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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일은 하얗다

그에게 흰옷을 입혔다. 신작 <극락도 살인사건>에서 의사 가운을 입고 등장한다고 해서 잡은 콘셉트는 아니다. 그저 그에겐 늘 여백과 쉼표가 많은 흰색이 어울린다는 생각을 해왔던 터다. 흰옷으로 포장된 그에게 검은색 방점을 찍듯 툭툭 말을 건넸다.<br><Br>[2007년 4월호]

UpdatedOn March 21, 2007

Photography 이준영(COMA) Guest Editor 김태경 Hair 정준(라뷰티코아) Make-up 정지원(라뷰티코아) Stylist 정주연, 김민지(D12) AssiStant 신경미

영화지 이외에는 인터뷰 안 하기로 유명하다.
영화 이외에는 할 얘기가 없기 때문이니 오해하지 말아달라. 그래도 이번 영화는 홍보 활동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다른 때보다 꽤 인터뷰를 하고 있고. 참, 늦었지만 창간 1주년을 축하한다.

고맙다. 일단, 영화 얘기부터 해보자. <극락도 살인사건>에 어떻게 참여하게 됐는지 궁금하다.
시나리오를 받아보자마자 재밌겠다고 생각했다. 감독님과 몇 차례 만남 끝에 출연을 결심했고. 나는 다른 배우들처럼 영화 선택이 복잡하지 않다. 시나리오를 받고 읽은 뒤 ‘어 재밌겠는데’라고 생각하면 바로 결정하는 편이다. 연기 일생을 길게 내다본다면 작품성이나 캐릭터 설정이 연기를 한다는 것 자체보다 의미가 있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길게 보는 거다.

김한민 감독의 데뷔작이라고 하던데 부담이 되진 않았나? 임순례 감독, 봉준호 감독 같은 톱 감독들과 주로 작업해오지 않았나?
<연애의 목적>의 한재림 감독도 데뷔작이었고, <질투는 나의 힘>의 박찬옥 감독도 거의 그렇다. 오히려 감독들의 첫 데뷔작에 참여한 적이 더 많은 것 같다. 데뷔작에 참여했으니 더 의미 있다, 없다가 아니라 내 기준에선 그들의 시나리오가 마음에 들었다. 이번 영화 <극락도 살인사건>의 김 감독은 단편영화로 이미 영화 바닥에선 알려진 분이다. <갈치괴담>이라는 영화를 보고 독특하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시나리오에 대한 감이 남다르더라.

그렇다면, <갈치괴담>에 갈치도 나오나?
나온다. 기회 되면 꼭 한 번 봐라. 굉장히 신선하고 독특해서 인상적인 영화다.

<살인의 추억>에 이어 미해결 사건을 다룬 두 번째 영화다. 실화에 대한 매력 때문인가? 아니면 다른 이유라도 있나?
하다 보니 그렇게 됐다. 작품을 하나 끝나고 다음 작품엔 이런 식으로 해볼까, 이런 캐릭터로 해야지 라는 계산을 하는 편이 아니다. 평생 연기를 할 텐데 하나하나 따지다 보면 남아 있는 역할이 없지 않겠나? 

출연을 결정한 후 치밀하게 계산하는 편인가, 본능에 충실한 편인가? 이번 영화에서 보건소 소장이란 캐릭터는 어떻게 잡았는지 궁금하다.
두 개 다다. 본능적으로 연기에 몰입되어 오버를 하면 감독이 자제시키니까.(웃음) 내가 생각하는 부분과 연출자의 의도가 적절히 배합될 때 좋은 연기가 나온다는 걸 이제는 알 것 같다. 아무리 내가 연기 잘한다고 혼자 신들린 듯 해봤자 연출자의 의도가 아니면 그건 실패다. 이번엔 제대로 깨져야지 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망가질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판단은 관객의 몫이지만.

4개월 넘게 섬 생활을 했다고 들었다. 힘들었겠다.
개인적으론 신혼생활을 반납해야 했다. 날씨를 예상할 수 없어 영화 찍는 내내 거의 섬에서 지내야 했다. 족구하고 야구하고 술 마시면서. 피부가 너무 새까맣게 타서 사람들이 못 알아볼 정도였다. 우리가 머물던 섬에 시신 한 구가 떠내려오는 사건도 있었다. 나는 직접 못 봤는데 성지루 선배는 봤다더라. 위령제도 올렸다. 어릴 때 서울이긴 했지만 소와 닭 키우는 동네에서 자라서인지 이질감은 없었다. 오히려 편했다.

