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RIBUTING EDITOR 강예솔
현실 속의 신화 창조
바우하우스 학교가 설립된 해를 외우는 건 의외로 쉬웠다. 대한민국이 일제에 항거한 3.1운동이 일어난 해와 같은 1919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1백 주년이 되는 3.1운동을 기념하며 우리나라가 역사와 정체성을 다시금 정립하는 것처럼, 세계 예술과 디자인계는 지난 한 세기를 지배했던 바우하우스와 모더니즘의 사조를 다시금 꺼내어 들여다보고 있다. 그렇다고 1백 년 전에 생겨난 바우하우스를 골동품 취급하지 않는다. 비록 14년이라는 짧은 교육 기간이었다 하더라도 이들이 잘 짜놓은 커리큘럼과 소신은 몇 세대를 거치고, 수천 킬로미터의 국경을 넘어서까지 여전히 세상 속 모더니즘의 대명사로 불리고 있기 때문이다.
바우하우스는 먼지가 앉을 새도 없이 건축가, 화가, 장인, 수공예가뿐만 아니라 음악, 연극, 요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 창조적 영감을 주는 계몽으로 발전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쌓이고 탄생한 유산은 거의 묵시록에 가까웠다. 우리는 오늘도 이들이 구축한 도시 환경 시스템에 속해 그들이 추구한 양식의 건물에서 생활하고, 기능주의적 주방에서 요리를 하고, 기계 생산된 의자에 앉아 일한다. 이케아, 레고, 무지와 같은 브랜드는 바우하우스에서 추구한 디자인의 목적을 신뢰하며 발전했다. 구글은 바우하우스의 폰트 타입을 사용하고, 애플 제품들은 이들의 조형 철학 안에서 정제되며, 실리콘밸리 IT업계의 UI에는 칸딘스키의 흔적들이 담겨 있다. 또한 일부 명상가들은 칸딘스키가 1926년 집필한 《Point and Line to Plane》를 비롯한 바우하우스 무브먼트 조형에 따라 요가와 명상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이만큼 먼지 쌓일 일 없이 지속된 바우하우스는 더욱 더 유명해졌고 신화화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아직도 건축과 사물에 대한 이들의 조형 철학과 형태미의 ‘순수성’에 국한되어 바라보는 관점에서 탈피할 필요가 있다. 신화가 아닌 현실에서 바우하우스는 생존과 사회 결핍에 대한 시대정신을 위한 투쟁에 가까웠다. 선생과 학생은 궁핍했고, 심지어 다양한 나치 선전 미술을 발표하며 나치 문화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 기여한 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우하우스는 기술적 가능성의 대대적인 변화에 대응해 예술적 감수성, 교육 및 사회적 이념의 놀라운 합성물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21세기의 합성물은 어떨까? ’생산’에서 ‘소비’에 대한 과제에서 현재는 어떤 주제로 넘어갔을까. 인간과 환경 사이에서. 기술과 인공지능 사이에서. 과학과 문명 사이에서. 우리가 묻고, 그 의미를 읽어내는 수준에서. 3.1운동과 바우하우스와 같은 혁신과 계몽의 공동체적 운동이 다시금 발현된다면 우리의 신세계가 펼쳐질 것이다. “유토피아 만세!”
WORDS 김한규(르시뜨피존 대표)
역사상 가장 섹시했던 디자인 학교
가장 ‘잘나갈 때’ 모습만 보여주고 기억하고 싶은 것. 인간의 보편적 감성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지우고 싶은 흑역사’라는 표현이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닌 듯싶다. 올해 탄생 1백 주년을 맞이한 바우하우스를 보면 말이다. 20세기 디자인의 대명사로 불리는 이 디자인 학교는 예술과 기술을 통합한 기능주의 양식으로 한 세기 이상 명성을 떨쳤다. 그런데 사실 대중의 인식 속에 각인된 바우하우스의 모습은 가장 찬란했던 데사우 시절에 국한된 것이다. 반면 학교가 시작된 바이마르 시절은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 시기 바우하우스는 현실과 이상 간 괴리 때문에 갈팡질팡하는 청춘과 닮았다.
바우하우스가 태어난 1919년은 불안과 기대, 좌절과 변화에 대한 갈망이 교차하던 시기였다. 러시아 10월 혁명으로 유럽 전역이 요동쳤고 제1차 세계대전은 씻기 힘든 상흔을 남겼는데 특히 패전국 독일은 그 정도가 심했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난관 극복을 위해 고심해야 했고 바우하우스가 그 해법이었다. 이들은 전쟁배상금 탕감과 대국굴기를 위해 해외 무역이 필수라 생각했고 제품 경쟁력을 높이는 디자인 능력의 제고가 그 열쇠라고 생각했다. 30대의 젊은 교장 발터 그로피우스는 야심만만했다. 새 시대에 걸맞은 창의적 팔방미인을 길러내는 곳. 바우하우스가 표방하는 바였고 그 이상에 공감한 학생, 공예가, 예술가들이 몰려들었다. 분석과 종합을 목표로 이뤄진 기초조형 수업은 가히 혁신적. 체육, 음악 수업을 포함한 커리큘럼은 이들이 바라는 전인적 인재상을 방증했다.
그러나 바우하우스의 그림자는 빛보다 짙었다. 시의 예산 지원은 턱없이 부족했고 이를 충당하기 위해 학생들은 산학 활동은 물론 육체노동에도 가담해야 했다. 기초조형 수업을 전담한 요하네스 이텐은 신지학에 심취해 신비주의적인 체험을 강조했는데 이를 따르는 추종자가 상당수 생겨 학교의 골칫거리가 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23년 연 첫 전시가 저조한 성적을 내자 바우하우스의 입지는 크게 흔들렸다. 위기에 몰린 바우하우스에 손을 내민 것은 데사우시였다. 소재를 옮긴 바우하우스는 성장하는 공업 도시의 계획에 맞춰 커리큘럼을 재편했고 이후 폐교 전까지, 아니 폐교 후에도 탄탄대로를 걸었다.
이들이 이룩한 기술과 예술의 통합은 미국으로 건너가 모던 디자인의 모태가 됐고 라슬로 모호이너지가 정비한 기초조형 수업은 오늘까지도 디자인 대학의 필수 코스로 쓰인다. 이렇게 보면 바이마르 시절의 바우하우스는 본편을 위한 프롤로그에 불과하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그 설익은 순간들 없이 과연 지금의 바우하우스가 존재할 수 있었을까? 흔히 바우하우스가 오늘날 미친 가장 큰 영향력은 디터 람스, 애플로 이어지는 미니멀리즘 디자인이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사실 바우하우스의 진가는 수많은 미술 대학의 교본이 된 거침없는 실험 정신에 있는 것 아닐까? 급진적이고 무모했던 청춘의 학교. 1백 년이 흐른 바우하우스를 여전히 ‘섹시하게’ 느껴지게 만드는 요인이다.
WORDS 최명환(월간 <디자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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