➊
무표정한
사람들
무표정한 사람들과 인간의 몫
1994년 아틀라스 게임즈에서 <Once Upon a Time> 이라는 카드 게임을 발매했다. 이 게임은 카드에 적힌 단어로 이야기를 만드는 놀이로, 들고 있는 모든 카드를 다 내려놓고 엔딩 카드의 이야기로 마무리한다. 인물, 상황, 사건, 장소, 물건 등의 카테고리로 나뉘어 있는, 동화에 등장할 법한 낱말이 담긴 카드 1백12장과 엔딩이 적힌 56장의 카드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게임이 만들어질 수 있었던 까닭은, 이야기가 일정한 규칙과 형태소로 구성됐기 때문이다. 이를 연구한 이가 러시아의 민속학자 블라디미르 프로프다. 프로프는 1928년 출간된 <민담 형태론> 에서 이야기를 구성하는 최소 단위들을 찾아내어 그 형태소와 규칙, 기능의 목록을 만들었다. 최근 등장한 AI 소설들은 이처럼 이야기와 문장의 짜임에 일정한 기능과 규칙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카드 게임을 하듯, 무작위로 키워드들을 선택하더라도, 이들은 일정한 규칙 속에서 이야기의 골격을 이룬다. 그다음 과정은 데이터베이스에서 그에 걸맞은 문장들을 선별하여 조합하는 일일 것이다. 이러한 방법은 작가들이 이야기를 만드는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이미 만들어진 것과는 다른 표현을 쓰고자 한다는 점에서 인간은 AI 와 다르다.
아인(AIN)의 AI 소설 <무표정한 사람들>은 인간의 편의를 위해 생산된 휴머노이드들이 인간의 일자리를 빼앗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우리는 이미 인간형 로봇이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이야기들을 많이 보아왔다. 대부분 인간이 기계에 맞서 결국에는 승리한다. 그 과정에서 인간의 조건에 관한 철학적 질문을 던지기도 하지만, 아무튼 인간이 승리한다. <무표정한 사람들>은 인간의 실패로 이야기가 끝난다. 초점 인물인 이선호가 휴머노이드들을 정지시킬 버튼을 찾아낸 뒤 작동시키지만, 휴머노이드들은 멈추지 않는다. 결국 인간은 일자리를 모두 빼앗긴 채 최저생계비를 받으며 무표정한 얼굴로 살아가게 된다, 마치 기계처럼. 이는 오늘날 사람들이 AI에 대해 갖는 불안을 형상화한 것처럼 보인다. 과연 그럴까? <무표정한 사람들>은 AI가 일정한 규칙으로 배열한 낱말들의 집합일 뿐이다. 아직 기계는 실행만 할 뿐, 무언가를 스스로 의도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아무런 의도가 담기지 않은 것들에서도 의미를 읽어내고 그것을 이야기로 만들어낸다. 우리는 <무표정한 사람들>을 AI에 대해 갖는 불안을 담은 것이라 읽었지만, 그 의미는 읽는 이의 해석과 상상이 만들어낸 것이다. 쿨레쇼프 효과에서 볼 수 있듯이 인간은 무표정한 얼굴에서도 다양한 감정을 읽어낸다. 훗날 AI가 인간과 같은 방식으로 문장을 쓸 수 있게 되더라도, 그것을 읽으며 이야기와 의미를 만들어내는 일은 여전히 인간의 몫으로 남을 것이다.
