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 이경진
인터랙티브 필름을 ‘제작한’ 넷플릭스만큼은 혁명이다
‘게임 엔딩은 그의 선택에 달려 있다’고? 에라 이 도둑놈들아! <밴더스내치>를 경험하고 받은 첫인상이다. 이 문장에서 ‘그’는 극 중 게임 프로그래머 스테판 버틀러이면서 그를 대신해 두 개의 보기 중에 하나를 선택, 이야기를 끌고 가는 나, 즉 시청자다. ‘어떤 시리얼을 고를지에 관한 일상의 사소한 선택부터 고층 아파트 테라스에서 누가 뛰어내릴 것인가 생사를 가늠하는 문제까지, 어떤 보기를 클릭하느냐에 따라 이야기 ‘과정’이 달라진다.
<밴더스내치>는 시청자가 적극적으로 선택해야 이야기가 전개되는 까닭에 ‘자유 의지’를 전제하는 듯하다. 그런데 이 자유 의지는 제한적이다. <밴더스내치>가 제공하는 보기 중에 하나를 선택해도 정해진 각본 내에서 ‘조금 다른’ 길을 갈 뿐이지 결론은 결국, 하나다. 게임 밴더스내치 데모 작업을 향한 터커 소프트사의 파격적인 제안을 스테판이 수락하든 거절하든, 게임 개발에 몰두한 스테판의 예민한 감정을 찔러대는 아버지를 죽이든, 살리든 간에 비극적인 형태로 마무리된다. 그래서 나는 <밴더스내치>의 쌍방향 형식에 반대하는 건가? 아니다, 그 반대다. 아무리 나의 자유 의지를 앞세운다고 해도 결과는 ‘폭망’이다. 그게 지금 이 세계가 지배 계급이 망을 쳐놓은 시스템을 자율 형태로 둘러대고 게임처럼 인간을 가지고 노는 형태다. <밴더스내치>는 바로 그 시스템을 극 중 형식으로 삼아 허울(?)뿐인 자유 의지의 반영 격인 보기 두 개 중 하나의 선택을 통해 이야기를 끌고 간다. 사실 내가 볼 때, 두 개의 보기는 함정이다. 하나가 더 있다. 어디에? <밴더스내치>는 선택한 보기로 이야기를 끝맺으면 하나의 보기를 더 제공한다. ‘되돌아가기’ 게임은 유저가 목숨을 잃더라도 자유 의지를 보이면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한다. 같은 원리다. 이전 단계로 돌아간 나는 다른 보기를 골라 다른 결말을 꿈꾼다. 그렇더라도 결말은 하나다. 결과적으로 비극이다.
천재적인 게임 개발자 콜린 리트먼은 게임이 풀리지 않아 고민하는 스테판에게 <팩맨>을 예로 들어 이런 얘기를 한다. “<팩맨>이 즐거운 게임 같지? 지긋지긋한 악몽의 세계야. 더 끔찍한 건 우리도 그 안에 산다는 거지.” 그러면서 덧붙이길, “다만, 거울을 통해 시간을 옮겨 다닐 수 있어.” <밴더스내치>는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를 비춘 ‘거울’이다. 가상에서 재생되는 이 작품에서 얻은 교훈을 현실로 옮겨 차원을 ‘확장’한다면 <팩맨>의 미로처럼 시스템을 두른 이 현실을 바꿀 수 있지 않을까. 스테판의 책상에는 <문을 보고 열쇠를 구하라>라는 책이 놓여 있다. 꼭 열쇠가 있어야 문을 열 수 있나? 그 문을 아예 부숴버리는 것도 가능한 보기 중 하나다. 문을 뚫고 나아가라. 내가 <밴더스내치>에서 깨달은 바다. 이제 나의 첫인상을 바꾸고 싶다. 맞다, 나의 선택에 따라 게임 엔딩은 바뀐다. 보기 외의 보기를 선택하는 것. 꼬리 칸에서 머리 칸으로 이동하는 대신 옆 벽면을 뚫고 나오면 기차 내부와는 다른 새로운 세계를 경험할 수 있지 않을까. 내게는 <밴더스내치>의 쌍방향 방식이 혁신적인 게 아니라 이런 작품을 제작한 넷플릭스가 혁명이다.
