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 최지인
최지인은 1990년생이다. 20대를 지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나이다. 20대가 공통으로 안고 있는 ‘준비’에 대해, 더 자세히는 ‘밥벌이’에 대해 고민한다. 고민은 시어로, 문장으로 나뉘고, 더해지기를 반복하며 살아서 꿈틀댄다. 시인은 그렇게 잡히지 않는 고민을 하며 요즘을 산다.
왜 시를 써요?
얼마 전에 같은 질문을 받은 적이 있어요. 생각을 정말 많이 하게 되더라고요. 질문을 받기 전에는 시를 쓰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솔직한 마음을 하나씩 꺼내봤어요. 시를 써서 유명해지고 싶고, 제 작품을 최대한 많은 독자들과 나누고 싶고, 또 명예욕도 있고요. 그런데 그게 시를 쓰는 이유는 아닌 것 같더라고요. 더 솔직히 이야기하면 지금 사회에서 ‘시’라는 장르가 감동을 주는 매체일까 하는 의문도 들었고요. ‘그렇다면 왜 계속 시를 쓰고 있지?’ 이렇게 꼬리잡기하듯이 계속 되물었어요. 지금 내린 결론은 이래요. 시는 내게 ‘숨 쉬는 것과 같으니까’ ‘밥 먹고, 잠자는 것처럼 시를 쓰니까’ ‘삶을 이루는 기본적인 행위니까’ ‘시를 쓰는 건 무척 자연스러운 일이 되어버렸으니까’ 이렇게요. 명쾌하진 않아요. 그런데 요즘 그 자연스러운 게 잘 안 되네요. 그래서 스트레스를 받고요. 하하!
시인이 되기 전에는 어떤 고민을 했어요?
고민은 사실, 시인이 되고 나서부터 했어요. 이전에는 딱히 안 했어요. 고민이 없었죠 뭐. 여느 20대처럼. ‘시인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그리고 시인이 된 이후 가장 고민하는 문제는 ‘밥벌이’에 대한 거였어요.
왜 시인이 되고 나서 ‘밥벌이’가 고민됐을까요?
시인이 되기 전에는 나름 사유가 자유롭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지금 와서 보면 도리어 그렇지 않았던 것 같아요. 예를 들면, 꼭 등단 제도나 정형화된 제도, 어떤 방식에 얽매이지 않고도 독립 출판 같은 창구를 통해 얼마든지 제 시나 글을 나눌 수 있었을 텐데, 막상 자유롭다고 생각했던 저는 그러지 못했거든요. 그랬던 배경에는 주변 환경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실 그런 생각조차 못했던 게 맞아요. 저는 꼭 무슨 ‘자격시험’ 치르듯 시를 써서 ‘통과해야지’라는 생각만 했거든요. ‘왜 통과해야 하는지’ ‘왜 반드시 등단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없었던 거죠. 고민의 폭이 좁았던 것 같아요.
그럼 밥벌이에 대한 고민을 시작한 이후, 최지인의 시는 변했나요?
정말 많이 변했어요. 그런데 그 고민이 아니었어도 아마 제 시는 변했을 거예요. 정말 제 시는 1년, 1년이 다르거든요. 등단하기 전, 그리고 현재 직장 생활을 하기 전에는 보통 삶과 죽음, 생사와 관련한 다소 추상적인 주제에 몰두했어요. ‘죽음’이 뭘까, ‘삶’은 뭘까 같은. 그런데 직장 생활을 해보니까 제가 생각하던 것, 제가 몰두하던 주제보다 힘든 상황을 마주하게 되더라고요. 바로 ‘반복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었어요. 저한테는 정말 힘들었죠. 지금도 역시 힘들고. 그래서 삶에 더 가까운 시를 쓰게 됐어요. 삶 중에서도 ‘일상’에 대해 많이 쓰고요.
그럼 요즘 최지인 시인을 두르고 있는 가장 큰 울타리라면 ‘직장 생활’이겠네요? 그래서 물어보자면, 요즘 직장인들 사이에서는 ‘퇴사’라는 키워드가 유행처럼 둥둥 떠다니고 있어요.