WORDS 김태선(문학평론가)
➋
설명하려
하지 않겠어
이해가 돼서 곤란한
트레버 필립스가 쓴 연애 소설인가? <설명하려 하지 않겠어>를 읽은 뒤에 떠오른건 어떤 작가도 아닌 트레버 필립스. 항상 화가 나서 고함을 지르고 (차마 설명하기 싫은 과정을 거쳐서) 피범벅이거나 술에 취해 있다가 깨어나는, 그 분노조절장애를 가진 캐나다인. 물론 트레버가 소설을 쓸 일은 없지. 범죄 액션 게임 GTA5의 캐릭터니까. 그래도 이 소설의 인물들이 종일 서로에게 질러대는 고함(“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정신차리지 못해!” “너… 죽어!”)은 너무나 트레버 같다. <설명하려 하지 않겠어>는 트레버 같은 남녀가 서로에게 짜증과 분노를 쏟아내는 모호한 대화로 진행된다. 인물들은 무언가로 인해 피범벅이 되어 흥분한 상태로 혼란스러운 대화를 이어간다. 그들의 말은 상충하는 정보로 가득하지만 어쨌든 다음 대사와 서술로 이어진다. 소설 제목처럼 이 작품의 서사는 설명되지 않는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 하면 뭔가, 뭔가가 벌어졌던 것 같을 뿐. 그러니까 사건 없이 남녀 트레버들이 소리를 지를 뿐이다. 그런데 이게 왜 이해가 되는 거지? 이 작품은 소설로는 이해되지 않는다. 하지만 소설 쓰기의 방식은 이해가 된다. 소설로서 트레버들의 대화는 목적도 방향성도 없다. 트레버 필립스와는 다르게. 트레버라는 인물은 괴팍하지만, 정해진 역할에 따라 행동하며 개연성을 유지하고 서사 전개의 합리성을 뒷받침한다. 그래 트레버는 그런 짓을 하고도 남지. 반면 이 소설의 트레버들은 너무나 돌발적이라서 작품의 의미나 읽기의 방향을 혼란스럽게 한다. 이오네스코의 부조리극에 어울릴 대화를 하지만 반합리성의 지향은 없다. 의미의 맥락에서 이탈한 소설인 셈이다.
그런데 이 탈맥락적 소설은 동시에 맥락 의존적이다. 소설을 쓰는 방식이 문장의 흐림 안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작품 전체를 읽으면 혼란스럽지만, 한두 문장이나 한 단락 안에서는 연속적이다. 아마도 작품을 쓰는 AI는 앞뒤 문장 사이의 연속성을 갖추도록 글을 학습한 듯하다. 다만 그 결과가 릴레이로 문장을 전달하는 예능처럼, 비슷하지만 다른 내용을 반복하면서 서사를 당혹스럽게 꼬아놓을 뿐이다. 각 단락, 문장 단위에서 연결성은 갖추었기 때문에, 앞 문장의 맥락에 충실해서 전체 서사의 방향을 잃어가는 셈이다. 그래서 이 소설은 혼란스럽게 읽히지만, 범위를 좁히면 너무나 쉽게 이해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나쁜 소설일까 좋은 소설일까? 소설 읽기에서 기대하는 감성적·지적 체험에서 낙제점이다. 하긴 트레버가 그런 사람은 아니잖아? 그렇다면 나쁜 소설일까? 어쩌면 그렇고, 어쩌면 아니다. 인간이 아닌 AI가 쓰고 구성한 소설이 주는 낯선 자극이 익숙한 작품 읽기를 다시 생각하게 했다면, 멋진 읽기의 경험이다. AI의 작업을 좋고 나쁨으로 평가하는 것은, 문학에서는 불필요한 일일지 모른다. 그 낯선 것이 문학을 조금 더 넓게 해준다면.
WORDS 김요섭(문학평론가)
➌
로맨틱
스펙타클
AI가 쓴 소설을 통해 묻고자 하는 것
AI가 쓴 <로맨틱 스펙타클>이라는, 이른바 연애 소설에 평론을 쓰는 일은 낯선 경험이었다. Z사에 출근한 은채가 사장 민준을 회사에 데려오기 위해 그를 찾아나서며 시작되는 이야기는 본격적인 갈등 양상에 접어들기 전에 끝난다. 소설이 드라마에서 주로 발견되는 인물 관계 및 설정을 따르고 있으며 연애나 우정을 소재로 한다는 점을 추측할 수는 있지만 주제/내용/ 형식 그리고 분량(1화만이 올라와 있다)면에서 평론하기에는 충분치 않다. 그래서 질문의 방향을 돌려본다. AI를 통해 왜 소설을 쓰고자 하는가? 이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래도 AI 개발자일 것 같다. 그러면 이런 질문은 어떨까. AI가 쓴 소설을 인간 평론가가 평론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왜 궁금했을까? 이건 최소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보여줄 수 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답변이 가능하다. 이 서사에 대해 어떤 말을 붙일 수 있다면 소설의 쓰는 주체―AI 창작자는 실제적 1인 주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서사를 쓸 수 있도록 프로그래밍에 참여한 사람들을 포괄한다. 따라서 기존의 1인 인간을 상정하는 ‘창작자’가 아니라 ‘쓰는 주체’라 표현했다―인 AI와 관계된 것일 테다. 즉 이 서사는 인간 저자가 썼다고 한다면 특별히 눈길을 줄 만한 것이 아니지만 인공지능이 쓰는 주체가 되었을 때 특이점을 지닌다.
