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을 알게 되는, 많이 파고들어야 하는 캐릭터가 좋다.”
어쩌면 자기 파괴적이기도 한 일. 연기가 그렇다. 캐릭터를 만들고 혹은 만들어진 캐릭터에 몰입하기 위해서 관련 서적을 탐독하고, 다큐멘터리의 일반인을 찾아보고, 철학 서적을 읽고, 심리학자가 밑줄 친 부분을 다시 밑줄 그으며 이해하는 과정이 요구된다. 그리고 무대. 컷이나 NG가 없는 곳. 취소할 수도, 아프다고 조퇴하거나, 슬펴도 못 하겠다고 말할 수 없는 곳. 대사를 잊으면 상대 배우를 믿고 의지해야 하는 신뢰의 영역. 오로지 자신의 연기를 바탕으로 한 시간 반을 공연해야만 하는 연극. 또 노래하며 연기하고, 춤추며 희로애락을 표현하는 뮤지컬. 그리고 드라마와 영화. 갈고닦은 연기를 다르게 발휘해야만 하는 영역. 박해수가 걸어온 길이다. 박해수의 연기관은 고행자의 수행을 연상시켰다.
“나는 긍정적인 편이다. 고난을 덤덤하게 대하는 성격인데, 김제혁은 나보다 백배는 더 덤덤하다.”
〈슬기로운 감빵생활〉이 ‘감빵’ 트렌드를 이끌었다. 시청률도 많이 나왔고.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배우들이 출연했음에도 반응이 좋아서 이례적인 경우라고 생각한다. 배우와 제작진의 합이 잘 맞았다. 배우들의 호흡이 좋았고, 작가와 연출자의 힘을 더해 잘 만들어서 의미 있다. 드라마가 끝나서 참 아쉽다. 작품은 조금씩 잊히는데 함께했던 사람들은 계속 생각난다.
누가 생각나나?
제작진 형과 동갑내기 스태프들. 현장에서 동갑내기를 만나는 게 쉽지 않다. 현장에서 제작진은 되게 재미있고, 유머러스하다. 재치 있는 분들이 많다. 그들이 많이 생각난다. 작품이 끝난 후 서로 바쁘고, 나도 일이 있어서 만날 기회를 만들기 쉽지 않다.
합이 잘 맞는 제작진을 만나는 건 흔치 않다. 현장 분위기가 화기애애했나 보다.
나보다 형인 조명감독님이 그러더라. 우리가 보고 싶어도 오랫동안 못 볼 수도 있다고. 촬영 현장에서 같은 스태프를 다시 만나기란 쉽지 않다. 그래도 이번 스태프들과는 다시 만났으면 좋겠다.
스마트폰으로 드라마를 보는 시대다. 대화창에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시청자의 피드백은 보았는지?
시청자 반응이 너무 좋았다. 대화창의 피드백을 다 못 읽을 정도로 너무 많이 올라오더라. 그제야 우리가 사랑받고 있다는 걸 느꼈다.
처음 드라마 주연을 맡았고, 자고 일어나니 팬들이 생겼다. 시청자가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생소한 경험일 것 같다.
길거리를 다니면 알아봐주시는 분들이 많다. 그렇다고 소리 지르면서 반기는 경우는 없었다. 내 얼굴이나 덩치 때문인지… 대신 김제혁 선수로 알아봐주고 등 뒤에서 응원해준다. 부담되거나 방해받은 경우는 없었다.
삶에는 변화가 없나?
내 삶은 그대로다. 친척들에게서 연락이 많이 오는 정도? 연락이 끊겼던 친구나 군대 동료, 훈련병들에게서 연락이 온다.
전역한 지가 언제인데 어떻게 아직도 훈련병과 연락이 닿나?
군대에서 훈련소 조교로 복무했다. 다그치는 타입의 조교가 아니어서 나를 기억하는 훈련병들이 있다.
무슨 소리인가? 갈구지 않는 조교가 존재한다는 말인가?
갈굴 때는 갈궜지만, 동기 조교가 왜 너 혼자만 천사냐고 한 적이 있다. 그때 나는 훈련병에게 독설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름답게 사랑으로 품어주는 조교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아침에 훈련병 내무실에 따뜻한 음악을 틀어주고는 했다. 그런 순간을 기억하는 동생들이 연락을 하는 것 같다.
군대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슬기로운 감빵생활〉에서 연기한 김제혁 선수는 넥센 소속 투수다. 배역을 떠나 본래 어디 팬인가?
나도 넥센 팬이다. 경기를 챙겨 보는 열혈 야구 팬은 아닌데 이번 드라마를 준비하면서 광팬이 됐다. 내가 유일하게 직관한 게 넥센 경기였다.
