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graphy 조남룡 Editor 이지영 cooperation 햄튼 Hair&Make-up 원조연 Stylist 권자원 Assistant 이지인
인터뷰를 마치며 그가 말했다. “왜 나를 어려워하는지 모르겠단 말이요. 사실 알고 보면 내가 굉장히 편한 사람인데…. 안 그렇소, 기자 양반?” 100번째 영화를 만들어낸 ‘거장’ 감독은, 그러나 유난히 편안했다. 권위라는 것은 저절로 세워지는 것이지, 스스로 연출해내는 것이 아님을 그를 통해 알 수 있었다. 따뜻한 봄날의 길목에서 만난 임권택은 ‘대한민국 영화계의 거목’이라는 어마어마한 수식어보다 훨씬 낮게 웃었으며, 그만큼이나 친절했다. “나는요, 늘 우리 집사람이 사다주는 옷만 입는단 말이요. 그러니 나에게 어떤 옷이 어울리는지도 몰라요. 그냥 입혀주는 대로 입는 것이지.” 촬영을 위해 착용한 수트가 마음에 들었는지, 그는 연신 옷매무새를 어루만졌다. “그래요. 당신 멋져요. 50대처럼 보인다니까요!” 곁에 서있던 부인이 이렇게 한마디 거들자 그는 또다시 이렇게 되받았다. “아니, 실제 내 나이를 밝히면 어떡해. 내가 50대라니까. 안 그려요?” 임권택에게 돌덩이처럼 무거워 보이는 거드름이란 없었다. 그에게선 ‘그저 늘 턱걸이하는 기분으로 영화를 만들고 있다’는, 지극히 평범한 감독으로서의 고뇌만이 느껴졌다. “젊어 보이게 나오고 있는 거 맞소? 내가 카메라 앞에만 서면 웃음이 안 나와가지고 말이오.” 결국 임권택은 웃어 보이지 못했지만, 스튜디오 안은 그 어느 때보다 화기애애했다. 아마 100번쯤의 웃음과 농담이 오갔던 터다.
드디어 100번째 영화를 찍었다. 소회가 어떠한가. 언젠가 한 인터뷰에서 “100번째 영화라는 거, 그게 사람 죽이는 거요”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 100번째라는 게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닐 텐데, 사람들은 100번째라는 것에 관심이 너무나 많다. 그러다 보니 나도 100번째 영화에 대해 중압감 같은 것이 느껴지고, 100편이나 찍은 감독으로서 그만한 기량이 보이는 영화여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자주 했다. 매번 영화를 만들면서 한 번도 소홀한 적이 없었는데, 이번엔 유난히 그 부담이 엄청나더라.
<천년학>은 <서편제>와 마냥 같을 수도, 다를 수도 없는 운명을 지닌 영화다.
<천년학>은 <서편제>의 후속편일 수밖에 없는 영화다. 원작이 <서편제>, <소리의 빛>, <선학동 나그네> 이렇게 세 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서편제> 때 이 세 편을 다 포함한 영화를 만들려다 <선학동 나그네>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 뺐다. 당시만 해도 CG 기술이 요즘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CG가 엄청나게 발전했고, 그래서 <선학동 나그네>를 하게 됐는데, 또 다른 어려움이 있더라. 이 영화가 <서편제>의 아류에 그친다면 그건 또 내가 망하는 길 아니겠느냔 말이다.
<서편제>가 소리에 관한 이야기라면, <천년학>은 사랑에 관한 이야기라고 들었다.
<서편제>는 소리라는 것을 관객에게 어떻게 하면 빠르고 친숙하게 전달할 것인가에 주력한 영화였다. 반면 <천년학>은 두 소리꾼 오누이의 사랑 얘기를 해보자는 거였다. 판소리야 전편도 그렇고 이번에도 역시 사용되고 있지만 영화 자체가 주는 느낌은 굉장히 다를 것이다. <서편제>의 아류가 되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생각으로 만들었다.