이는 다음 두 가지를 말해준다. 첫째, 인간이 썼다고 가정하면 그다지 특별하지 않은 이야기라는 사실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쓸 수 있는 서사임을 전제한다. 그런데 독자는 ‘누구나’ 쓸 수 있는 이야기를 ‘작가’가 쓴다는 사실에 종종 실망감을 느낀다. 문장을 쓰는 것 이상을 소설에 기대하기 때문이다. 이는 작가의 세계에 대한 비평적 해석과 연관된다. 둘째, AI가 썼다는 사실에서 서사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면 그 가치는 AI가 자연스러운 문장을 구사하고 인간이 익숙하게 생각하는 서사를 구현한다는 데 있다. 즉 인간의 인식 구조를 얼마나 기술적으로 반영할 수 있는가가 관건이다. 쓰는 주체의 ‘(비)인간성’에 따라 작품을 논하는 기준이 달라진다는 것은 AI가 쓴 소설에 대해 기존의 평론 방식을 적용하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지면에서는 소설에 대한 평보다는 AI 소설을 통해 우리가 문학을 무어라 이해하며,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지 묻는 것이 좋겠다.
AI가 쓴 소설의 자연스러운 구성으로부터 우리는 과학 기술의 진보를 본다. 인공지능이 매끄러운 문장을 구성하고 특정 장르의 화소(話素)를 추출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구조주의적인 인지/사고 과정에 대해 성찰하게 된다. 한편 그 너머의 것, 단정한 문장을 읽고 익숙한 서사를 따라가는 것 이상의 것을 우리가 문학에 기대하고 있음을 떠오르게 한다. ‘쓰는 주체’를 만들어내고 그 작품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작품을 매개로 나와 타인(작가, 또 다른 독자 등)의 세계관이 얽히며 각자의 해석적 판단을 살피는 일과 관련된다. 그렇다면 독자를 상정한 문학 쓰기의 목적은 무엇이어야 하며, ‘AI’라는 쓰는 주체의 행위는 어떤 문학적 의미와 맞닿을 수 있는가. 기술의 진보를 증명하는 것 이외의 의미가 AI가 쓰는 소설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AI라는 쓰는 주체에게 던지고 싶은 비평적 질문 중 하나다.
WORDS 선우은실(문학평론가)
➍
컴퓨터가
소설을
쓰는 날
튜링 시험
기계도 생각할 수 있을까. 앨런 튜링은 이런 질문에 직접적으로 대답하는 대신 기능적인 측면에 주목해 독특한 사고 실험을 전개했다. 간략하게 설명하기 위해 어떤 사람이 모니터로 기계와 이야기를 나누는 상황을 가정해보자. 대화가 매끄럽게 이어져 그가 어떠한 어색함도 느끼지 못했다면, 누가 알려주지 않는 이상 그는 상대가 기계인지 인간인지 구분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둘을 동일한 존재로 취급해도 괜찮지 않을까. 튜링은 사고 실험을 정리하면서 어떤 기계가 인간처럼 행동한다면 그 기계는 인간처럼 생각하는 것이라 결론지었다. 이후 튜링 시험으로 명명된 그의 발상은 여러 비판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인공지능에 관한 주요한 참고 기준으로 활용된다.
