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저리그는 미국인 삶의 일부였다. 1백 년이 넘는 역사 속에서 무수히 많은 드라마를 써내려갔고 빛나는 별들을 탄생시켰다. 그러나 이제는 과거의 영광이다. 작년 월드시리즈 평균 시청률은 8.1%에 그쳤고 젊은 팬의 유입은 현저히 줄었다. 고민에 빠진 메이저리그 앞에 돌파구가 나타났다. 바로 한국 프로야구다. ESPN이 KBO를 중계하기 시작했는데 반응이 뜨겁다. 전부터 미국인은 저마다의 이유로 KBO 팀들을 응원해왔다. MLB에는 없는 파도타기 응원과 치어리더 문화와 배트 플립 등이 젊은 층에 통한 거다. 과연 메이저리그는 한국 야구를 본보기 삼아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할까?
미국 메이저리그가 위기다. 코로나19 때문만은 아니다. 2019년 메이저리그는 전년 대비 3.9% 증가한 1백7억 달러의 매출을 올렸다. 1995년 매출이 14억 달러였음을 감안하면 실로 엄청난 성장이다. 그러나 관중은 6천8백49만 명으로, 정점을 찍었던 2007년의 7천9백50만 명 대비 1천만 명이 넘게 사라졌다. 지역 스포츠로서 입지가 탄탄하다고 하나, 2014년에 은퇴한 데릭 지터를 마지막으로 전국구 스타는 더 이상 나오지 않고 있다. 월드시리즈 시청률도 끝없이 떨어지고 있다. 보스턴 레드삭스가 밤비노의 저주를 깨고 86년 만에 우승을 차지한 2004년 월드시리즈의 평균 시청률은 15.8%였다. 시카고 커브스가 염소의 저주를 극복하고 1백8년 만에 우승을 차지한 2016년은 12.9%였다. 반면 워싱턴 내셔널스가 창단 첫 우승을 차지한 지난해의 평균 시청률은 8.1%에 그쳤다. 메이저리그의 스토리 라인을 지탱해온 거대한 저주 두 개가 사라진 후, 미국 사람들은 ‘우리 지역 팀’이 올라가지 않는 한 월드시리즈를 보지 않는다.
메이저리그의 가장 큰 문제는 팬의 급격한 고령화다. 3년 전 조사에서 NBA 팬의 평균 나이는 42세, NHL은 47세, NFL은 50세였던 반면, 메이저리그는 57세였다. 젊은 팬이 적다 보니 소셜 미디어와 뉴 미디어 노출 경쟁에서도 완패를 당하고 있다. NBA 공식 유튜브 채널 구독자는 1천3백80만 명이지만, 메이저리그는 2백37만 명에 불과하다. 세계화의 차이라고 하기에는 지극히 미국 스포츠인 NFL도 6백50만 명에 달한다. NFL은 메이저리그보다 채널을 9년 늦게 개설했다.야구는 한때 미국의 국기(國技)였다. 미국인은 뉴욕주 쿠퍼스타운에서 애브너 더블데이가 야구를 처음 고안했다고 믿는다. 쿠퍼스타운에는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이 있다. 물론 야구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증거는 영국에 더 많다. 하지만 야구를 지금의 모습으로 발전시킨 것은 미국 사람들이 맞다.
우리에게 야구를 처음 소개한 것도 미국 사람들이다. 1901년 YMCA 개척 간사로 한국에 파송된 미국인 선교사 필립 질레트가 1905년부터 기독교청년회 회원에게 야구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야구라는 문물은 미국에서 한국으로, 또는 미국에서 일본을 거쳐 한국으로 전파됐다. 2012년 볼 카운트의 순서를 일본식(S-B-O)에서 미국식(B-S-O)으로 바꾼 이후 우리는 미국에서 시행된 규칙(비디오 리플레이, 자동 고의사구 등)을 거의 그대로 따라가고 있다. 하지만 전파 방향이 반대인 경우도 있다. 2002년 애너하임 에인절스(현 LA 에인절스)는 한국에서 응원용으로 쓰는 막대풍선을 수입했고 ‘선더 스틱’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그해 창단 첫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플로리다 말린스(현 마이애미 말린스) 제프리 로리아 구단주는 처음으로 여성 응원단을 만들어 ‘인어들(Mermaids)’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하지만 이른바 한국식 응원은 메이저리그에 자리 잡지 못했다. 조용한 분위기를 원하는 나이 지긋한 골수 팬들 때문이다.
