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는 박지성의 시대였다. UEFA 챔피언스리그, 프리미어리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이하 ‘맨유’)처럼 우리가 범접할 수 없다고 여겼던 존재들이 갑자기 ‘우리의 것’이 되었다. 축구의 원래 용도인 성취감 위에 민족 자긍심을 들이켰다. 박지성이 국민 영웅이 될 수밖에 없었다. 지금 그런 존재가 있다. 손흥민이다. ‘빛흥민’ ‘월클’ ‘손스타’ 등 별명부터 빛이 난다. 프리미어리그에서 골을 펑펑 터트리는 공격수, 1천억원을 호가하는 몸값, 세계적 명성, 그리고 2018 러시아 월드컵 독일전 승리와 아시안게임 금메달까지 더해졌다. 지금 한국 축구 시장은 거의 손흥민 독점 상태다.
박지성을 실시간으로 즐긴 적이 없는 어린 팬들 사이에서는 손흥민의 인기가 압도적이다. 하지만 손흥민의 축구 이력서는 여전히 박지성 앞에서 고개를 숙인다. 손흥민이 ‘제2의 박지성’이 되려면 아직 갈 길이 멀다. 챔피언이 되어야 한다. 박지성과 손흥민의 가장 큰 차이는 포지션이다. 박지성은 중간에서 잇는 역할을 하지만, 손흥민은 공격을 마무리한다. 야구는 투수, 축구는 스트라이커 놀음이라고 하는 것처럼 축구의 꽃은 골을 많이 넣는 선수다. 이적 시장에서도 득점력을 갖춘 선수의 몸값이 가장 비싸게 형성된다.
루카 모드리치, 폴 포그바처럼 특급 미드필더 중에도 득점력이 뛰어난 선수가 더 나은 대접을 받는다. 저득점 종목인 축구에서는 골을 넣는 선수가 주연이다. 손흥민은 골잡이다. 2010년부터 지금까지 손흥민은 유럽 톱 리그 3개 클럽에서 96골을 기록 중이다. 박지성의 유럽 12시즌 통산 득점(46골)의 두 배가 넘는다. 2016-17 시즌에는 20골을 넘겨 정상급 공격수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축구는 팀 종목이다. 소속팀의 우승 여부가 절대 평가 기준이다. 여기서 박지성 쪽이 압도적이다. 유럽 1부 리그 우승 횟수만 6회에 달한다. 최고 인기 리그와 클럽에서 따낸 우승 메달만 4개다. 클럽 축구계 최고 영광인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 경력(2007-08 시즌)까지 있다.
당시 결승전 18인 출전 명단에서 제외되는 아픔이 있었지만, 해당 시즌 박지성은 소금 같은 역할로 공헌했다. 잉글랜드 리그컵 우승 3회, FIFA 클럽월드컵 우승 1회 등 메이저 트로피가 17개나 된다. 세계적으로도 이 정도 우승 경력자는 흔하지 않다. 손흥민의 트로피 장식장은 허전하다. 유럽 클럽 무대에서 우승 경력이 없다. 성인 무대의 유일한 우승 경력이 이번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이다. 박지성이 받아보지 못한 프리미어리그 ‘이달의 선수’ 2회가 뿌듯하지만, 팀 스포츠에서 우승하지 못하는 선수의 경력은 큰 평가를 받지 못한다.
빅 클럽에서 뛰어야 한다. 박지성이 손흥민에 앞서는 두 번째 요소는 ‘팀 이름값’이다. 2005년부터 7년 동안 박지성은 전 세계 최다 팬을 보유한 맨유에서 뛰었다. 지금도 브랜드 파워에서 맨유는 레알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바이에른 뮌헨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박지성이 있을 때, 맨유는 창단 이래 최대 전성기를 구가했다.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만 세 번 진출했다. 동료의 면면도 화려했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웨인 루니, 라이언 긱스, 카를로스 테베스, 리오 퍼디낸드, 네마냐 비디치 등 모두 월드 클래스다. 지금 프리미어리그에서 따지면 맨체스터 시티(이하 ‘맨시티’)에서 뛰었던 셈이다.
그에 비해 손흥민의 명함은 섹시하지 않다. 토트넘은 인지도와 존재감, 인기 면에서 빅 클럽 소리를 듣기 힘들다. 런던 인기 팀이긴 해도 우승 경력이 초라하다. 가장 최근 리그 우승이 1960-61 시즌이었다. 21세기 들어 우승은 리그컵 1회(2007-08)뿐이다. 손흥민이 축구선수로서 더 큰 영광을 추구하려면 우승 가능성이 높은 빅 클럽으로 이적하는 편이 현실적이다. 예를 들어, 프리미어리그 우승권이라고 할 수 있는 맨시티, 첼시, 리버풀, 맨유 같은 곳이다. 손흥민과 빅 클럽이 결합하면, 선수의 상품 가치는 대폭발하게 된다.
물론 이적은 마음대로 제어할 수 없는 영역이다. 빅 클럽 이적은 더 어렵다. 감독 성향, 스쿼드 상황, 주전 경쟁 등이 복잡하게 얽힌다. 더 현실적으로 분석하자면, 그런 빅 클럽의 윙어 포지션에 자리가 나야 한다. 빅 클럽의 수요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병역 해결 효과가 손흥민 본인에게 유리하게 작용하기를 바라야 한다. 국가대표팀에서 실적을 남겨야 한다. 국내 팬들에게는 태극 마크를 달고 얼마나 잘했는지도 중요한 평가 기준이다. 박지성은 이 부문에서도 압도적이다. 2002 월드컵 4강 신화의 멤버다. 월드컵 3개 대회에서 연속해서 골을 넣었고, 최초의 원정 월드컵 16강 역사도 썼다.
무엇보다 박지성은 국가대표팀에서 절대적 존재였다. A매치 100경기에서 박지성은 항상 최고의 경기력을 선보였다. 볼을 빼앗아야 할 때 몸을 던졌고, 골이 필요할 때 직접 해결했다. 국가대표팀 역대 공헌도에서 박지성은 자타 공인 최고였다. 손흥민도 국가대표팀에서 잘해내고 있다. 앞선 설명처럼 26세 나이에 A매치 출전 횟수가 71경기(23골)에 달한다. 2022 카타르 월드컵 즈음에서 박지성의 출전 기록을 넘어설 가능성이 크다. 월드컵 4강이란 금자탑은 불가능에 가깝지만, 조별 리그만 통과해도 대단한 업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파울루 벤투 감독은 자신의 한국 감독 데뷔전에서 손흥민에게 주장 완장을 채웠다. 기성용이 한 발짝 뒤로 물러선 이상, 향후 4~5년 정도는 손흥민이 대한민국의 얼굴이다.
포르투갈 대표팀에서 벤투 감독이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에게 맡겼던 역할을 한국에서는 손흥민이 해야 한다.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서 손흥민은 주장으로서 팀을 금메달로 이끌었다. 손흥민 본인도 “아시안게임을 통해서 ‘내가 주장 역할도 잘해낼 수 있구나’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라고 자평했다. 박지성은 대표팀과 국민에게 승리를 안겼다. 어려울 때도 ‘하드캐리’를 멈추지 않았다. 정확히 아시안게임에서 보였던 그 모습이다. 앞으로 그런 모습과 결과를 유지할 수 있다면 손흥민도 ‘제2의 박지성’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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