<서편제>와 여주인공이 같기 때문에 더 그런 오해를 살 수 있는 것 같다. 이번에도 역시 오정해를 캐스팅한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
‘소리’를 감당해낼 수 있는 여배우가 오정해밖에 없었다. <서편제> 때 오정해는 너무나 신인이었는데 그때 무엇으로 버텼느냐 하면, 그게 판소리였다. 어차피 판소리라는 게 삶의 희로애락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에 그녀가 연기하는 데 큰 문제는 없었던 거다. 그런데 이번에는 연기력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걱정과는 달리 그동안 그녀가 나이를 먹고 하면서 20대부터 40대까지 모조리 소화해낼 수 있는 기량이 생겼더라. 세월이 익어 있는 소리를 냈다고 할까. 본인 스스로도 어찌나 험한 노력을 했던지, 그만 병원에 입원하는 일까지 있었다,
현장에서의 당신이 궁금하다. 아직도 현장에 나갈 때 긴장이 되나. 아마, 그렇진 않을 것 같긴 한데 말이다.
긴장 같은 거야 없지만 매번 영화를 할 때마다 턱걸이를 하고 있는 기분이다. 늘 어려운 과제와 만나고 있고, 그걸 넘어서려고 하는데 엄청난 결단을 필요로 한다. 기왕의 영화로부터 거듭나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늘 턱걸이하고 사는 거다. 긴장이야 없지만 힘들기야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매번 힘들다.
연기자들이 기대에 못 미칠 때 크게 꾸짖기도 하나. 언뜻 당신은 호랑이 감독의 인상이 드는데 말이다.
나는 엄하고 말고가 없는 사람인데 다들 엄하다고 생각을 하는 모양이다.(웃음) 혼내고 싶을 때가 없는 것은 아닌데 혼내는 일이 그리 많지는 않다. 혼낼 때는 계획적으로 혼을 내야 한다. 해도 해도 안 될 때는 공갈을 쳐보기도 한다. 그럴 때 더러 먹히더라.(웃음) 현장에서 나는, 내가 엄하면 현장 자체가 긴장되고 경직되기 때문에 웬만하면 즐거운 마음으로 몰두할 수 있도록 하려고 한다. 영화라는 게 많은 사람들이 일체가 되어야 하는 작업이므로, 그래야 창의적인 무엇이 나올 수 있는 것이므로 나 혼자 화내서는 안 된다. 내 딴에는 편안한 현장을 만들고자 안으로 노력하고 있는데, 내 인상이 그래서 그런가.(웃음) 하여튼 엄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건 사실인 것 같다. 특히 연기자들이 그러면 안 되는데….
현장에서의 당신을 몇 차례 본 적이 있다. 그럴 때마다 느끼는 것이 당신은 엄청나게 꼼꼼한 사람인 것 같다는 점이었다. 현장에 있던 그 누구도 발견하지 못하는 아주 사소한 것까지 알아차리고는 ‘컷!’을 외치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감독하는 사람들이 다 그런 거 보는 게 아니겠나.(웃음) 나는 내가 덜렁대는 성격이라고 생각하는데 남들은 그런 날더러 꼼꼼하다고 하더라.
이번 영화를 찍으면서 무엇이 가장 힘들었나.
다 힘들었다.(웃음) 우선 내가 100번째 영화를 찍어낸 감독 아니겠나. 그러다 보니 영화를 찍어야 할 배경을 찾아내는 게 힘들었다. 전에 찍었던 데서 또 찍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또 내가 <서편제> 때에 비하면 소리를 듣는 귀가 열리긴 했다. 하지만 그래서 되는 게 아니더라. 내가 <서편제>를 찍어놓고 무슨 얘기를 했느냐 하면, 내가 아마추어였기 때문에 이런 필름을 찍을 수 있었다는 거였다. 아마 내가 소리에 대해 조금 더 깊이 들어가 있었더라면 절대 <서편제> 같은 필름이 나올 수 없었을 거다. 초심자적인 입장에서 찍었기 때문에 소리를 모르는 사람들도 따라오기 쉬운 영화가 되었던 것 같다. 그런데 지금은 소리의 세계가 가면 갈수록 어렵다는 것을 알아버려서 그런 어려움을 가지고 찍어야 했기 때문에 힘들었다. 그래도 재수가 좋으려고 그랬는지 몇 안 되는 연기자들이 적재적소에 들어와 주어서 정말 훌륭히 영화를 마칠 수 있었다. 내가 운이 좋은 감독인 것 같다.(웃음)
1993년에 <서편제>를 완성하고 꽤 오랜 시간 <선학동 나그네>를 마음에서 지우지 못했다. 무엇이 그토록 당신을 잡아당겼나.
