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배를 엮다(舟を編む, The Great Passage)>는 책을 만드는 편집자들의 이야기다. 좀 더 정확하게는 사전을 만드는 고집스러운 사람들의 이야기랄까. 모든 것이 디지털로 변화하고 있는 세상에서 아날로그를 고집하는 사람들이 주인공인 이야기. 소설을 영화화한 <행복한 사전(The Great Passage)>의 주인공 마지메는 ‘오른쪽’이라는 단어를 이렇게 설명한다.
오른쪽 :
1. 서쪽을 바라보고 섰을 때 북쪽에 해당하는 쪽.
2. 숫자 10을 적고 0에 해당되는 쪽.
다소 엉뚱하기는 하나 틀린 설명도 아닌 데다 제법 재치 있는 대답이라고 생각했다. 판화가이자 아내인 최경주와 함께 만든 책 <아일랜드(Island)>에 대한 설명을 할 때마다 주인공 마지메가 대신 나타나 설명을 해준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한다. 마지메라면 과연 어떻게 설명했을까?
아일랜드(Island) :
1. 판화가 최경주와 트럼펫 연주자 이동열의 연주를 담은 책.
2. 하나의 섬에서 시작해 세 곳의 도시를 거쳐 완성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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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미야코지마에서의 기록 : 멜로디
오키나와 본섬에서 40분 정도 비행기를 타고 이동해 도착한 섬 미야코지마. 미야코 블루라고 불릴 정도로 바다 빛깔이 아름다운 섬이다. 어느 해 여름, 최경주와 함께 이 섬을 여행했다. 하늘, 바다, 식물 모든 색이 눈부신 이 섬에서 애플리케이션 ‘개러지밴드(Garageband)’로 멜로디 몇 개를 기록해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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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도시, 서울에서의 기록 : 연주와 레코딩
서울로 돌아와 기타 연주자 김기은과 함께 화성을 정리하고 편곡을 했다. 그리고는 AP 숍과 영화감독 김종관의 서촌 작업실, 디자이너 이혜원의 아라비 스튜디오에서 녹음을 진행했다. 층고가 높은 건물의 울림과 인왕산에 머무는 새들의 지저귐 그리고 따뜻한 봄날 연희동 연주에 참석한 사람들의 웃음과 박수 소리 등 이 모든 것을 기록했다.
두 번째 도시, 헬싱키에서의 기록 : 판화와 디자인
연주에서 영감을 얻은 최경주는 총 27점의 판화 작품을 새롭게 완성했다. 이것을 디지털로 변환해 헬싱키에 머물고 있는 디자이너 강주성에게 전달했고 본격적으로 책을 디자인하기 시작했다. 인쇄를 위한 종이 한 장을 선택하기 위해 헬싱키에서 서울로 보낸 우편물을 일주일 이상 기다려야 했고, 표지 컬러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페이스타임을 통해 미팅을 나눠야 했다. 물리적 거리에 따른 비효율에도 모든 일들은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됐다.
세 번째 도시, 탈린에서의 기록: 인쇄
책을 인쇄하기 전, 감리를 위해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에 위치한 인쇄소로 직접 찾아갔다. 그곳에서 인쇄한 이유는 비교적 저렴한 물가와 섬세한 인쇄 기술 때문이었다. 유럽의 예술, 디자인 관련 서적에서 종종 발견한 ‘Printed in Tallinn’ 때문이기도 했는데 극동 아시아에서 온 한국인 세 명이 감리 보러 인쇄소를 방문한 건 처음이란다. 감리를 마친 그날 저녁 탈린에서 맥주를 마시며 이런 생각을 했다. ‘어쩌다 우리가 이곳까지 오게 된 거지?’
시간과 공간의 경계가 사라진 어떤 섬
책을 인쇄하는 동안 서촌에 위치한 갤러리 팩토리2(factory483.org)에서는 전시 <아일랜드(Island)>가 열리고 있었다. 책에 수록된 연주 음원과 판화 작업을 한 달 동안 전시했고, 두 차례 연주도 했다. 그리고 전시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드디어 탈린에서 책이 도착했다. 최경주의 판화와 이동열, 김기은의 연주 그리고 강주성의 그래픽, 이차령의 사진까지 모든 작업이 온전히 기록되었고, 우리에게 다시 돌아왔다. 책의 서문을 쓴 홍보라는 이렇게 기록했다. ‘1과 1이 만나 다른 1을 만들었다. 혹은 하나의 섬이 하나의 섬을 만나 또 다른 하나의 섬을 만들었다. 모든 사람은 섬이다. 우리는 각자 섬이지만, 우리가 만나 함께 만들어내는 하나의 섬 역시 또 다른 하나의 온전한 세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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