WORDS 허남웅(칼럼니스트)
굳이 인터랙티브 필름을 봐야 할까?
<밴더스내치>의 줄거리를 요약하는 것은 간단하고 다른 한편으로 까다롭다. 게임을 개발 중인 한 청년이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조종당하는 기분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 주요 줄거리인데, 이렇게 정리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이용자의 선택에 따라 결말에 도달하는 과정이 달라지는 인터랙티브 필름이기 때문이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 들을 음악은? 주인공을 성가시게 하는 아버지를 어떤 방식으로 살해할까? 몇 초 안에 두 가지 선택지 중 하나를 터치하면 그에 따라 서사가 전개되지만, 당연히 이 역시 제작진이 미리 만들어놓은 장면들로 흘러간다.
콘텐츠 플랫폼과 채널이 다양해지면서 시청자 주권, 혹은 프로슈머(프로듀서+컨슈머)라는 개념이 떠오른 지는 꽤 오래다. 이용자를 콘텐츠의 일부분으로 끌어들이고자 하는 시도는 다양한 방식으로 계속되고 있으며, 이용자들 역시 투명 인간 취급당하는 단순한 ‘시청자’로만 머물기를 원하지 않는다. 추리물이나 ‘국민 프로듀서’를 호명하는 시청자 투표 오디션 프로그램 등이 왜 유난히 인기를 끄는지 생각해보라. 지금 사람들은 콘텐츠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면서 SNS 같은 창구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적극적으로 개진하고, 이는 콘텐츠의 성패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 <밴더스내치>는 이런 메커니즘을 영리하게 이용한다. 사람들이 작품을 직접 플레이하고 어떤 결말이 있는지, 러닝타임은 얼마나 되는지, 작품에 대한 자신의 의견은 어떤지 온라인상에서 떠드는 동안 입소문은 자연스럽게 난다. 더 많은 이용자가 작품을 볼수록 넷플릭스는 더 방대하고 더 촘촘한 데이터마저 손에 넣게 된다. 아마도 넷플릭스는 이 데이터를 기반으로 더 효과적인 수익 모델을 구축할 수 있을 것이다.
<밴더스내치>의 메시지를 굳이 추측하자면 시청자 주권이나 프로슈머라는 용어는 허상에 가깝다는 것일 텐데, 그럼에도 인터랙티브 필름 형식에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는 건 우리가 피실험자 혹은 데이터로서의 존재로 취급된다는 찜찜함 때문만은 아니다. 콘텐츠 장르 간의 경계가 흐려지는 시대라고 해도, 이 기술이 포함된 작품은 하나의 이야기로 완전한가? <밴더스내치>에서 인터랙티브 기술을 빼면 무엇이 남을까? 사람들을 몰입시키는 건 결국 창작자의 세계관을 반영해 제대로 직조한 이야기의 힘이 아닐까? <밴더스내치> 이후의 인터랙티브 필름들은 과연 이만큼 화제를 모을 수 있을까? 사실 우리는 모두 낚인 것일지도 모른다. 애초에 넷플릭스는 그렇게 대단한 메시지를 의도하지 않았을 수도 있으며, 진지한 분석이나 담론은 <밴더스내치>에 적합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요컨대 단순한 이벤트를 혁신으로 포장하면 모두 거기에 대해 말하고 저절로 의미를 부여해주는 시대라는 사실이야말로 이 소동의 교훈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밴더스내치>에 대해 떠드는 일도 멈춰야겠지만, 딱 한마디만 더 보태고 싶다. 넷플릭스를 보며 뭔가를 먹던 손으로 스마트폰이나 패드의 액정을 터치하면서, 다시 말해 스크린을 더럽혀가면서까지 굳이 인터랙티브 필름을 봐야 할까? 나는 여전히 부정적이다.
WORDS 황효진(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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