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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현이 국민 작가가 될 수 없는 이유

밤마다 <내 남자의 여자>에 열광하는 기자가 김수현을 지지한다. 남자들은 치를 떠는 작가 김수현을 손뼉 치듯 좋아하는 이유. 그런데도 그녀가 국민 작가될 수 없는 김수현의 치명적인 아킬레스건에 대하여. <br><br>[2007년 6월호]

UpdatedOn May 20, 2007

Editor 이지영 Illustration 장재훈

고백컨대 나는 김수현 드라마를 좋아한다. 김수현 드라마를 좋아한다고 하면, 흔히 나를 억세고, 다소곳하지 못하고, 시끄럽고, 피곤한 여자로 생각하지만 그래도 나는 김수현 드라마가 좋다. 단지 그녀 드라마를 좋아했을 뿐인데 사람들이 나를 억새 같은 여자로 생각할 정도로, 김수현 드라마에는 징글징글한 요소가 가득하다. 등장인물들은 늘, 언제나, 시도 때도 없이, 아침에 눈을 떠서 밤에 잠들 때 까지 말이 많고 시끄럽다. 어쩜 그리도 그들은 자기 할 말을 모조리 다 내뱉으며 사는 걸까. 김수현 드라마를 보노라면 이건 무슨 TV가 아니라 선거 유세장에 온 기분이다. 한 치도 물러섬이 없는 감정 다툼, 그리고 그 안에서 치고 싸워서 결국은 승부를 내고야마는 근성. 그런 것들이 아마도 김수현 드라마에 ‘세다’는 인식을 부여 했을 것이다. 그러니 만사에 복잡다단한 걸 싫어하는 남자들은 그녀 드라마 얘기만 나와도 부르르 치를 떠는 것이다.
하지만 여자인 나는 다르다. 하고 싶은 말의 반의반도 못하면서 사는 성격인지라 나는 늘 김수현 드라마가 반갑다. 오늘 밤에도 그녀가 나 대신 싸워줄것만 같다. “그래 난 유치한 인간이야. 내가 어떻게 박태준하고 같을 수 있겠어. 난 무식하고 배운 것도 없고 게다가 머리까지 나쁜데. 상우 내 앞에 데려다놔. 당신은 잘났잖아. 고고하고 깨끗하고 주관 뚜렷하고 자신만만하고 태풍이 불어도 옆에서 누가 죽어도 상관없이 독하고 무섭고 유능하고 치밀하고 정확하고 실수 없고 누구나 인정하잖아. 다들 인정하잖아. 난 안 그래 당신말대로 난 형편없어. 아무것도 없어. 그런 나한테서 상우까지 뺏어야 하니? 한땐 대신 죽어도 될 만큼 목숨 걸고 사랑한 남자가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어? 당신이 나한테!”(<사랑과 야망> 중) 대략 10줄이 넘고도 남을 장문의 대사. 배우를 숨조차 쉬지 못하게 만드는 바로 이런 대사가 김수현 드라마의 특징이다. 김수현은 늘 이런 식으로 얘기한다. 세상 어떤 누구도 이렇게 말하면서 살지는 않을 테지만 오로지 김수현은 말로 사람 속을 뒤집어놓고, 시원하게 긁어놓는다. 마치 그래야만 고름이라도 터진 것처럼 속이 시원하다는 듯이.
나는 가끔 김수현이 철사 같은 자존심을 지닌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녀 안의 올곧은 자존심이 그렇게 한도 끝도 없는 대사들을 만드는 것이 아닐까 싶은 것이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사는 게 피곤하다.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일에도 그네들은 으르렁 거린다. 마치 무슨 피해 의식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결국엔 화를 내고야마는 게 그네들의 치명적인 삶의 방식이다. 김수현은 수도 없는 자신의 작품들을 통해 거세게 항의한다. 그냥 모른 척 지나쳐도 될 일 같은데 그녀는 늘 손에 갈퀴라도 달린 사람처럼 부딪치고, 싸우고, 상처받고, 상처주기를 서슴지 않는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라면, 두 번 다시는 숨도 쉬지 못하도록 처절하게 짓밟아놓는다. 그래서인지 그녀 드라마의 남성상은 영 꼴이 아니다. 처절하게 부서지고, 추락한다.
이왕 갈 거 끝까지 가기로 결심한 사람처럼, 김수현 드라마 속 남성들은 그런데도 절대로 물러섬이 없다. 반성하지 않는 남자 캐릭터, 제아무리 천사처럼 착한 사람을 만나도 개과천선하지 않는 인물이 그녀 드라마 안의 남성 캐릭터다.