〈슬기로운 감빵생활〉은 신원호 PD와 제작진에게 도전이었을 것이다. ‘응답하라’ 시리즈의 거대한 흥행 이후 시도한 첫 변화니까. 이 작품이 첫 번째 주연 작품이라 부담되었을 것 같다.
처음에는 작품 캐릭터에 대한 부담이 있었는데, 그 캐릭터가 이슈가 될 것이라고 예감하지는 못했다. 드라마를 촬영하면서 무게감을 느꼈고, 방영되어 시청자 반응을 보고 나니 부담이 커졌다. ‘이제 시작됐구나’ 하는 느낌이었다.
촬영에 앞서 신원호 PD와 작가가 요구한 부분은 무엇이었나?
감독님과 리딩을 많이 했다. 1회부터 4회까지 일주일에 두 번씩 거의 연극 수준으로 리딩을 했다. 감독님과 단둘이 리딩하거나 작가님들과 할 때도 있었다. 작가님은 내 습관을 관찰하고 캐릭터에 그 습관을 녹였다. 감독님과는 캐릭터를 만들기 위한 기술적인 방법, 전체적인 흐름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김제혁이 왜 참아야 했는지 등 구체적인 이야기를 나누면서 캐릭터를 확립해나갔다.
김제혁은 무척 치밀하게 만들어진 캐릭터다.
모든 캐릭터가 그렇다. 작가는 캐릭터에 대한 이야기를 프리퀄부터 드라마 이후 뒷이야기까지 만든다. 그 맥락을 알아야 캐릭터를 이해할 수 있으니까. 배우는 마지막까지 이 캐릭터가 어떻게 될지 구체적인 스토리는 모른다. 그저 어떤 흐름으로 가야 하고, 어떤 일을 겪었는지 이야기한다.
감색 더블 캐시미어 쇼트 코트는 질 샌더, 와이드 팬츠는 코스, 시계는 지씨 제품.
“집중력을 발휘해 공연하는 몇 달 동안이 배우에게는 큰 경험이 된다. 한 대사를 천 번 정도 이야기하면 그 단어가 가진 맛을 느끼게 된다. 그런 예술 영역이다. 매체, 영화 등 다른 분야에서는 그것들을 다르게 발휘해야 한다. 드라마와 영화는 이제 시작이다.”
드라마는 캐릭터가 어떻게 될지, 이야기는 어떻게 진행될지 모르는 상태로 촬영을 한다. 대본이 완성된 상태에서 시작되는 연극과 다른 지점이다.
그렇다. 연극은 무대에서 한 인생을 바라보는 상태에서 시작된다. 갈등 구조가 갖춰져 있고, 어떻게 구성할 것인지에 대한 배우들의 약속, 무대장치를 활용해 클라이맥스를 극대화하기도 한다. 반면 드라마는 앞뒤를 알 수 없다. 후반부 이야기를 대충은 알 수 있지만, 극 중반이나 연기에 몰입한 순간에는 잘 모른다. 그다음 회도 어떻게 시작될지 모르지만 그게 매력이다. 〈슬기로움 감빵생활〉에서는 모든 캐릭터가 살아 있었다. 대본을 읽었을 때 작가들이 얼마나 고뇌했을지 짐작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작가들이 대단했다, 정말.
배우들과 호흡이 잘 맞았다. 재미있는 순간이 많았을 것 같다.
매일 재미있었다. 어마어마한 크기의 교도소 세트였다. 전자동 시스템으로 작동했고, 스태프들의 카드 키를 찍지 않으면 문이 안 열렸다. 배우들이 방 안에 모여 하루 20시간씩 함께 지내다 보니 친해질 수밖에 없었다. 나이 차이가 꽤 나는 최무성 선배, ‘고박사’ 정민성 선배부터 막내 해인이까지 다들 조금씩 나이 차이가 났다. 큰형부터 작은 애까지 있으니 관계가 좋아지더라. 여배우가 없으니 우리끼리 늘어져 있고, 그 방에서 자고 술자리도 갖고.
지금 우리가 군대와 야구 그리고 감옥 이야기를 하고 있다.
촬영장이 진짜 군대 같은 느낌이 들었다. 훈련소에서는 6주간 훈련을 받는데, 우리는 거의 6개월간 함께 있었다.
김제혁 캐릭터는 외형에서 특징이 두드러진다. 일자 앞머리 소위 상고머리라 부르는 컷, 팔을 가지런히 내리고 서 있는 자세, 걸음걸이에서도 김제혁의 성격이 느껴진다.
감독님이 요구한 건 어마어마하게 넓은 어깨였다. 실제 야구선수처럼 몸을 크게 만들어야 했다. 선수들은 어깨가 넓고 몸통도 매우 굵다. 날렵한 근육미가 아니라 옷을 입었을 때도 살인병기처럼 느껴질 만큼 거대해야 했다. 다이어트도 어렵지만 몸을 크게 만드는 것도 어렵다. 고단백질 음식만 먹는 것도 괴로웠다. 헤어스타일은 교과서 〈슬기로운 생활〉에 나오는 철수 머리다. 슬기로워야 하니까. 철수와 영희처럼 고지식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상고머리를 했다. 산만한 덩치의 무덤덤한 남자이지만 속은 순수한 어린아이다. 큰 체격에 머리도 남성적이라면 전형적이었을 것이다. 미술팀과 고민하며 만든 헤어스타일이다.
