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종빈을 처음 만난 게 언제였더라? 지금으로부터 12년 전인 2006년 칸국제영화제였다. 제작비 약 2천만원짜리 대학 졸업 영화였던, 하지만 개봉 후 굉장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용서받지 못한 자>로 그를 만났었다. 당시 그는 알려진 바 없는 신인 감독이었고, 영화에 출연한 하정우, 서장원이라는 배우 역시 풋내기였다. 그해의 칸 해변 한편에 차린 한국영화진흥위원회 부스에 들르면 감독을 포함한 그들이 항상 있었다. 당시 영화 전문지 기자였던 나 역시 그곳을 베이스캠프처럼 드나들었고, 그들과 함께 당시 핫 아이템이었던 네스프레소 캡슐 커피를 종종 내려 마셨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에디터는 직종은 달라졌지만 여전히 매거진을 만들고, 윤종빈은 대한민국 스타 감독이 되었고, 하정우는 한국 영화를 대표하는 배우가 됐다.
그리고 2018년 윤종빈은 <공작>이라는 영화로 다시 한번 빛을 발했다. 황정민, 이성민, 조진웅, 주지훈 등 쟁쟁한 배우들이 출연하는데, 그들의 개성 넘치는 연기 톤을 감독의 담대한 디렉팅으로 영화 속에 완벽하게 녹여냈다. 2018 에이어워즈 인텔리전스 부문 수상자로 윤종빈을 선정한 후 오랜만에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에선 에디터의 인상착의가 긴가민가한 듯했지만 “얼굴 보면 바로 알 수 있을 듯해요”라며 반가움이 묻어났다. 그는 최근까지 굉장히 바쁘다고 말했다. <용서받지 못한 자> 스태프였던 김광빈 감독의 데뷔작 <클로젯> 촬영 현장에 제작자로서 출근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에게 짬을 내어 <아레나>를 위한 촬영을 부탁했고, 마침내 윤종빈을 서울 삼성동의 한 호텔 로비에서 조우했다. 얼굴을 마주하자 대뜸 웃었다. 내가 누군지 정확하게 기억이 난 듯했다. 오래전 프랑스 칸 해변에서 우리는 캡슐 머신이 내리는 에스프레소를 마셨더랬다. 이제 호텔 라운지에서 그는 케냐 원두로 내린 드립 커피를, 나는 플랫 화이트 한 잔을 주문하며 바로 지금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장 궁금한 건 약 5백만 명 정도의 관객 수치로 막을 내린 <공작>의 흥행 결과였다. “<범죄와의 전쟁> <군도: 민란의 시대> 등 모든 영화들이 내가 기대한 결과와 괴리가 있었어요. 그런데 함께 고생한 구성원들이 자부심을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뿐이라고. 그럼에도 “솔직히 생각보다는 흥행 성적이 조금 부진했어요. 내가 생각한 지점에는 조금 못 미친 거죠”라며 상업 영화 감독으로서 한숨을 토했다. <공작>을 극장에서 마주하며 딱 떠오른 건 토머스 알프레드슨 감독의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였다. 냉전 시대 첩보원들의 활약상을 냉정하고 차가운 서정성으로 풀어낸 그 영화 말이다. 행여 이에 영감을 받았는지 궁금했다. “그 작품에서 영감을 받았다기보다는 원작자인 존 러카레이 식의 첩보물을 만들고 싶었어요. 그런데 해외에서 제작한 존 러카레이 소설의 영화들은 대부분 아트하우스 필름들이 많아요. 저는 그의 톤을 유지하면서 어떻게 하면 일반 관객도 쉽게 볼 수 있는 첩보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어요.” 이 고민 때문일진 몰라도 <공작>은 한국적 지역화가 명확하며, 존 러카레이 식의 서스펜스를 유지한 상업 영화로 탄생했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한국 영화에서 만나기 힘든 첩보물이었다는 것에 긍정의 고개를 끄덕일 게 분명하다. 주문한 커피가 테이블 위에 놓였다.