“당신, 부셔버리겠어!”라는 유행어의 주인공인 <청춘의 덫> 이종원, 역시 돈과 명예에 눈이 멀어 비슷한 짓거리를 벌였던 <작별>의 손창민, 마찬가지로 반쪽은 모자랐던 <사랑과 야망>의 조민기, 요즘 최고의 때려죽일 놈인 <내 남자의 여자>의 김상중까지 김수현 드라마 속 남자 캐릭터들은 제각기 스타일은 다르지만 세상 못된 놈인 것만은 확실하다. 대개는 어느 정도 잘못을 저지르다 반성하고, 회개하고, 다시 제 자리로 돌아오는 것이 이 세상의 룰(혹은 드라마의 룰)이건만, 이들에게선 그런 사죄의 기운을 조금도 찾을 수 없다. 이들은 모조리 잘못은 자기가 했으면서 오히려 큰 소리 친다. 김수현은 이러한 적반하장의 인물들, 그러니까 인간 본연의 사악함을 그려내는 데 일가견이 있다. 그러니 그녀 드라마가 선하고, 느낌 좋고, 아름답고, 잔잔하고, 신선할 리 만무하다.
언제나 ‘사람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아름다운가!’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노희경표 드라마와는 달리, 김수현 드라마는 ‘사람처럼 못된 동물도 드물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보고 나면 ‘인생 착하고 성실하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하게 만드는 게 노희경표 드라마라면, 김수현표 드라마는 ‘인생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야겠다’는 일종의 경각심이 들게 한다. 고통 끝에 낙이 오고, 일단 아파야 낫는다고, 삶을 살아가는 데는 김수현표 드라마가 훨씬 큰 도움(?)이 된다. 노희경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삶을 풍부하게, 아름답게, 미소 지으며 살다가는 누군가에게 당장이라도 뒤통수를 맞을 일이다. 반면 김수현 드라마를 보면서 인간의 사악함을 늘 염두에 두며 살다보면, 피곤하긴 하지만 적어도 바보 소리는 안 듣는다. 수없이 많은 인간 군상을 한 번씩 되새김질하면서 살다보면, 어느새 자아는 보다 강한 모습으로 성장하게 되어 있다. 그러니 한겨울의 따뜻한 온수(溫水) 같은 위로를 건네는 건 노희경이지만, 마치 차가운 냉수 같아 정신부터 번쩍 들게 만드는 건 김수현인 셈이다.
파렴치하고 악독한, 그러나 인간 군상과 크게 다르지 않은 캐릭터가 등장하는 드라마는 슬프게도 우리네 현실과 많이 닮아 있다. 대개는 드라마 특유의 판타지(신데렐라 스토리가 여기에 속한다)가 있어 현실보다 아름답게 그려지게 마련인데 김수현표 드라마만은 예외다. 그녀는 더도 덜도 아닌 현실 그 자체를 비춘다. 그녀는 <사랑이 뭐길래> <내사랑 누굴까> <혼수>를 통해 결혼 제도의 모순을 보여줬고, 그나마 한 결혼조차도 결국은 허약한 것이라는 것을 <모래성> <작별> <불꽃> <사랑과 야망>을 통해 얘기했다. 그리고 여기에 한 술 더 떠 ‘이혼’이라는 어찌할 수 없는 선택조차 꽤나 적절한 개념으로 사용한다. <부모님 전상서> <내 사랑 누굴까> <사랑과 야망> <불꽃>에서 비춰졌듯 말이다.
현실을 얘기하는 드라마는 그러나 현실에서는 불가능할지도 모르는 복수를 꿈꾸며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넘나든다. 그녀가 이야기하는 소재가 현실이라면, 그녀가 그리는 복수는 어쩌면 환상이다. <청춘의 덫>의 심은하는 이종원을 반은 죽여놨고, <사랑이 뭐길래>의 하희라 역시 겉으론 순하지만 대발이 최민수를 쥐락펴락했다.
<사랑과 야망>의 한고은은 결국 자신이 무너짐으로써 상대도 함께 죽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줬고, <내 남자의 여자>의 배종옥도 요즘 같아서는 절대 쉽게 물러날 인물로 보이지 않는다. 과연 현실에서 이러한 복수가 가능하기나 한 걸까. 흔히 남자들이 김수현 드라마를 ‘말장난’으로 폄하하는 이유가 아마 여기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자들은 어떠한가. 비록 그것이 말장난일지라도, 그렇게 해주기를 바란다. 왜? 현실에서는 그러한 통쾌한 복수가 불가능할 테니까.
