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게 없었어요. 대단하게 알려지고 싶은 마음이요. 덕분에 낙담하지 않고 계속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연기를 잘하고 싶어 괴로웠던 적은 많지만, 이름을 빨리 알리지 못해 괴로운 적은 없었죠.”
드라마 <크로스>에서 손연희 캐릭터는 가장 극단적이었어요.
톤을 맞추기가 어려웠어요. 전반부에는 드라마 성격과 달리 혼자 밝았고 연희의 과거사가 안 나왔어요. 그런데 후반부에는 극도로 치닫는 연기를 했죠. 육체적으로나 감정적으로 꽤 힘들었어요. 극에서 극으로 가야 하는데, 그 사이가 없었죠. 감정의 워밍업이 부족했던 것 같아요.
삶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위기를 맞았을 때와 같이, 곤두박질치는 감정을 느꼈겠네요.
맞아요. 준비되어 만들어진 괴로움이 아니었죠. 서서히 감정을 쌓아가지 못했으니까. 그래서 도리어 생생하게 느껴진 부분도 있었어요.
감독이 양진성과 손연희에게 가장 많이 한 말은 뭐예요?
“이건 상상도 못할, 누구도 쉬이 경험하지 못할 정도의 일이고 감정이야.” 이런 이야길 많이 해주셨어요. 연희가 어딘가로 막 끌려가는 장면을 찍을 때도요. 그 순간 연희가 느끼는 공포란 상상도 못할 정도였을 거라고, 상대의 눈만 봐도 기절할 정도일 거라고 하셨죠.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게 많이 도와주셨어요.
감정의 골이 깊고, 폭이 넓은 캐릭터를 연기하고 나면 배우 본인에게는 어떤 변화가 일어나나요?
음. 잘 모르겠어요. 손연희를 연기할 땐 극에서 극으로 치달으면서도 자연스러워야 했어요. 그런데 캐릭터의 전사가 극중에 많이 설명되지 않았어요. 제가 더욱 압축적으로 보여줬어야 했는데, 다 보여주진 못한 것 같아요.
손연희는 정의에 관한 신념이 있는 인물이었다고 생각해요. 양진성에게도 그런 면이 있나요?
그런 편이에요. 사회적인 문제에도 관심 많아요. 정의롭게 사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나에게 여유가 있든 없든 베풀며 살고 싶어요.
가치관이 비슷한 인물을 연기하는 일에는 일종의 쾌감이 따르나요?
그래서 극 후반부에 이중적인 감정을 느꼈어요. 사랑하는 아빠가 저지른 죄 때문에 끌려가고, 연희가 그 자리에서 기절한 장면을 찍을 때인데, 딸로서 느끼는 감정과 ‘죄를 지었으니 당연히 감옥에 가야지’라는 생각이 뒤엉키더라고요. 기절해 있어야 하는데 가슴이 아파서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어요. 있는 힘껏 참아야 했죠.
우는 신이 정말 많았잖아요. 감정을 어디에서 끌어내 쏟아낼까 싶을 정도였어요.
후반부에는 거의 매일 울었죠. 그런데 연희의 아빠 역을 맡아주신 손영식 선생님이 저에게 전해주신 감정을 많이 썼어요. 그게 연희의 감정을 표현해낼 때 가장 큰 동력이 됐어요.
손연희는 음악을 관두고 응급의학과 전문의가 됐어요. 어머니가 빠른 응급처치를 받지 못해 돌아가신 것이 계기였죠. 양진성도 사실은 미술을 했던 사람이잖아요. 왜 배우가 됐어요?
어렸을 때부터 미술을 해왔고, 대학교에 입학해서는 조소를 전공했어요. 그런데 특별한 창조성을 지닌 친구들은 한순간에 눈에 띄더라고요. ‘나는 왜 천재성이 없지?’ 늘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것이 점차 ‘그림은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바뀌었고요. 그렇다고 연기를 그다음 차순으로 생각한 건 아니에요. 연기는 더욱 상상도 못할 일이었죠. 권유가 있어 광고 모델을 하게 되었는데, 당시 소속사 대표님이 연기를 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끝내 오디션을 보러 간 것이 시작이었어요. 당시에 정말 어마어마하게 많이 떨어졌죠. 경험도 없고, 배운 것도 없고, 아무 준비도 안 되어 있었으니까요.
지금은 좀 어때요?
지금도 어떤 때엔 조금 떨리는데, 이 떨림은 계속될 것 같아요. 일단 그냥 무척 솔직해졌어요. 내가 실제로 느끼는 쑥스러움, 두려움 같은 걸 카메라 앞에서도 표현할 수 있게 됐어요. ‘엄청 잘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해’라는 마음에서 ‘실수하면 다시 잘하면 되지’라는 마음으로 바뀌었죠.
그런 면에서 이준익 감독과 함께한 영화 <소원>이 남다른 계기가 되었다고요.
