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리 이제〉 | 임나운
이번엔 이별을 ‘그린’ 책이다. 이야기는 단순하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고 헤어진다. 그 과정이 굉장히 잔잔하게 흘러간다. 여백이 많은데, 그 여백에 어떤 정서가 스며 있다. 애써 이야기하지 않고도 어떤 정서가 여백 안에 잘 녹아 있다. 그래서 콱 박히기보다는 주로 잔잔하게 흘려보내며 읽었다. 책을 읽는다는 건, 그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고 확인하려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다들 어떤 문장 혹은 장면 안에서 자신을 찾는 거다. 잔잔하게 흘려보낼 수 있는 이야기인 점이 지금의 나에겐 좋았다. 언젠가는 잔잔한 삶을 살고 싶거든. 지금은 열심히 과하게, 휘둘리며 살고 있고. 서른 줄에 들어선 지금도 꿈꾸는 삶에 닿기는 요원해 보인다.
2 〈이별의 도피처〉 〈사랑의 도시〉 | 김은비
단도직입적으로 말할 수 있다. 이 책은 이별한 사람이 읽기에 좋다. 누구든 이별을 하니까, 누구든 구비해두었다가 이별을 맞이한 비상 시기에 읽으면 좋을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책은 양면으로 구성됐다. 한쪽 면은 <이별의 도피처>, 다른 면은 <사랑의 도시>다. 이별을 한 작가가 제주와 파리를 여행하며 쓴 ‘자기 반성적 이별기’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별 후 자기 반성 없이 넘어가지 않나. 이별을 받아들이기보다는 그 이별의 이유를 상대에게서 찾고. 이별을 한 김은비는 이 책에 수없는 자기 반성을 써내려 간다. 그는 ‘사랑이 없으면 살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인 것 같다. 누군가는 치기 어리다 여길 수도 있겠지만, 사랑에 대해서만큼은 낭만주의자다. 또 자신이 살아야 할 삶, 살고 있는 삶을 글로써 증명하려는 작가다. 그런 태도가 그대로 글에 묻어났다. 김은비는 극작을 전공했는데, 지금껏 써낸 4권의 독립 출판 에세이집들이 꾸준히 잘 팔린다. 이 다음 출판물은 한국과 일본에서 동시 발매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3 〈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예민한 사람입니다만…〉 | 류형정
류형정은 원래 그림을 그리는 작가다. 그간 꾸준히 써온 글을 모아 이러한, 조금은 긴 제목의 책을 냈다. 그의 글은 담담하다. 멋 부리려 쓴 글이 아니다. 자신의 소소한 일상적 생각을 아주 담백하게 적는다. 가볍게 들고 읽기에 좋다. 읽다 보면 묵직하게 전해지는 것들이 좋다. 주체가 온전히 자기 자신이라는 점 역시 좋다. 글을 쓰고 책을 내는 사람들 중에는 어떤 흐름에 휩쓸려 푹 빠져든 것에 관해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는데, 류형정은 그저 자기 자신에 관해 말한다. 공감을 주입하지 않고 주장을 펼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은 이렇게 살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한 태도가 좋다. 자신의 삶을 주체적인 태도로 단단하게 펼쳐내는 그의 이야기가 꼭 내 이야기처럼 와 닿는다.
1 〈랩걸〉 | 호프 자런
밑줄 긋고 싶은 내용이 너무 많다. 에세이지만 소설처럼 읽힌다. 그만큼 잘 썼다. 저자는 식물학자 호프 자런이다. 여성이고 하와이에 살며 이 책을 썼다. 그런데 혹시 알고 있는가? 식물학은 사실상 과학의 변방이라는 사실을. 〈랩걸〉에는 호프 자런이 그 척박한 변방에서 자신을 입증하고 성장해온 이야기가 펼쳐진다. 마른 땅에 뿌리 내린 씨앗이 나무가 되듯, 긴 시간 참고 견디며 삶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는다. 때가 오면 마땅히 할 일을 준비하고, 게으름 피우지 않으며, 시련을 기꺼이 끌어안고, 필요할 땐 물과 햇빛을 향해 적극적으로 팔을 뻗는다. 똑 떨어진 연구비를 벌기 위해 미국의 곳곳을 며칠 동안 다니며 사람들을 설득하기도 한다. 그렇게 서서히 자신의 연구에 자부심을 느끼는 과학자가 된다. 열심히 생을 살고, 자신의 일을 하고, 꿈을 이룬다는 것에 관해 다시 생각하고 다짐할 수밖에 없다. 읽고 나면 힘이 난다. 호프 자런은 2016년, 〈타임〉이 선정한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에 이름을 올렸다.