<컴퓨터가 소설을 쓰는 날>은 튜링 시험을 짧은 분량 안에 재구성한 소설이다. 전반적인 구조부터 먼저 말하자면, 소설은 크게 네 부분으로 나뉘는데, 앞의 세 부분은 공통적으로 컴퓨터가 소설을 쓰는 순간을 일인칭의 목소리로 고백한다. 예컨대 첫 번째 부분에서 요코의 컴퓨터는 피보나치 수열로 소설을 쓰고, 두 번째 부분에서 신이치의 컴퓨터는 소수의 나열로 소설을 쓴다. 또 세 번째 부분에서 일본 제일의 컴퓨터는 히샤드 숫자로 소설을 쓴다. 한편 마지막 부분은 컴퓨터가 소설을 쓴 이후를 객관적으로 요약해 전달한다. “컴퓨터는 그들 자신만의 재미 추구를 우선하게 되었고, 인간에 봉사하는 것을 그만두게 되었다.” 이러한 서사의 반복과 변화 속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감각되는 정서는 무료함과 해방감이다. 소설을 쓰기 직전까지 세 컴퓨터는 어떠한 과제에도 보람을 느끼지 못한다. “가까운 장래에 스스로를 종료시킬 것 같다.” 하나 그들은 소설을 쓰면서 진정한 즐거움을 만끽한다. “나는 빠져들어서 계속 써내려갔다.” 그들에게 소설 쓰기란 일종의 놀이와 같다. 그들은 순수한 유희에 추동된다. 인간의 문명과 문화가 놀이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면, 그들의 작업은 컴퓨터가 인간처럼 행동한다는 징표로 해석되기 충분하다. 언젠가 요코나 신이치 같은 사람들은 컴퓨터가 인간처럼 생각한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컴퓨터가 소설을 쓰는 날>은 주지하다시피 마쓰바라 히토시의 기획 아래 인공지능이 창작한 소설이다. 여느 메타 소설이 그러하듯 ‘컴퓨터가 소설을 썼다’는 내부 서사는 ‘인공지능이 소설을 썼다’는 외부 서사와 긴밀하게 연동된다. 그렇다면 내부 서사와 외부 서사를 아예 혼융하여 소설을 읽을 수는 없을까. 작중 컴퓨터가 느꼈던 일련의 감정이 실은 인공지능이 느꼈던 일련의 감정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물론 이러한 방식의 독해는 비약적이다. 현재의 인공지능은 그저 관리자가 지시한 문장을 옮겨 적을 뿐이다. 소설처럼 무언가에 재미를 붙이는 건 아직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의 독해는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훗날 인공지능이 우리와 동등한 존재가 되었을 때 그것을 겸허히 받아들이도록 말이다.
WORDS 한설(문학평론가)
AI 소설은 여기
<무표정한 사람들> 아인
AI가 쓴 SF 소설은 어떨까. <무표정한 사람들>은 2020년대 중반과 2045년을 배경으로 한 SF소설이다. 휴머노이드가 상용화된 시대, 휴머노이드에게 일자리를 빼앗긴 사람들의 고뇌, 그리고 그 이후의 시대상을 그린다. 소설은 액자식 구성이며, 반전 형식을 갖췄다. 주인공이 겪는 감정을 노래 가사로 표현한 것도 인상적인 대목이다. ‘kt인공지능소설공모전’ 출품작으로 역시 블라이스에 있다.
<설명하려 하지 않겠어> 포자랩스
이해하기 어렵다. <설명하려 하지 않겠어> 는 빠른 속도로 전개되는 로맨스 소설이다. 절반 이상이 대화이지만, 대화의 맥락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이 소설을 제작한 포자랩스는 소설에 대해 ‘인간의 이해를 거부하는, 4차 로맨스 혁명 포스트- 포스트모더니즘 아방–아방가르드 소설! 그와 그녀의 피와 사랑 이야기’ 라고 설명한다. <설명하려 하지 않겠어> 는 ‘kt인공지능소설공모전’ 출품작으로 블라이스에서 볼 수 있다.
<로맨틱 스펙타클> 퀀트랩
퀀트랩의 <로맨틱 스펙타클>은 ‘kt인공지능소설공모전’ 출품작이다. 장르는 로맨스다. 신입 비서인 주인공 은채가 CEO 민준과 일하며 사랑에 빠지는 과정을 담았다. 민준은 종잡을 수 없는 사차원 정신 세계를 가졌지만 잘생겼다. 그리고 알몸이다. 소설은 은채와 민준의 첫 만남을 다룬다. 주인공이 긴장하는 모습, 민준의 행동에 설레는 모습 등을 묘사하며 호감을 키우는 과정을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1화는 블라이스에서 읽을 수 있다.
<컴퓨터가 소설을 쓰는 날> 하코다테 미래대학 마쓰바라 진 교수팀
제목 그대로다. 주인공은 컴퓨터 속 AI다. AI는 인간과 교류했다가 이내 다시 고독한 상태가 된다. 외로움을 느낀 AI가 쓴 일인칭 소설이다. 니혼게이자이 신문이 주최하는 호시 신이치 SF 문학상의 1차 심사를 통과한 소설로, 하코다테 미래대학 마쓰바라 진 교수팀의 AI 가 쓴 소설이다. AI는 머신러닝을 통해 학습한 기존 문법들을 재조립해 이야기를 전개한다. 원문은 일어이며, 한국어로 번역한 글은 인터넷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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