그만큼 시대가 변한 거겠죠. ‘퇴사’라는 개념이 과거에는 ‘뒤처짐’이나 ‘낙오’의 개념으로 인식됐잖아요. ‘용기’ 있는 행동이나 결정이라기보다는 ‘낙오’ 개념으로 받아들였죠. 하지만 지금은 달라요. 결코 흠이 아니죠. 그 흐름의 중심에는 1990년대생이 있어요. 시대의 변화는 곧 가치 변화를 야기했어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게 달라진 거죠. 다른 무엇보다 ‘나’라는 주체가 중요해졌으니까. 저는 옳은 방향이라고 봐요. ‘퇴사’를 고민하면서 진지하게 ‘나’를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서일까요?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서점에는 경쟁하듯이 자기계발서가 쏟아졌어요. 그런데 지금은 그 자리에 공감서나 위로 서적이 가득해요.
‘위로’나 ‘공감’은 어떻게 보면 지친 상대에게 전하는 거잖아요? 그만큼 현재의 2030세대가 지쳐 있고, 아프고, 약해진 게 아닐까요? 그렇다고 해서 저는 지금 세대를 약자로 바라보진 않아요. 오히려 ‘행복’에 가치를 두고 올바르게 접근하는 요즘 세대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어요. 20년 전, 30년 전에도 물론 알 수 있는 사실이었지만, 과거에는 여러 가지 문제들로 ‘알고만’ 있었다면, 현재는 그것을 ‘행동’으로까지 연결하게 된 거죠. ‘행복’을 찾는 이들을 가리켜 몽상가나 이상주의자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지만, 결국 자립적이고 바른 가치관은 그런 과정을 통해서 형성되니까요.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얻는 건 생각보다 정말 많아요.
‘일상’이 시의 주제가 됐다고 했어요. 시어는 어떤 것들일까요?
직장을 다녀서 그런지 시어도 역시 ‘일’이라는 키워드와 많이 연결돼요. ‘노동’ ‘일’ ‘시간’ 같은 것들. 다시 그 안에서 수많은 것들이 파생될 수 있고요. 거기에는 관계도 있을 거고 사랑도 있을 거고…. 계속 넓혀가며 생각하게 돼요. 요즘에는 ‘20대의 일이란 뭘까’ 이런 생각도 하고요. ‘놀고, 먹는 건 언제쯤 권태로워질까’ ‘일을 하고 산다는 건 과연 뭘까’라는 질문을 특히 굉장히 많이 하고 있어요.
그렇게 묻는 과정에서 다시 시로 가져오고 싶은 단어나 문장들이 생겨나겠죠?
맞아요. 요즘에는 사람들에게 호명되지 않는 단어들을 사용하려고 노력해요. 오히려 ‘시적이지 않다’라고 이야기하는 단어나 문장들을 많이 써보려고요.
이를테면 우리가 일상 속에서 쓰는 언어나 단어, 그런 문장들을 채집해서 시를 써보기도 하고요. 관계나 대화 속에서 그냥 흘러갈 수 있는 문장을 잡아서 시로 끌어오는 거죠. 그러니까 ‘이게 시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순간들을 시로 가져와요. 물론 걱정대로 시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그때, 그 당시에 우리가, 또 그들이 나눈 대화나 목소리는 문학 작품이 주는 감동보다 클 수 있으니까요.
그렇게 채집한 문장을 시로 옮겨온 경우가 있다면 이야기해줄 수 있어요?
동인 친구들과 이야기하다가 괜찮은 말이 오가면 ‘이거 내가 써도 되냐’고 물어봐요. 툭 나오는 말들인데 가슴에 와닿는 경우가 있거든요. 최근에는 ‘너무 슬프다’고 메시지를 보냈는데, 최백규 시인이 ‘그럼 안 슬플 때까지 슬프면 된다 ㅋㅋㅋㅋ’라고 답장을 보내왔어요. 친구들끼리 주고받는 농담이나 말장난으로 흘릴 수도 있는데, 저는 순간 그 문장이 인상 깊게 다가오더라고요. 결국 그 메시지를 시 구절로 옮겨왔어요. ‘슬픈 마음이 안 슬픈 마음이 될 때까지’ 이렇게요.
최지인 시인의 20대는 어땠나요?
다사다난했죠. 그래서 시도 많이 변했죠. 꼭 10년이라는 시간을 지나왔는데 아무것도 한 것 없이 여기에 와 있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후회보다는 아쉬움이 커요. ‘지금 아는 걸 그때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요. 이렇게 꼰대가 되는 걸까요?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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