“너는 나를 좋아하게 될거야.”(임채무) “하늘이 무너져도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정애리) “그럼 하늘이 무너질 거야.”(임채무) (<사랑과 진실> 중) 폭풍처럼 몰아치는 대사야말로 김수현 드라마의 백미다. 화장실 갈 틈도 없게 만드는 그녀만의 대사들은 촌철살인 그 자체다. “먼지처럼 사는 거 싫증났소. 누가 날 좀 붙잡아줬으면 좋겠어. 그걸 당신이 해줬으면 한단 말이오. 나한테 맡겨요. 내가 당신 영혼에 입은 상처, 치료사가 한 번 돼보겠소.” (<청춘의 덫> 중), “진심은 통한다고 하더라. 내 진심이 허약한 거니, 당신 가슴이 두꺼운 거니? 그만 좀 해라. 너무 아프다.” (<불꽃> 중) 세상 어떤 남자가 이렇게 말할까. 김수현 드라마엔 극악무도의 남자들이 주를 이루지만, 가끔은 이렇게나 멋진 남자들이 프러포즈를 해댄다. 여자들은 이런 남자들에 한 번 넘어가고 두 번 죽는다.
하지만 이렇게 순발력 있고, 명쾌하고 자세하고 감정적인 대사에도 불구하고 김수현은 국민 작가가 될 수 없다. 친구의 남편을 빼앗아놓고도 뻔뻔스럽게 “ 나 니 남편 사랑해 니 남편은 나 사랑하구 우리 둘 서로 사랑해”(<내 남자의 여자> 중)라고 말하는 캐릭터로는 온 국민의 사랑을 받을 수 없다. 수없이 많은 남자들이 김수현 드라마를 싫어하는 것처럼, 그녀 작품 속 캐릭터는 너무나 세고 강해, 그러면서도 정상적인 구석이 턱없이 부족해서 넓은 층의 지지를 받기 힘들다. 노희경이 현실에서는 절대 없을 따뜻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로 오랜 지지 층을 거느린 것과는 정반대다. 아마도 김수현을 노희경 좋아하듯 온 맘을 다해 지지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반 푼어치밖에 안 되는 비윤리적인 캐릭터로는 온 국민의 사랑을 받기 힘들다. 밝고, 온전하고, 바르고, 정상적인 캐릭터가 사회를 양지로 이끌듯, 비정상적인 캐릭터는 강하고 세게, 그리고 옳지 못한 방식으로 다른 이의 삶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김수현은 본인의 작품인 <내 남자의 여자>의 김희애를 닮았다. 노희경이 배종옥이라면, 김수현은 한껏 머리를 부풀린 김희애다. 사람은 제각각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고, 남들은 전혀 모를 자신만의 상처가 있다지만 그걸 드러내느냐 아니냐에서 사람들의 평가는 달라진다. 어쩌면 배종옥보다, 김희애가 더 힘든 삶을 살고 있는지 모르는 것처럼, 동정을 받지 못하는 자는 스스로 강해지게 되어 있다. 아니 어쩌면 스스로 강하기 때문에, 혹은 올곧은 자존심 때문에 남들에게 위로받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곧 죽어도 할 말은 해야 하는 게 김수현인 이상, 그녀는 앞으로도 수없이 많은 손가락질을 받으며 작가 짓을 계속할 것으로 보인다. 누가 뭐라 하든,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듯이. 내 알 바 아니라는 듯이.
나는 김수현을 무척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가끔은 그녀 안의 독설이 무섭다. 살면서 몰라도 될 것들까지 알아가는 기분이다. 인간의 속물스러움, 그 안에서 피어나는 독 사과의 느낌을 내가 왜 다 알아야 하나 싶다. 하지만 천성이 무른지라 늘 당하고만 사는 나에게 김수현 드라마는 따끔한 회초리다. 나는 김수현 드라마를 볼 때마다 주변의 옳지 못한 머저리들을 박박 긁어놓는다. 평소에는 감춰져 있던 내 안의 본성이, 그녀 드라마를 통해 지지를 얻는 것이다. “내가 혼자 죽을 것 같아?!” 20년 전 <사랑과 야망>의 결말은 지금 떠올려봐도 여전히 충격적이다. 받아들이고 싶지 않지만, 인간의 본성이 거기에 닿아 있다. 김수현은 그때도,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사악하다. 인간 누구나 그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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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 이지영
Illustration 장재훈

2013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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