큰 변화가 있었어요. 촬영 앞둔 날이면 늘 시험 보기 전날 밤 같았거든요, <소원> 이전에는. 물론 신나고 즐겁지만 공포감이 있었어요. 대본을 백 번 넘게 보고 외웠는데도 무섭고 불안했어요. 생각해보면 그땐 잘하는 연기에 절대적인 기준이 있다고 여겼던 것 같아요. 완벽한 연기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소속사나 주변 분들에게서는 더 매력적이어야 해, 카메라를 압도해야 해, 시선을 빼앗아야 해, 그런 이야기를 늘 들었죠.
길은 못 찾고 강박만 커졌던 거네요.
무조건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 압도적이었어요. 실수하면 안 되고, 잘 못하는 부분을 보여주면 안 된다는. 그런데 <소원>을 거치면서 많이 평온해졌어요. 접근하는 방법이 달라졌어요. 이준익 감독님은 모든 상황에 진정성을 부여하고, 자연스럽게 표현하기를 바랐거든요. 그제야 힘줘야 할 곳을 찾은 거예요.
“저는 혼자일 때 굉장히 대담해요. 나의 의지대로 행동하는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을 때는 말이죠.”
미술 하던 사람으로 살다가 연기하는 사람이 됐어요. 불특정 다수에게 얼굴을 알리는 일에는 좀 의연한가요?
가장 힘들고 어려웠죠. 여전히 어색해요. 원래 저는 수더분하고 자유로워요. 화장도 안 하고, 편한 옷 입고 운동화 신고 다니길 즐기고요. 혼자 다니는 것도 좋아하고 여행도 좋아해서 그냥 어느 날 꽂히면 가방 대충 챙겨서 훌쩍 떠나기도 해요. 그런데 누군가에게 내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 일을 시작하니까 자유롭고 수더분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 어렵더라고요.
이런 말을 하기도 했어요. 우리 세대를 대변할 수 있는, 동시대 사람들의 면면을 보여줄 수 있는 작품을 해보고 싶다고요. 조금 더 자세히 말해줄 수 있나요?
제가 이제 한국 나이로 서른하나거든요. 결혼하는 친구들도 많고 결혼을 포기하는 친구들도 많은 나이죠. ‘3포’ 시대조차 가버리고 ‘5포’ 시대가 왔잖아요. 돈 벌어 저축해야 하는데 돈 벌기조차 힘든 세대죠. 우리 세대의 이야기를 실질적으로 담은 드라마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연애 얘기가 주축이 되는 극 말고요. 비슷한 맥락의 드라마로는 <미생>이 있었고 <청춘시대>도 있었지만, 그것보다 조금 더 넓은 범위에서 지금 세대를 다룰 수 있는 사실적인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에요.
최근에 본 가장 흥미로운 캐릭터는 무엇이었나요?
영화 보는 걸 엄청 좋아해서, 정말 많이 봐왔는데. 잠시만요. 음. 얼마 전에 자비에 돌란의 <마미>를 다시 봤어요. 앤 도벌이 연기한 엄마 역할이 정말 엄청났어요. 완전히 자유롭게 감정을 표출해내는 듯한 느낌이었어요. 캐릭터의 살아 있는 감정이 화면을 진하게 채웠어요. 언젠가는 그런 역할을 해보고 싶어요.
책 보고 영화 보는 일 말고 또 뭘 좋아해요?
미술은 계속 하고 있어요. 작업을 이어가고 있어요. 작품 활동 이어가면서 나중에 뭘 하겠다는 건 아니에요. 그냥 계속해왔던 일이니까 놓지 않고 하는 거죠. 그리고 사실 액티브하게 운동하며 노는 것도 좋아해요. 수영도 하고 스쿠버다이빙도 하고. 깊은 바다에 들어가는 게 좋아요. 그 이상한, 어마어마한 적막이 좋아요. 예전에는 다이빙하러 혼자도 많이 갔어요. 강원도를 좋아해서, 강원도 바다로 갔죠.
데뷔 초엔 어땠어요? 빨리 자신을 알리고 싶어 하던 신인이었나요?
그런 생각이 없었어요. 대단하게 알려지고 싶다는 마음이요. 그래서 낙담하지 않고 계속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신인상을 타야 하는 사람이었다면, 언젠가는 여우주연상을 꼭 받고 싶다는 사람이었다면 이미 지쳐 쓰러졌겠죠. 괴로워했을 거예요. 제 스스로 연기를 잘해내고 싶어 괴로웠던 적은 무수히 많지만, 이름을 빨리 많이 알리지 못해 괴로운 적은 없었어요.
건강한 사람이네요.
몸도 마음도 건강하죠. 하하.
아직도 카메라 앞에 서면 수줍은 양진성이 가장 대담해지는 순간은 언제인가요?
혼자 있을 때? 나의 의지대로 행동하는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상태일 때요. 그럴 땐 정말 대담해요.
<아레나옴므플러스>의 모든 기사의 사진과 텍스트는 상업적인 용도로 일부 혹은 전체를 무단 전재할 수 없습니다. 링크를 걸거나 SNS 퍼가기 버튼으로 공유해주세요.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