가고, 카메라 성능도 준수하다. 최근 프리미엄 폰을 출시한 LG전자도 곧 중저가 5G 스마트폰을 출시한다. 샤오미도 40만원대의 5G 스마트폰을 국내에 출시할 전망이다. 스마트폰으로 뮤직비디오 찍고, 사진집 낼 것 아니라면 보급형 스마트폰 사양에 만족할 사람은 차고 넘칠 것으로 예상된다. 게다가 요즘은 스마트폰이 상향평준화를 이룬 시대 아닌가. 어지간한 보급형도 사양이 높다. 그렇게 자위하고 있지만 여태까지 보급형도 구입하지 못한 이유는 돈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아껴야 하니까. 욕망을 채우는 일은 코로나19 종식 이후로 미루기로 했다.
보급형이 유행하듯 쏟아지고 있다. 카메라, 노트북, 헤드폰 등 다른 시장에서도 플래그십 모델은 자취를 감추는 중이다. TV나 세탁기 등 가전 분야도 상황은 비슷하다. TV 매출을 끌어올리는 올림픽 특수도 사라졌다. 다른 스포츠도 마찬가지다. 코로나19로 인해 미세먼지가 줄어든 것도 이슈다. 맑은 하늘을 보는 게 즐겁지만, 미세먼지가 줄어드니 공기청정기에 대한 관심도 식었다. 한동안 필수 가전으로 여겨지던 공기청정기가 ‘급어색한’ 가전이 될 줄 누가 알았겠나. 최근 출시한 신제품 중에는 주목할 만한 첨단 기술이나, 압도적인 성능을 강조한 모델이 드물다. 전자제품 시장의 암흑기가 시작된 걸까?
코로나19 확진자 증가세를 예상할 수 없는 상황에서 우리는 자연스레 경기 침체 장기화를 예상하게 된다. 경기 침체는 소비자의 지갑을 닫게 만든다. 하지만 아직 완전히 닫히지는 않았다. 여전히 신제품에 호기심을 갖고 구입하고자 애쓰는 사람들이 많다. 아이폰SE 출시일에 가로수길 애플 매장은 영업 시작 1시간 전부터 입장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고, 하루 종일 인파로 가득했다. 그렇다고 지난해 아이폰 11 출시 때만큼 뜨거웠던 것은 아니다. 사회적 거리 두기 여파도 있지만, 제품에 대한 관심이 그보다 낮았기 때문이다. 아이폰SE는 충분히 매력적이지만 아이폰 11만큼 혁신적인 제품은 아니다. 익숙한 디자인이라는 점에서 소비자의 호기심도 덜하다. 애플 스토어를 메운 인파가 아이폰SE의 혁신과 신기능 때문에 매장을 찾진 않았을 것이다. 비싼 아이폰을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다는 가성비가 사람들을 끌어모았으리라 생각한다. 지금은 혁신을 외칠 때가 아니라 가성비를 내세울 때니까.
기업 입장에서 중저가와 보급형은 위축된 시장을 살릴 카드다. 글로벌 기업들은 2020년 1분기 스마트폰 전 세계 출하량이 지난해 대비 10% 급감하자 중저가 보급형 카드를 꺼내 들었다. 중저가 보급형은 기대만큼 매출이 높지 않더라도 플래그십 제품을 내놓는 것보다 타격은 덜하다. 기왕 맞을 걸 조금이라도 약하게 맞자는 의도다.
2분기에는 타의 반 자의 반 출하량을 줄여야 했다. 원자재 수급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공장 가동도 불가능했다. 출하하려 해도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지금은 3분기를 준비할 때다. 북미를 비롯한 유럽 몇몇 국가들은 사회 활동을 재개하기 시작했다. 직원들도 출근 준비를 마쳤다. 공장도 재가동된다. 하지만 이전과는 다르다. 사회적 거리 두기는 필수가 될 것이며, 제품 생산량도 예전 같진 않을 것이다. 적게 팔리니 많이 만들 이유가 없다. 기업들은 매출 하락이라는 공포에, 기업 내 코로나19 감염자 발생이라는 불확실성까지 껴안고 가야 한다. 살얼음판이다.
혁신 대신 가성비. 플래그십 대신 보급형이 각광받는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기대해야 할까. 당분간 혁신적인 기술과 놀라운 제품을 만나기는 힘들겠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지낸다. 그 시간만은 변함없다. 내 낡은 스마트폰으로 볼 수 있는 콘텐츠는 무궁무진하다. 침대에 누워 하루 종일 콘텐츠만 소비할 자신 있다. 만들 수 있는 콘텐츠도 많다. 다만 사용자가 게으를 뿐이다. 다시 콘텐츠에 집중할 때다. 얼마나 새로운 기술이 적용된 콘텐츠냐보다 누구나 접근하고 사용할 수 있는 콘텐츠냐가 중요하다. 이보다 중요한 것은 흥미일 테고. 어느 때보다 세계가 연결되어 있다고 느껴지는 요즘이다. 보급형 기기로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쉽고 가벼운 콘텐츠일수록 전파력이 크다. AR이든, VR이든 기술을 활용한 콘텐츠가 아니어도 좋다. 변화와 혁신은 콘텐츠에서부터 시작되기도 한다. 그런 이유로 휴대폰 교체는 코로나19 종식 이후로 미뤄보려고 한다. 귀가 얇아 그때까지 버틸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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