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15년 차다. 어려 보이는 외모에 가려 사람들이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에 배우 정유미의 시간은 켜켜이 쌓여왔다. 드라마 <천일의 약속>에서 바보 같을 정도로 착한 향기부터 <옥탑방 왕세자>의 표독스러운 악역 홍세나, <육룡이 나르샤>의 처연한 연희, <검법남녀>의 열정적인 은솔을 지나 그녀는 드디어 <프리스트>에서 자신과 닮은 함은호를 만났다. 매번 새로운 도전을 하면서 쉬지 않고 달려온 그녀에게 잠깐 휴식이 주어졌다. 지금 그녀는 자신의 삶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드라마 <브라보 마이 라이프> <검법남녀>, 그리고 얼마 전 종영한 <프리스트>까지 한동안 쉬지 않고 달려왔다. 그 어느 때보다 휴식이 간절했을 것 같다.
지금은 휴식이 1순위다. 원래 작품이 끝나면 바로 운동을 시작으로 하루를 굉장히 빡빡하게 움직이는 편이다. 워낙 서핑이나 자전거 등 야외 활동을 좋아해서 그런 것들로 시간을 보내다 보면 오히려 체력적으로 도움이 됐다. 집에 있으면 기력이 더 떨어지고 반대로 사람들 만나고, 바깥 공기 쐬고, 땀을 흘려야 회복되는 스타일이었다. 그런데 체력이 완전히 바닥나니까 나가고 싶어도 안 되더라. 이번에는 다 놓을 정도로 완벽하게 휴식을 취하고 있다.
아무래도 드라마 <프리스트>의 영향이 컸을 것 같다. 엑소시즘을 소재로 한 데다 등장인물 중 유일하게 구마 의식을 두 번이나 치러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소진될 수밖에 없는 작품이었다.
맞다. 진짜 힘들었다. 촬영 중반부터였나? 잠을 자도 뭔가 개운하지 않고 힘들더라. 폐공장이나 폐성당 같은 음침한 공간에서 매일 촬영하다 보니 정신적으로 많이 소진되는 느낌이 들었다. 특히 폐성당은 다른 나라에서 호러물이나 좀비물을 찍으러 왔다고 할 정도로 정말 무서운 공간이었다.
어떤 이유로든 쉽지 않은 도전이라 여겨지는 작품인데, 어떤 매력에 끌린 건가?
내가 다시 한번 부마가 되는데, 과거에 연인이었던 사제(연우진 분)가 지난 감정과 충돌을 겪다 결국 구마 의식을 치러준다는 결말이 처음부터 정해진 작품이었다. 그 결말에 갑자기 도전 의식이 생겼다. 실제로 접하기 힘든 소재이기도 하고, 연기할 기회가 거의 없는 캐릭터라는 이유도 있고. 한번 체험해보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극중 함은호라는 캐릭터는 한마디로 책임감으로 무장한 인물이다. 끝까지 자신의 삶과 사랑하는 연인과 환자들을 지키려는 모습이 꽤 인상적이었다.
처음에는 우직한 소 같다고 느꼈다. 쉽게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고 일관되게 밀고 가는 성격이 소나 경기에 몰두하는 운동선수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은호에게는 사람 살리는 일이 삶의 중심이었다. 엑소시즘도 처음에는 믿지 않았지만 결국 사람 구하는 일이라는 것에 동의하고 묵묵히 함께 걸어가는 은호의 모습이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었다. 그런 은호의 가치관이 나랑 꽤 닮아서인 것 같다. 나도 쉽게 얻는 것은 쉽게 잃는다고 생각한다. 너무 욕심 부리지 않고 정도를 지키면서 내가 할 수 있는 걸 꾸준히 하다 보면 언젠가 인정받을 거고, 그렇게 걸어 나가겠다는 마음으로 일을 하고 싶었다. 그런데 은호가 환자를 대할 때 그런 태도를 보이더라.
은호처럼 내가 알던 굳건한 세계를 깨고 다른 세계를 경험한 적이 있나?
하나 있다. 사실 얼마 전까지 인터넷 뱅킹을 안 했었다. OTP 카드도 없었고, 은행 앱도 스마트폰에 깔지 않았다. 무조건 은행에 가는 편이었다. 스마트폰으로 은행 업무를 보면 왠지 내 정보가 새나갈 것 같고, 갑자기 통장의 돈들이 빠져나갈 것 같아 불안했다. 내가 이런 답답한 면이 있다.(웃음) 그런데 해보니까 너무 편하더라. 지난주 배달 앱을 처음 깔았는데, 신기하더라. 드디어 디지털 세계에 진입했다.