2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 마쓰이에 마사시
작년 여름에 읽었고, 너무 좋아 올여름에도 다시 읽는 소설이다. 서사를 음미하고 순도 높은 문장들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 모두의 삶 깊은 곳에 숨은 긍정성을 들여다보게 된다. 이야기는 1982년, 일본의 고급 별장지인 가루이자와에서 일어난다. ‘무라이 건축 설계사무소’는 여름 한철을 가루이자와 아사마 산자락의 별장에서 보낸다. 삶과 맞닿은 건축을 꿈꾸는 사람들, 언제까지고 이어질 듯 보이는 여름의 고아한 나날을 펼쳐놓으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읽는 순간, 이야기가 끝나는 순간 아쉬움이 밀려온다. 출판사에서 달아놓은 책 띠지에는 ‘일본 문단의 정통성을 잇는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강렬한 묘사, 다자이 오사무의 깊은 사색, 마루야마 겐지의 선 굵은 뚝심, 무라카미 하루키의 스타일리시한 여백’이라는 등의 소개가 쓰여 있는데, 일본 소설의 장점을 다 가진 작품임은 분명하다.
3 〈한 걸음씩 걸어서 거기에 도착하려네〉 | 나희덕
나희덕 시인이 쓴 산문집. 시인 나희덕은 굉장히 서정적인 시를 쓰는데, 산문집에도 그 부드러운 바람 같은 호흡이 그대로 살아 있다. 나희덕 시인은 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교수이기도 한데, 안식년 동안 떠난 여행을 비롯해 10여 년간 틈틈이 이어온 여행 이야기를 산문으로 풀어냈다. 작가의 문장을 읽어 내려가는 일만으로도 마음이 안정된다. 폭풍 같고, 정신없는 나의 마음을 달래준다. 이 산문집과 함께하는 동안만큼은 내 원래의 성정과는 달리 잠시 인생에 관조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고, 불안함이 가신다.
1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 | 임솔아
올여름 날씨는 참으로 괴괴했다. 괴괴하다는 말이 딱 맞다. ‘비가 이렇게 내리나?’ 싶을 정도로 많은 비가 짧은 순간 내리기도 했고, 하루 종일 음습한 날도 있었다. 나는 그 속에서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을 읽는다. 괴괴한 날씨 안에 놓인 착한 사람들을 생각한다. 서점을 연 이래로 인스타그램 활동이 생활화됐다. 서점 운영 때문에 안 할 수가 없어서 하는데, 사실 괴롭다. SNS를 그만뒀다는 사람을 보면 부럽다. SNS 때문에 어마어마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SNS에서 사람들은 거의 싸우기 위해 사는 것처럼 굴 때가 많다. 좋은 글을 올리면 그 글이 어떻게 잘못된 것인지 알리려고 노력하는 것 같다. 분명 선의를 가진 사람들은 늘 존재할 텐데, 지금 이곳은 착한 사람들이 괴괴한 세상에 갇혀 제 역할을 못하고 있는 세계인 것 같다. 착하다는 것은, 목적 없는 선의는 얼마나 좋은가. 착함이 제 가치를 찾았으면 좋겠다. 이 사회에 서로에 대한 이해와 양해가 조금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서점 밖의 공간에서 생기는 그러한 관계가 힘들다. 이런 마음을 안고 이 시집을 읽고 있다.
