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지섭은 참 심심한 남자라는 생각을 했다. 여기에서 ‘심심함’이란 지루함과 따분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심심해서 되려 담백하게 느껴지는 맛이라고나 할까? TV 프로그램 <숲속의 작은 집>을 통해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전 세계적인 라이프스타일 트렌드로 스웨덴 등 북유럽에서 생산된 ‘라곰’ ‘휘게’ 등의 용어들이 활개를 칠 때쯤 선보였던 프로그램. 이 속에서 그는 너무 심심해서 오히려 소박한 유머로 풍성해지는 소소한 삶을 펼쳐 보였다. 대단히 도회적 남자라고만 생각했던 소지섭이 산속 오두막에서 선보인 슬로 라이프는 꽤나 인상적이었다. 물론 현존하는 최고의 예능 프로듀서라 해도 과언이 아닐 나영석에게는 너무 앞서나가 본전도 못 건진 프로그램이었지만, 그래도 이 속에는 우리가 발견하게 될 놀라움이 존재했다. 그건 바로 영화, 드라마를 통해 덧입혀진 신비로운 이미지보다는 조용히 읊조리고, 살포시 관찰하는, 대단히 현실적인 진짜 소지섭의 모습이었다.
프랑스 인문학자 장 보드리야르는 실재가 실재 아닌 파생 실재로 전환된 인위적 대체물을 시뮐라크르라고 명명했다. 그러니 재현된 작품 속 소지섭의 이미지는 시뮐라시옹의 작업을 통해 만들어진 대체적 실재였던 셈이다. 하지만 <아레나> 카메라 앞에 등장한 피사체로서의 소지섭은 시뮐라크르가 아닌 현실의 원본이었다. 빽빽한 산림 속 오두막에서 홀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진짜 소지섭 말이다.
혹자는 소지섭이 작품에 출연을 잘 하지 않아 서운하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인식론적 오류다. 그는 매해 줄곧 우리를 찾아왔다. 그것이 영화든, 드라마든, 예능 프로그램이든 간에 그 속에는 소지섭의 파편화된 다양한 이미지가 항상 존재했다. 예를 들어 2015년에는 영화 <사도> 속 짧은 등장과 함께 드라마 <오 마이 비너스>, 2017년에는 영화 <군함도>, 2018년에는 영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와 드라마 <내 뒤에 테리우스>가 있었다. 물론 <숲속의 작은 집>도 있다. 류승완 감독의 <군함도>에서는 그간 접하지 못한 소지섭의 히어로적 이미지를 볼 수 있었고, <지금 만나러 갑니다>에서는 일본 원작과는 또 다른 순애보적 사랑을 만날 수 있었다. 이준익 감독의 <사도>에 특별 출연해 살풀이 춤을 선보였던 정조의 한 서린 이미지는 <내 뒤에 테리우스> 속 엉뚱함으로 또 다른 이미지를 겹겹이 쌓았다. <아레나> 카메라에 포착되기 전의 소지섭은 이 모든 상상의 재현을 확 날려버린 리얼리티 가득한 그였다. 이내 피부에 분장이 더해지고, 준비된 의상이 걸쳐지자 소지섭만이 표출해낼 수 있는 또 다른 이미지가 한 층 만들어졌다. 그는 ‘지금 떠나러 갑니다’라는 표제에 어울릴 만한 도시 여행자의 모습을 완성했다. 캐리어 손잡이를 견고히 움켜쥔 그는 완벽한 비즈니스 트립을 위한 여행자였고, 오른팔에 아로새긴 타투는 백팩의 검은색과 어우러져 또 다른 도시를 묵묵히 걷는 여행자의 신을 완성했다.
이제 2020년의 소지섭은 다시금 자기 길을 떠나려 한다. 우리와 만난 그는 현재 영화 <자백>(가제) 촬영에 여념이 없다. 아니 우리와 만나기 직전부터 이를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춘 상태였다. 해가 바뀌기 직전인 2019년 12월 16일부터 촬영을 시작한 <자백>은 김윤진, 나나 등과 함께 출연하는 스릴러물이다. 이 작품 속에서 소지섭은 촉망받는 IT 기업의 대표이자 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되며 고충을 겪는 유민호로 또 다른 소지섭의 시뮐라크르를 만들어낼 예정이다. 과연 <자백>에서 소지섭은 어떤 이미지를 우리에게 선사할지 벌써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아무튼 그는 이제 극 중 유민호가 되어 지금 떠나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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