인터뷰 막간에 지금 아이는 몇 살이나 되었는지 물었다. 초등학생이랬다. 아빠가 바빠 놀아주지 못한 탓에 올 연말에 파리로 가족 여행을 2주간 갈 예정이란다. 즐겁게 놀다 오라고 했다. <공작>에 출연한 배우들, 특히 이성민과 주지훈에 대해 물어보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이성민이야말로 이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를 기용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했다. “하나는 리명운이라는 인물이 등장할 때 어떤 배우가 아닌 그냥 그 사람처럼 느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라며 이어 “두 번째는 흑금성(황정민)이 리명운을 만나 긴장감이 오래도록 유지되어야 했어요. 시나리오에는 그들의 우정이 특별히 느껴지는 챕터가 전혀 없거든요. 그래서 리명운에게서는 인간적 따스함이 느껴지길 바랐어요. 이성민이란 배우가 딱이었죠”라고 말했다. 이성민이라는 걸출한 배우 이야기에 이어 나는 곧장 주지훈이라는 이름을 꺼냈다. <신과함께> 연작에서 괜찮았고, <공작>에서 완전히 숙성되고, <암수살인>에서 알에서 깨어난 듯 신들린 듯한 연기를 보여준, 굉장히 강렬했던 배우 말이다. “사실 이전까지 지훈이의 연기를 본 적이 없어요. 처음 그의 연기를 확인한 게 <아수라> 개봉 전 편집본에서였죠. 너무 잘하더군요. 그는 굉장히 감각이 좋은 배우예요. 동년배 배우들이 멋을 연기하는 데 비해 지훈이는 다양한 레이어를 가지고 섬세한 감정을 잘 묘사해요. 그래서 지훈과는 다음 작품에서도 같이하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주지훈이 또 그와 함께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그에게 묻고 싶은 마지막 질문은 ‘왜 계속 누아르풍의 남자 중심 영화만 만드느냐?”는 것이었다.
“사실 의도한 건 아니에요. 저는 영화도 굉장히 다양하게 보거든요. 하하. 이건 시장 상황과 직결된 문제인 듯해요. 인간이 좋아하는 성향이 있어요. 하나가 싸움 구경. 그게 액션 장르가 되는 거죠. 두 번째는 불구경. 이건 블록버스터겠네요. 다음은 사랑 또는 남녀상열지사. 또 웃긴 것들. 아무튼 좀 단순한 챕터로 구성되어 있어요. 이렇다 보니 내 영화들이 비슷한 맥락에서 만들어지는 것 같아요. 그 뻔한 틀 속에서 변주하고, 다른 지점을 찾아내는 게 상업 영화 감독이 해야 하는 숙제이기도 하고요.” 이 몇 문장으로 모든 게 해결된 듯 보였다. 재차 다른 질문을 꺼낼 필요 없이 말이다. 어느새 우리 두 사람의 커피잔 바닥에는 메말라버린 커피 자국만 남아 있었다. 잠시 스쳐가듯 인사를 나누고 헤어진 만남을 제외하면 결국 12년 만에 함께한 자리였기에 영화 이야기를 떠나 이런저런 살아가는 이야기도 나눴다. “바쁘지 않으면 온갖 잡생각으로 더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요. 그래서 연출도 하고, 제작도 하며 진짜 바쁘게 보내요”라는 그의 말이 언뜻 이해되기도 했다. 오롯이 집중할 일이 있을 때, 그래서 더욱 자신의 재능을 빛나게 할 때 마음이 편해지는 남자. 그가 바로 윤종빈이었기 때문이다. <아레나>와의 촬영은 본래 그의 성향처럼 조용하고 차분하게 마무리되었다. 이번 수상 상품으로 주어지는 조르지오 아르마니 수트를 잘 맞췄냐는 말로 그와의 인사를 대신했다. “굉장히 좋던데요? 덕분에 앞으로 중요한 자리에 구색 맞출 좋은 양복이 생겼어요. 고마워요.” 그렇게 우리는 헤어짐의 인사를 나눴다.
<아레나옴므플러스>의 모든 기사의 사진과 텍스트는 상업적인 용도로 일부 혹은 전체를 무단 전재할 수 없습니다. 링크를 걸거나 SNS 퍼가기 버튼으로 공유해주세요.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