분위기다. 몽환적인 것 같기도 하고, 얘기 속에 자꾸 무언가를 유추해가면서 보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얘깃거리가 자꾸만 눈에 어른거렸다. 그런 분위기라는 게 사실 어려운 거다. 그 분위기를 어느 정도 풀어내서 관객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해내고, 그런 몽환적인 분위기는 영상으로 풀어야 하는데 이런 부분들을 한번 내가 해보고 싶었다. 다행인 것은, 꽤 오랜 시간 내 안에서 자꾸 익어가는 게 있었던 것 같다. 하고는 싶었으나 포기했었던 이야기들을 꼭 해야지 하는 생각으로 바뀌었던 거다.
<천년학>도 마찬가지로 완성되기 이전부터 칸에서 콜을 받았다고 들었다. ‘영화제 출품 감독’이라는 수식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영화제에 나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늘 가지고 있다. 유럽이나 서양 쪽에서는 아직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모르는 부분이 많은데 내가 영화를 통해 그 생경함을 벗겨주고 싶다. 우리 이야기가 세계 속에서도 보편성을 얻어내는, 그런 일을 하고 싶다는 거다. 아마 그러느라 긴 세월 애썼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영화제라는 게 내가 내보내고 싶어서 내지는 건 아닌 거다. 어느 정도 그쪽에서 볼만하니까 오라고 했을 때 되는 거란 말이다. 아무래도 내 영화의 경우는 그간 영화제에서 어느 정도의 수준을 내고 있었기 때문에 관심을 받게 되는 것 같다.
대중성과 작품성 사이에서의 고민은 없나. 보통의 관객들은 영화제 출품용 영화와 상업 영화를 따로 두고 생각하는 경향이 짙다.
그러니까 나는 좀 가당치 않은 바람을 가지고 영화를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을 한다. 나는 작품성도 있고 대중에게도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는 그런 영화를 만들고 싶다. 늘 그게 소망이었고, 꽤나 애를 써왔다. 성과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원하는 바는 그렇다.
자, 이제 개인적으로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자. 네이버에 ‘임권택’을 쳤더니 백과사전에도 나오더라. 대한민국 전 국민이 다 아는 감독. 문득 생활이 자유롭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임권택의 스물네 시간. 어떻게 돌아가나.
그러니까 정말 내가 힘들어 죽겠다는 거다. 우리 집사람도 나하고 같이 어딜 가려고 하질 않는다.(웃음) 주변에서 모두들 아는 척하고 그러면 피곤해지니까. 내 영화를 좋아해서 아는 척해주시는 건 좋은데 너무 얼굴이 알려지다 보니 불편한 부분이 있다. 제발 좀 몰라봐 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매번 하는데 그게 참…. 배우도 아닌데 얼굴이 알려져서….(웃음)
남편으로서, 한 집의 가장으로서의 임권택. 과연 몇 점짜리일까.