요즘 의사가 작품 속 직업 1순위인가 보다. 당신도 의사로 나오는 거 보면.
드라마도 그렇고, 영화 쪽에서도 의사 역할이 유독 많다고 들었다. 하지만 이 영화엔 수술이나 집도 장면은 애시당초 나오지도 않는다. 멋지거나 똑똑한 캐릭터가 아니라 완전히 돌팔이에 가까울 정도니까. 왕진가방 안에 잡동사니를 넣어 다니면서 섬마을 주민들을 돌보는 어리숙한 의사 역이다.

배우들은 캐릭터 구축을 위한 나름대로의 방식이 있는 것 같다. 한 인터뷰에서 당신은 그 인물을 머리에 담은 채로 일상생활을 한다고 했었다.
배우라는 직업의 매력이자 딜레마가 바로 그것이다. 실제처럼 연기하는 것, 연기처럼 보이지 않게 하는 것. 찍고 있는 작품이 있으면 한동안 그 인물처럼 살게 되고 행동하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면 행동도 당연히 그렇게 되는 것 같고. 처음에는 정체성의 혼란도 오고 나는 누굴까 라는 고민 같은 걸 안 한 건 아니지만 이제 나에겐 그런 혼란이 ‘업’이자 ‘일상’이다. 다음 작품을 위해서도 좋은 것 같지 않아 작품이 끝나면 훌훌 털어내는 편이다.

캐릭터가 실제 배우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순간 두려울 것 같은데.
글쎄, 두렵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오히려 그 맛에 연기를 한다. 그게 참, 매번 오는 게 아니라서. 영화 한 편 찍으면 한 두어 번 오려나. 짜릿하고 상쾌한 기분, 이건 도저히 말로 표현 못한다. 느껴본 사람만이 안다.

혹시 유체이탈 같은 경험인가? 명배우들이 그와 비슷한 경험에 대해 얘기하는 걸 몇 차례 들은 적이 있다.
나 같은 경우는 생리현상에 가까운 것 같다. 오랫동안 변비여서 볼일을 못 봤다고 치자. 혹시나 해서 변기에 앉아 있다가 어느 순간 쑥 하고 나오는 기분과 비슷하다고 하면 이해가 되려나. 시원하고 통쾌하고 가벼워지는 기분, 이 맛에 연기를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 어떤 것도 이렇게 분명하게 ‘좋다’라는 기분을 주는 건 없으니까.

시나리오, 감독, 캐릭터 중에서 무엇이 작품을 결정하게 만드는가?
캐릭터가 나와 닮아 있으면 떨쳐내기가 힘들고, 시나리오가 좋으면 밤새워 읽어 버리고, 친한 감독님이 부탁하면 거절 못하고. 영화가 밥줄이고 취미니까 까다롭게 고르거나 흥행에 연연하지 않는 편이다. 사실 출연작 중 흥행이 안 된 영화가 더 많으니까. 개인적으로 논픽션이나 붕 떠 있는 듯한 현실감 없는 스토리는 별로다. <와이키키 브라더스>, <연애의 목적>이나 <질투는 나의 힘> 같은 디테일이 생생한 스토리가 더 정이 간다. 그래도 굳이 고르자면 시나리오에 의존하는 편이다. 후회한 적은 없었다. 다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었으니까. 영화가 흥행에 실패해도 나에겐 사람이 남고 영화가 남는다. 그걸로 된 거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은 없다고들 하지만 그동안의 필모그래피 중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은 무엇인가? 솔직하게.
나 역시 첫 영화가 가장 큰 의미를 갖는다. 식상하다고? 사실인데 뭘. 지금 생각하면 무모해서 민망할 정도였다. 아무것도 모르고 촬영장에 가서 두어 신 찍고 금세 돌아왔으니까. 멋 모르고 한 거다. 본능에 충실하게. 지금보다 쉽고 편하게 했던 것 같다. 사심 없이.

나는 당신을 탐색하기 위해 근 2년간 나온 당신의 인터뷰와 기사들을 몽땅 스크랩해 읽었다. 한결같이 당신은 섬세하지만 털털하며 성격마저 좋은, 천상 배우라는 칭찬 일색이었다.
그런가? 다들 좋게 써주셨나 보다. 영화 이야기 이외에는 사실 할 얘기가 없는 사람이다.