이들은 시끄러운 음악과 다 함께 참여하는 요란한 단체 응원을 바라지 않는다. 미국의 젊은이들이 야구를 외면하는 이유는 야구장이 너무 조용하며 야구 경기가 너무 정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야구에 관심 없던 젊은이들이 한국의 야구장을 방문한 후 그 매력에 사로잡히는 일이 적지 않다.
메이저리그는 기로에 서 있다. 집토끼(노년층)를 잡을 것인가, 산토끼(청년층)를 잡을 것인가. 선택을 해야 한다. 산토끼를 잡으려면 집토끼의 이탈을 무릅쓰고서라도 새로운 시도를 해야 한다. 하지만 산토끼를 쫓다가는 집토끼가 우리에서 뛰쳐나가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 이것이 메이저리그의 딜레마다. 고민에 빠진 메이저리그는 그 시뮬레이션을 해볼 좋은 기회를 얻었다. 메이저리그 개막이 여전히 불투명한 상황에서 5월 5일 먼저 시작한 KBO 리그를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게 됐기 때문. 미국의 전문 스포츠 케이블 ESPN은 KBO 리그와 중계권 계약을 맺고 중계를 시작했다.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메이저리그 구단이 없는 노스캐롤라이나(NC)주 팬들이 NC 다이노스를 응원하기 시작했으며 (노스캐롤라이나주에서는 심지어 공룡 화석이 발견됐다), 응원 팀을 고르는 데 삼성 폰, KIA 차, LG TV 등 다양한 이유가 동원됐다. 한국 팬들을 놀라게 한 건 2018년 아메리칸리그 MVP 무키 베츠(LA 다저스)의 KBO 소개 영상이었다. 정확한 발음으로 주목할 선수 10명을 소개한 베츠는 양의지(NC)의 ‘의’를 완벽하게 발음했고, 손가락 하트와 함께 ‘Fighting’이 아닌 ‘Hwaiting’으로 마무리했다. ‘뜬공 빠던’을 보고 나서 “재미없는 메이저리그는 더 이상 보지 않을 것”이라고 한 팬이 있는가 하면, LG 정찬헌이 2014년의 벤클(벤치 클리어링)로 재조명되고, 외야 펜스 광고의 개그맨이 ‘피자 왕’이 되는 등 마블 부럽지 않은 캐릭터들이 탄생하고 있다.
KBO 리그가 관중 유치라는 다음 단계로 나아간다면, 관심은 더욱 폭발적일 거다. MLB에는 없는 파도타기 응원과 각 구단 응원단, 치어리더 문화는 다시금 그들에게 큰 충격을 줄 수 있다. 조용하고 정적인 미국 야구 팬들은 자신들이 고안한 스포츠를 자신들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즐기는 더 놀라운 장면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는 메이저리그의 방향 설정에 큰 도움이 될 가능성이 높다. 미래학자들은 코로나19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세상을 만들어낼 것이라고 예측한다. 눈에 띄는 것 중 하나는 OTT(온라인 동영상 서비스)를 통한 ‘K-드라마’와 ‘K-무비’의 재부흥이다.
과연 KBO 리그의 미국 전역 생중계는 야구의 본거지인 미국에 ‘K-베이스볼’ 열풍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WBC에서의 선전. 그리고 가끔씩 소개되던 진기명기가 아닌, 우리가 30년 동안 만들어온 프로야구 콘텐츠를 미국 팬 앞에 선보이는 순간이 마침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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