(옆에 앉은 부인을 향해) 내가 몇 점일까? 음, 내가 가정에 대해 몰라라 하는 건 아닌데. 영화를 한번 생각해봐라. 일 년에 한 편씩 만들었다고 하면 내가 백 년을 살았어야 한다. 일 년에 두 편씩 만들었다고 해도 50년이다. 누가 이런 얘기를 하더라. 밥 먹고 자고 영화 일 하는 것 말고 언제 쉬는 시간이 있기는 했었냐는. 집에 가만히 앉아 있을 때도 있기는 한데 우리 집사람 얘기로는, 육신은 집에 앉아 있고 혼은 훨훨 밖으로 떠돈다고 하더라.(웃음)
결국 점수를 밝히기 곤란한 걸까.(웃음)
만날 영화 속에서 산다. 그렇기 때문에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해야 될 일들을 거의 못하고 산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그런데 기자도 눈치껏 질문을 해야 하는데 날더러 점수를 얘기하라면 그것이 또….(웃음) 그런데 이게 다 우리 집사람이 날 이렇게 만든 거다. 가정에 대해 관심을 갖게끔 잔소리도 하고 짜증도 냈더라면 죽으나 사나 그렇게 되었을 텐데, 그냥 놓아먹인 거니까.(웃음)
그래도 결혼기념일이나 생일은 챙기나. 기자가 좀 집요하다.(웃음)
그것이 또 생일 얘기하면 곤란해지는데, 내가 이런 얘기로 대답을 대신해야겠다. 내가 하도 기념일을 챙길 수가 없이 밖에서 일을 하게 되고, 또 내가 생일을 챙길 수 있겠구나 싶은 날에는 이상하게 둘이 또 티격태격 싸우느라 ‘에이 나 몰라라’ 하게 되더라는 얘기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는지, 언젠가 어머니랑 있는데 달이 훤하게 떠 있는 거다. 우리 집사람 생일이 정월 대보름인데 “아이고, 우리 집사람 생일이네” 했더니, 어머니 왈, “이놈아, 네가 언제 집사람 생일을 챙겼다고 달 보더니 깜짝 놀라느냐”하시더라. 알고 보니 12월에 달을 보고 내가 그러고 있었던 거다.(웃음)
감독이 아닌, 한 사람으로서 임권택이 궁금하다.
두 분이서 함께 극장엘 가기도 하나.
사람으로서 내가 큰 악질도 아니고, 마음이야 늘 잘하고 싶은데 일 때문이라고 하기에도 너무 긴 세월을 지나왔기 때문에 핑계가 되어버렸다. 극장은 글쎄, 몇 번이나 갔을까? 우리 애들이 생일이라고 <왕의 남자> 끊어줘서 그거 봤던 게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100편의 영화를 만든 감독이 좋아하는 영화. 무엇이 있을까. 당신의 영화적 취향 역시 궁금하다.
좋은 영화는 어떤 영화나 다 좋아한다. 단지 내 취향이라고 해야 할지, 지향하는 영화관 같은 거와 너무 동떨어진 이야기는 잘 안 본다. <왕의 남자>도 재미있게 봤고 <실미도>나 <태극기 휘날리며> 같은 영화도 잘 봤다. 영화적 취향을 말하자면, 나는 기왕이면 영화가 인간의 삶을 끌어다 담게 되어 있는데 그런 것이 조금 더 진지한 시각으로 거짓 없이 만들어진 영화를 좋아한다.
본인의 작품 중 가장 의미가 있었던 작품을 꼽는다면. 영화판에서 살아온 수많은 세월 동안 떠오르는 편린들만 해도 엄청날 것 같다.
나는 내 영화를 잘 보지 않는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니, 내가 만든 영화를 보고 있으면 ‘저런 장면은 겨우 저 정도밖에 못 찍었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 속이 끓는다. 그래서 내 영화를 잘 안 보게 되고, 작품을 꼽기도 힘들다. 여러 가지 에피소드들이야 왜 없었겠느냐마는 나는 돌아서면 다 잊어버린다.
매번 영화를 찍으면서 힘들다는 생각을 하지만 또 찍고 나면 그런 기억을 다 잊어버리기 때문에 다음 작품에 들어갈 수 있다.
수없이 영화를 만들면서 ‘이것만은 꼭 지켜가고 싶다’ 하는 스스로의 원칙이 있을 것 같다.
영화라는 매체가 워낙에 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그것이기 때문에 내 영화가 사회에서 밝고 건강한 기여를 했으면 좋겠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다. 작품을 할 때마다 이 영화가 잘돼서 우리 삶에 작은 풍요로움이라도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당신은 늘 “할 줄 아는 게 영화밖에 없는 거요”라고 말한다. 어떤 감독으로 남고 싶은가.
어떤 감독으로 남고 싶다는 그런 욕심은 없다. 그저 내가 봐도 내 영화에 짜증나지 않는 것. 그런 거다. 그런 영화를 한 편이나마 만들고 끝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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