인터뷰하기 전에 필모그래피를 다시 한번 살펴봤는데, 재미있는 흐름이 감지되더라. 유복한 집안에서 사랑을 독차지하면서 자란 캐릭터에서 사극으로, 그리고 최근에는 검사나 의사 같은 전문직 역할을 도맡고 있다. 의도적인 변화일까?
지금 얘기해서 알았다. 다만 예전부터 내가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연기를 해보고 싶었다. 의도된 변화라고 하면 착하고 지고지순한 역할을 맡았던 드라마 <천일의 약속>이 끝나고 바로 다음 작품에서 악역으로 분한 것이다. 주변 사람들은 말렸었다. 좋은 이미지를 좀 더 끌고 가지, 왜 굳이 모험을 하냐는 얘기였다. 그런데 난 그게 재미가 없고 전혀 다른 걸 하고 싶더라. 언제나 다른 직업, 다른 캐릭터, 다른 상황을 연기해보고 싶다.
빨리 질리는 스타일이라고 봐도 될까?
해보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그렇다. 진짜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너무 많다. 취미 생활도 처음에 스쿠버다이빙을 하러 갔는데, 옆에서 서핑을 하길래 너무 재미있을 것 같아서 배우고, 또 다른 운동이 눈에 띄면 배우는 식이다. 나이 들어서 몸이 노쇠해지기 전에 더 많은 걸 경험해보고 싶은 마음이다.
배우로서 가지는 호기심의 영역은 어떠한가?
지극히 평범한 연기. 근래에 선이 굵은 작품을 하다 보니 평온하고 평범한 연기가 하고 싶더라.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를 정말 좋아한다. 그의 영화처럼 평범한 일상 속에 내가 들어가 연기를 한 작품이 완성되면 어떤 느낌일까 궁금하다.
의외다. 반대로 극단적인 연기를 원할 것 같았다.
물론 그런 것도 해보고 싶다. 그런데 연기의 종착은 일상을 담는 것 같다. 여러 가지 사건이 벌어지는 것 말고 평범한 상황에 평범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데, 그 속에 평범한 내가 있는 듯한 느낌.
그게 왜 연기의 종착일까?
글쎄… 내가 그런 걸 꿈꾸는 것 같다. 갈수록 진짜 나로 살아간다는 게 어떤 것인지 생각이 깊어진다. 그동안은 꼭 뭔가를 해야만 살아 있음을 느끼고 그 안에서 에너지를 받아야만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요즘 가만히 지내다 보니까 그런 생각도 들더라. 연기자로서 어떻게 오고 어떻게 가고 싶은지, 또 연기자가 아닐 때 나는 뭘 원하는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해서 고민한다.
연기자로서의 고민과 삶의 고민이 비슷한 것 같다.
그렇다. 예전부터 수많은 오디션을 거쳐온 편이라 그런지 일을 하지 않을 때도 언제든 오디션을 볼 수 있는 상황을 염두에 둬야 했다. 연락이 두절되거나 갑자기 멀리 여행을 떠나는 건 상상해본 적도 없다. 예전에 딱 한 번 <동이>라는 작품을 마치고 큰 맘 먹고 호주 여행을 떠났는데, 며칠 지나 미팅이 잡혔다고 전화 오더라. 그때부터 마음이 요동을 쳐서 급히 귀국해 오디션을 봤는데 잘 풀리지 않았다. 그렇게 내 삶은 항상 일과 닿아 있었다. 그런데 점점 쫓기듯 살아가는 게 힘들었다. 편하게 살고 싶다는 욕심도 생기고. 당연한 건데 여태까지는 얽매여 살아왔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내가 원해서 말이다. 그래서 나를 놓아주고 싶어서 도장 깨기를 하듯 운동도 하고, 사람도 만나고, 다른 일도 했는데 최근에는 그 방식을 바꿀 생각을 하고 있다. 편안하게 쉬면서 편해지는 방식을 시도해보는 중이다.
일종의 내공을 쌓는 과정일까?
그런 것 같다. 작은 것에 흔들리지 않으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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