너무 모범 답안이다. 솔직히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
양면성이 배우에게만 국한된 게 아니지 않나? 여기 모인 사람들만 해도 그렇고. 나 역시 섬세함과 털털함, 예민함을 동시에 지닌 사람일 뿐이다. 단지 직업이 ‘배우’라 다양한 삶을 연기할 수 있다는 것 외에는 크게 차이가 없다. 나 역시 보통 사람들이 회사에 가고 상사에게 꾸지람을 듣고 보너스를 받는 것처럼, 영화를 찍으러 가서 감독한테 혼나기도 하고 흥행이 잘되면 이래저래 좋은 거고. 패턴은 똑같다.

당신이 대학 제적 후 힘든 아르바이트를 하며 극단 생활을 했던 건 연기자 사이에서 두고두고 회자되는 이야기다. 하지만 나로서는 돈을 벌려고 연극 생활을 시작했다는 게 현실성 있게 다가오지 않는다.
그러게. 대학 등록금이 없어 제적을 당한 후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비디오가게 점원, 공사장 인부, 피라미드 판매원, 방송사 보조…. 그중에서도 꽤 오랫동안 한 건 용산전자상가의 식당에서 배달 일이다. 밤낮없이 돈을 벌려고 뛰어다녔지만 낮에는 재즈 아카데미에 다니면서 춤을 배웠다. 특별히 어릴 때부터 연기를 하고 싶다거나 연기자가 되어야지 하는 원대한 꿈이 있던 건 아니었는데, 그냥 배웠다. 왠지 써먹을 데가 있을 것 같았다. 그게 딱 연기는 아니었다. 뭔가에 홀린 것도 아니고 어쩌다 보니 연극을 하고 있었다. 정말 돈을 벌기 위해서. 하다 보니 4년이란 시간이 훌쩍 지나더라.

학창 시절 밴드를 결성하고 수능시험 전날 오토바이를 타다 인대를 다쳤다고 들었다. 전형적인 문제아의 행보다.
말이 밴드였지, 친구 몇몇과 놀기 위해서였다. 음악을 해야지 하는 거창한 목표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친구 집에 컴퓨터가 있었는데 음악 관련 프로그램이 있었다. 기타를 가지고 ‘띵가띵가’ 하는 수준이었다. 심지어 드라마 <질투> 주제곡을 카피할 정도였으니, 개념 없이 한 거지. 그럴싸하게 내세울 게 없는 학생이었다.

그렇다면 오토바이는?
집과 학교가 꽤 멀었다. 숨막히는 버스나 지하철 대신 대중교통 수단으로 이용했을 뿐 날라리나 문제아는 아니었다.
오토바이로 등하교하는 게 평범한 건 아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학교에 오토바이를 타고 가는 학생을 보면 문제아라고 생각할 것 같긴 하다. 그래도 사고로 엉덩이뼈와 허벅지뼈가 박살이 난 후로는 자제했다.

취미가 고전무용이라고 하던데, 정말인가? 박해일과 고전무용이라.
그게 아직 인터넷에 남아 있나? 삭제가 안 됐나 보다. 회사에 어서 지우라고 말해야겠다. 처음 프로필을 작성할 때 취미란에 적을 게 없어서 아동극단 할 때 배운 걸 쓴 거다. 고전무용이 어때서? 취미라고 할 만한 정도의 실력이 아니라서 그렇지, 상당히 매력적이다.

연기할 때 말고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나?
연기 말고는 취미라고 할 게 없다. 정말 일상생활 외에는 연기를 한다. 일 없으면 지인들과 술 마시고 이야기하고. 그게 전부다. 그래서 쉼 없이 영화를 찍는지도 모르겠다. 연기 아니면 딱히 할 게 없으니까. 영화도 안 보는 편이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이나 YTN뉴스를 즐겨 본다. 인터넷 뉴스도 즐겨 보고. 사실적인 것에 흥미가 있다. 너무 과장되거나 꾸며진 모습은 부담스럽다. 내 것이 아닌 것 같고.

대학로에서 5년 정도 혼자 살았다고 들었다.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당신의 모습이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 종종 등장했는데.
그때가 그립다. 결혼한 후 분당에 사는데 이사갈까 심각하게 생각 중이다.