김제혁과 닮은 점이 있나?
분명 있다. 나는 긍정적인 편이다. 고난을 덤덤하게 대하는 성격인데, 김제혁은 나보다 백배는 더 덤덤하다. 그 지점이 비슷한 것 같다. 또 하나에 꽂히면 ‘올인’한다. 김제혁은 운동, 나는 연기다. 가끔 욱하는 점도 비슷하달까?
자꾸 촬영 현장에 대해서 묻게 되는데, 드라마가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에피소드 좀 말해달라.
의정부 세트와 장흥 세트를 오가며 촬영했다. 장흥에서는 후반 교도소 운동장 신을 촬영했다. 네 시간 반 걸리는 곳이지만 가는 길이 즐거웠다. 장흥에는 맛집이 많고 쉬는 시간도 많거든. 운동장 신은 낮에만 찍으니까 밤에는 술 마시고, 경호랑 놀고, 힘도 나고. 무엇보다 맛집이 많고 모든 가게의 밥이 기가 막히다.
연극으로 시작해 뮤지컬, 드라마, 영화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그 원동력은 무엇일까?
무대는 지금도 오르고 있고, 앞으로도 할 것이다. 무대 예술, 그중에서도 연극은 배우의 내구성을 길러준다. 무대에는 컷이 없고 NG도 없다. 끝까지 해야만 한다. 내가 안 된다고 누가 도와줄 수도 없고, 취소할 수도 없다. 그러니 배우는 무대에서 어떤 상황이든 견뎌내야만 한다. 내가 못하겠다면 상대 배우를 믿고 가야 한다. 신뢰성과 배려, 겸손을 배우며 단단해진다. 집중력을 발휘해 공연하는 몇 달 동안이 배우에게는 큰 경험이 된다. 한 대사를 천 번 정도 이야기하면 그 단어가 가진 맛을 느끼게 된다. 그런 예술 영역이다. 매체, 영화 등 다른 분야에서는 그것들을 다르게 발휘해야 한다. 드라마와 영화는 이제 시작이다.
무대에서는 다작을 했고, 자연스레 많은 캐릭터를 경험했다. 배역을 모두 기억하나?
하나하나 다 기억난다. 사실 전부 어려웠다. 감정적으로 힘든 것과 체력적으로 힘든 점이 있다. 〈오이디푸스〉에서는 정서적으로 힘들었다. 행복한 공연이었지만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자는 오이디푸스를 연기하기란 심적으로 괴로웠다. <프랑켄슈타인>에서는 괴물 같은 연기를 보여줘야 했다. 1막 끝나면 단백질 보충제를 마시고 공연했을 정도다. 한 번 공연하면 1kg씩 몸무게가 빠졌다.
김제혁도 그렇지만 무대에서도 고난을 겪는 캐릭터를 연기했다. 힘든 캐릭터만 골라서 하는 이유는 뭔가?
그 작품들을 연출하신 분들과 작업하고 싶어 하는 배우들은 너무 많다. 그러니 기회가 주어졌을 때 바로 가서 했다. 그분들이 고난이 심한 캐릭터를 만들어주셨다. 힘든 캐릭터를 연기해야 단단해지고 실력이 쌓이지 않겠나 싶다.
연기의 본질에 깊이 파고들고자 하는 노력이 느껴진다.
배역에 몰입하는 과정이 재미있다. 그 작품의 결과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보다 연습실에 나가서 연습하고, 스트레스 받고, 연기자들과 대화하는 게 좋다. 캐릭터의 본질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보면 종교, 철학, 역사를 살피게 된다. 심리학책을 찾아 읽게 되고,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그래서 공부하고 그 과정이 재미있다. 그래서 인간을 알게 되는, 많이 파고들어야 하는 캐릭터가 좋다.
영감을 어디서 받나?
다양하다. 다큐멘터리에서 찾을 때도 있고, 명화를 볼 때도 있다. 음악을 들을 때도 있고, 심리적으로 파고들 때도 있다. 결론적으로는 나에게서 찾으려고 나 자신에게 집중한다. 말은 멋있지만 사실 아무 데서나 찾으려고 한다.
마지막 질문이다. 행보가 궁금한 사람이니까.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 묻겠다.
지금 작품에서 최선을 다하려고 한다. 연극도 하고 싶고… 무엇보다 좋은 영향력을 끼치는, 그러니까 동료에게 인정받는 사랑이 넘치는 배우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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