2 〈다정한 호칭〉 | 이은규
〈다정한 호칭〉은 언어가 시적으로 얼마나 정교하게 탁마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절차탁마의 시집이다. 〈다정한 호칭〉에 든 시가 다정하냐면 그렇지는 않다. 제목과 시집의 내용은 꽤나 별개이지 않던가. 하지만 좋은 시집일수록 제목이 전체 분위기를 아우른다. 〈다정한 호칭〉도 마찬가지다. 이 시집은 결론적으로 이 사회에서 다정함이 지니는 의미를, 다정함의 경계를 말한다. ‘위트 앤 시니컬’이라는 자리를 지킨 지 꼭 1년이 되었고 ‘다정함’이 지니는 경계와 가치를 짐짓 떠올리게 된다. 지난 1년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었지만, 어쨌든 이 모든 것이 거래 현장이라는 사실을 새삼 자각하는 순간의 연속이기도 했다. 나는 찾아오는 손님, 독자와 긴밀한 유대감을 맺고 싶어 하면서도 그러기가 쉽지 않았다. 시인 유희경과 독자 아무개가 만나는 자리가 조금 더 긴밀해졌으면 좋겠다. 적어도 이 안에서 만나는 이들과는 특별한 관계를 맺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하며 이은규의 활자를 훑는다.
1 〈소비를 그만두다〉 | 히라카와 가쓰미
작은 삶에 대한 책이다. 소비를 그만둔다는 의미는 진짜 뭔가를 사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큰 자본이 짜놓은 시스템을 무의식적으로 소비하는 삶을 그만두자는 것이다. 저자인 히라카와 가쓰미는 벤처 기업을 운영하며 나름 성공한 삶을 살던 사람이다. 그러던 어느 날 모든 것을 잃고 자신이 살던 동네에 작은 사무실을 열어 다시 삶을 일군다. 그때부터 그는 동네 상점가를 이용한다. 책의 결론은 ‘소상공’의 삶으로 돌아가자는 것. 너무 많은 것이 쏟아지는 현실에 피로를 느끼던 중 이 책을 읽었고, 곧 설득되었다. 이렇게 사는 것도 삶의 한 형태지, 깨달은 것이다. 이전에는 생필품을 30분 정도 시간 들여 인터넷 쇼핑으로 구매했다면, 지금은 퇴근 후 마트에 들러 이것저것 구경하며 30분 정도 장을 본다. 결국 개개인의 선택인데, 나는 어떤 30분이 스트레스가 덜한가를 생각해보니 후자이더라. ‘여러분, 퇴사하고 소상공인이 되세요’라는 말이 아니다. 어떤 소비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질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일이나 직장을 바꾸지 않고도, 소비 형태를 바꾸는 일만으로도 삶이 달라질 수 있다.
2 〈百의 그림자〉 | 황정은
사랑한다는 말이 단 한번도 나오지 않는 연애 소설. 읽고 있자면 아주 천천히 따뜻해지고, 그 따뜻한 느낌이 오래도록 남는다. 오래된 전자상가에서 일하는 남자와 여자가 등장하고, 둘은 사랑을 키워간다. 남자와 여자를 비롯한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모두 선량하다. 사랑 그리고 사회에 대한 태도가 따뜻한 사람들이다. 처한 상황 안에서 좋은 것들을 찾아낼 줄 알며,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와는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을 아무 저항 없이 받아들인다. 어두운 환경에 놓여 있으면서도 각자의 힘든 일은 스스로 견뎌내고, 서로의 어떤 부분에 과하게 개입하지 않는다. 삶도 사랑도 이 사람들처럼만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이 책으로 사랑에 대한 태도가 바뀌었다. 그렇다고 현실 연애에 엄청나게 도움이 된 것은 아니고. 여기엔 그저 사랑에 관한 이상형이 존재한달까.
3 〈뉴욕의 책방〉 | 최한샘
책과 서점을 사랑하는 저자가 오랜 기간 뉴욕에 체류하며 직접 경험한 인디 서점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그는 운영자를 인터뷰하지 않았으며, 한두 번 방문해 스케치한 내용을 쓰지도 않았다. 그저 가보고 싶던 서점에 손님으로서 방문하고, 서점의 프로그램 혹은 사인회에 참여하거나 뭔가를 구매하기도 하면서, 겪고 느낀 것들을 세세하게 썼다. ‘공간으로서의 서점’에 대한 생각이 많아져, 시중에 쏟아져 나온 서점 관련 책들을 다 찾아 읽던 때도 있었는데 결국에는 그만뒀다. 보통은 책방이 어떤 콘셉트인지, 인테리어는 어떤지 등의 내용으로 빼곡한데, 읽다 보니 그닥 궁금하지 않았다. 그 사이에서 〈뉴욕의 책방〉은 서점 안에서 오가는 이야기만이, 책과 사람에 관한 내용만이 실린, 조금 다른 책이다. 사람에게 필요한 공간에 관해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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