나도 분당에 사는데, 조용해서 좋지 않나?
너무 반듯하고 깨끗해서 통 정이 안 가던데.

여자들은 깨끗해서 좋아한다.
그런가? 아내와 진지하게 상의해봐야겠다.

5년을 연애했고, 결혼 2년차다. 별명이 ‘박서방’이고, 애처가라는데?
봉준호 감독이 결혼을 앞두고 있을 시점에 부른 게 알려진 것 같다. 지금은 박서방 대신 ‘자네’라고 불리지만. 결혼 전에 술을 자제했더니 놀리듯 애처가란 말들을 간혹 했다.

그래, 결혼하니까 좋은가?
연애만 5년 하고 결혼한 지 1년 됐다. 꼭 결혼을 하라고 말하는 편은 아니고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잘했다고 생각한다. 일이 없을 땐 아내와 자주 노는 편이다.

왜 기자들은 이런 건 안 물어보지 하는 건 없나? 아니면 가장 기억에 남은 질문은?
“왜 이렇게 연기를 못하죠?”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굉장히 막막했다. 표정을 보아하니 농담은 아닌 것 같고. 순간 정적에 휩싸였다. 그냥 “앞으로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했다. 너무 당황스러웠다.

직격탄이다. 나도 누군가에게 그렇게 말하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설마 나는 아니겠지?

아니다. 여자 배우다.
처음부터 완벽한 사람은 없다. 오랫동안 지켜봐달라. 다 때가 있는 것 같다. 한순간에 연기를 잘한다는 건 불가능하고, 설사 처음부터 잘하더라도 깊이가 없지 않겠는가.

술을 좋아한다고 들었다. 술 얘기 좀 해보자.
주종은 안 가리지만 이제 예전처럼은 못 마시겠다. 자주는 마시는데 양은 줄었고. 동서양을 막론한 주종을 즐긴다. 소주, 양주, 막걸리, 맥주…. 다 마신다. 그런데 요즘은 술을 마시고 나서 필름이 끊겨 고민이다.

그건 나이가 들어서 그런 거다.
그렇지 않아도 그런 생각이 들긴 하더라. 운동해야지.

그렇다면 콜라 대신 오렌지 주스를 마셔야지(우리는 인터뷰 도중 샌드위치를 먹었는데, 그는 콜라를 마셨다).
콜라가 더 맛있는데?

자신이 한 인터뷰는 꼼꼼히 챙겨 본다고 들었다. 그래서 다들 좋게 쓰는 건 아닐까? 나 역시 막판에 ‘그는 털털하고 선량한 타고난 배우’라고 마무리할지도 모르고. 설령 당신이 나에게 그렇게 비쳐지지 않았더라도 말이다.
솔직히 써달라. 지금 나에 대해 느끼는 그대로(다시는 당신을 못 보게 되는 거 아닌가?). 하하. 내가 그렇게 별로인가?(그냥 물어본 거다) 워낙 인터뷰를 잘 안 한다. 그래서 꼼꼼하게 챙겨 보는 편이긴 하다. 부담되는가?

물론, 부담이 안 된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나도 당신에게 사인을 받고 싶다. 덩달아 인터넷 검색 1위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 말이다(포털 사이트에서 박해일 사인이라고 치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어디다 사인하면 되나?

초등학생같이 또박또박 사인을 끝낸 박해일은 인터뷰가 끝나자 악수를 청해왔다. 남자와 소년 사이에서 부유하는, 쉽게 정의되지 않는 질긴 매력의 미소와 함께. 태생적 진지함을 지닌 배우의 모습을 하고 있는 박해일은 드라마나 쇼 프로그램으로 소모되지도, CF에서 제조된 인공된 이미지도 아닌, 날 것 그대로의 느낌을 가졌다. 이것만으로도 박해일이라는 배우는 희귀하다. 그리고 당신이 모르는 한 가지 사실을 밝히겠다. 그는 강동원, 조인성 못지않은 멋진 몸매와 옷발을 지녔다는 걸 말이다. 누구나 그의 실물을 보면 이렇게 읊조린다. 저렇게 얼굴이 작고 키가 훤칠하고 잘난 인물이었단 말이야? 배우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박해일은 실물이 더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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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INFO

Photography 이준영
Guest Editor 김태경
Make-up 정지원
Hair 정준
Stylist 정주연,김민지
AssiStant 신경미

2013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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