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동> 트레일러가 공개됐다. <사바하> <타짜: 원 아이드 잭>과 달리 유쾌한 분위기더라.
<시동>은 원작인 웹툰을 먼저 봤다. 그 후에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만 해도 예고편처럼 유쾌하리란 기대는 없었다. 결핍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준비 단계에서 감독님과 논의할 때는 영화가 무거운 분위기로 진행될 것 같았다. 하지만 영화는 촬영하다 보면 마치 생물처럼 스스로 성장하는 것 같다. 어느 한 곳의 물꼬가 트이면 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현장이 무척 즐거웠다. 그래서 밝은 영화를 만드는 게 낫겠다는 생각들이 모였다.
코미디를 시도하려 한 것은 아닌가?
코미디를 해야겠다는 의도는 없었다. 대본에 웃긴 부분은 있었다. 하지만 원작의 공기가 예고편처럼 활발하고 밝지는 않다.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 사랑하는 이야기다.
2019년 박정민 주연의 영화가 3편 개봉했다. 지금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라는 작품도 촬영 중이라 들었다. 산문집 <쓸 만한 인간> 개정 증보판도 냈고, ‘책과 밤낮’이란 책방도 운영한다. 이 많은 활동을 어떻게 다 할 수 있나?
24시간 일만 하는 건 아니라 많이 힘들지는 않다. 세상에는 매일 출퇴근하며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많다. 다들 그렇게 일하며 산다. 내가 유난히 일을 더 열심히 했다고 하면 부끄럽다. 심지어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건데… 힘들지 않다.
배우는 캐릭터에 몰입했다가 빠져나오는 데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하다. 단기간에 여러 캐릭터를 소화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인가?
배우마다 개인차가 있다. 나는 비교적 캐릭터에서 빠져나오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 캐릭터에 들어가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편이다. 그보다는 캐릭터에서 빠져나오는 게 너무 좋다. 좋아서 빨리빨리 헤쳐 나간다.
글을 쓰고, 책을 읽고, 책방을 운영하며 사람들을 만나는 건 연기에 어떤 도움이 됐나?
책방은 도움이 안 되지만 책은 도움된다. 소설에는 세밀한 행동 묘사와 심리 묘사가 담겨 있다. 공감하거나 연기에 응용할 수 있는 묘사가 많다. 연기할 캐릭터를 구상할 때도 그렇고 확실히 책이 도움이 된다. 또 내가 어느 부분에서 마음이 움직이는지도 파악하기 쉽다.
배우 박정민은 학구파 배우라는 이미지가 있다.
참 부담스럽다. 내가 엄청 노력하는 배우라고 하는데, 다들 그 정도는 한다. 배우는 돈 많이 받고 영화에 출연해 연기하는 직업이다. 그래서 다들 책임감 갖고 노력한다. 단지 그동안 내가 연기한 배역들은 주특기가 명확한 특징이 있었다.
배우는 얼굴은 친숙하지만 거리감이 존재한다. 반면 작가는 얼굴은 낯설지만 어쩐지 친숙한 존재다. 에세이 작가의 경우 더 그렇다. 그래서인지 산문집 <쓸 만한 인간>을 낸 이후 박정민을 친숙하게 느끼는 팬들이 늘어난 것 같다.
내 책을 읽고 나와 친해진 것 같다고 하는 분들이 많다. 가끔 설렌다는 분도 있다. 하하. 자신이 생각한 배우 박정민의 이미지와는 달라서 더 좋아해주시는 것 같다. 책을 출판한 것은 살면서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다시 책을 낼 생각은 없다.
왜 그런가?
<쓸 만한 인간>에 담긴 글은 책을 내기 위해 쓴 게 아니다. 책을 낼 생각이었으면 못 썼을 거다. 인터넷 매체에 한 달에 한 번씩 기고한 우스갯말들을 모아보니 책 한 권 분량이 됐다. 출판사에서 제안해와 책을 만들게 됐다. 그때 책 한 권 만드는 게 굉장히 어려운 일임을 알았다. 신경 쓸 것들이 너무 많고, 힘겨운 작업이었다. 그래서 책 앞 장에 이 세상 모든 작가님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글을 넣었다.
2019년 가장 흥미로운 순간은 언제였나?
지금 촬영 중인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준비 과정이 제일 특별했다. <타짜: 원 아이드 잭> 개봉 이후 정신적으로 지쳤을 때, 다시 새로운 걸 만들어보자는 의지로 시작한 작업이다. 어떤 역할인지 구체적으로 알려드릴 수는 없지만 재미있게 찍고 왔다.
배우들은 개봉 때마다 시험 보는 기분일 것 같다.
그렇다. 개봉일에 잠을 못 잔다. 신경 꺼야지 하면서도 신경 쓰고 있다. 영화는 결과가 숫자로 나온다. 꽤 큰 자본이 투입되는 작업이라 늘 성적표를 받게 된다. 그럴 때마다 정말 힘들다. 이 과정을 10년, 20년 해오면서 굳건히 영화를 만들고 계신 선배님과 감독님들이 너무 존경스럽더라. 사람들이 지켜보고, 입방아에 오르내리는데 어떻게 버텼을까 싶다. 그래서 물어봤다. 안 힘드냐고. 뭐 신경 쓰이기는 하는데 괜찮다고 하시는 걸 보면 역시 대단하다 싶다.
2019년에 한 일 중 새로운 시도라고 한다면 무엇이 있을까.
책방이겠지? 충동적으로 시작했다. 서울에 집이 없어 거처를 하나 구해야 했다. 잠만 잘 거면 다른 용도로도 써보자는 생각에 책방을 얻었다. 손님들이 가고 나면 함께 운영하는 친구와 그곳에서 잤다. 근데 사람들이 너무 많이 오더라. 그래서 책방을 넓은 곳으로 옮겼다. 본래 책과 밤이었는데, 이제는 ‘책과 밤낮’이 됐다. 해보니 힘들더라. 장사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사바하>의 정나한, <타짜: 원 아이드 잭>의 도일출, <시동>의 고택일까지. 세 캐릭터를 연기하며 연기가 버거운 순간이 있었나?
늘 버겁다. 촬영 끝나고 숙소에 가면 고민이 반복된다. 내일은 어떻게 해야 하지? 버겁다고 해서 현장에서 처진 모습을 보일 수 없어 가뿐한 마음으로 촬영장에 가려고 한다. 모든 배우들이 그럴 거다. 내일은 또 어떻게 해야 될까. 대사를 이렇게 하는 게 맞나? 촬영은 한 번뿐이다. 한 번 찍고 오케이 나면 그 장면이 내 인생에 다시는 없다. 그래서 부담된다. 또 열심히 하는 선배님, 제작진들 보면 영화를 허투루 만들 수도 없다.
시간이 흘러 돌아본다면, 배우 인생에서 2019년은 어떤 해로 기억될까?
과도기의 정점일 것 같다. 배우로서 나 자신을 다스리며 갈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또 어떤 선택을 해야 되는가에 대해 많이 느꼈다. 선택의 기준도 정립한 해였다. 작품 선택뿐만 아니라 연기에서도, 현장에서도, 사람 박정민으로서도. 무엇을 취하고 버려야 하는지 예전보다 깊이 생각한 한 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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