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건모에겐 ‘잘못된 만남’이 있고 아이유에게는 ‘좋은 날’이 있다. 그러니까 특정 인물에게 자동으로 연상되는 상징적인 어떤 것이 있다는 얘기다. 배우 정우에게는 <응답하라 1994>의 ‘쓰레기’가 있다. 또 학창 시절에 좀 놀아본 남자라면 정우를 보면서 영화 <바람>의 ‘그라믄 안 돼’를 반사적으로 떠올릴 거다. <응답하라 1994>는 2013년 드라마고 <바람>은 그보다 오래된 2009년 영화다. 2017년의 정우와 마주 앉아 이런 과거를 떠올린다는 것이 조금 미안했다. 하지만 그는 ‘그 작품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장난을 엄청 좋아할 것 같은 얼굴로 껄껄 웃었다.
사실 정우는 뭐든지 솔직했다. 재미있으면 얼굴을 막 찡그리면서 크게 웃고, 출출해서 시킨 피자도 크게 한 입 맛있게 베어 물었다.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사람 같았다. 연기할 때도 마찬가지다. 드라마로 큰 인기를 얻은 후 여자들이 좋아할 만한 ‘훈남’의 길을 걸을 법도 한데 그러지 않았다. 배우로서 스스로 만족하고 또 채찍질할 수 있는 작품이 아니면 좀처럼 선택하지 못하겠다고 했다. 작년 이맘때쯤 <히말라야>에서 고생을 실컷 한 그는 올해 영화 <재심>을 선보인다. 이번엔 변호사가 되어 진실을 위해 열심히 싸웠다. 그와 영화 이야기를 제일 많이 했고, 다른 이야기는 조금밖에 못했다. 그가 이 영화를 너무도 아끼고 사랑하는 게 눈에 다 보여서 다른 시시콜콜한 얘기를 꺼내지 못해서다. 본인의 영화를 적극적으로 홍보하고자 마음먹은 솔직한 남자에게는 도저히 당해낼 재간이 없다.
2015년 말에 <히말라야>를 개봉했으니까 1년 2개월 정도 지난 셈이다. 그다음 영화로 <재심>을 선보이기까지 이렇게 오래 걸린 이유가 있나?
내가 최선을 다하고 싶은 작품이 있었다면 2~3개라도 했을 거다. 그런데 늘 어느 지점에서 고민하게 되고, 선택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응답하라 1994> 끝나고 1년 후에야 영화 <쎄시봉>을 개봉했듯, 또 이렇게 오래 걸렸다. 필모그래피가 느리게 채워질지언정 인간 정우, 배우 정우가 숙성될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례되는 얘기일 수 있지만, 나는 ‘물 들어올 때 노를 저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 많은, 더 다양한 작품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빨리 잡아야 하지 않나?
물론 기다리는 시간이 말처럼 쉬운 건 아니다. 아마 나뿐 아니라 다른 배우도 마찬가지일 거다. 예전에 어느 인터뷰에서 얘기한 적이 있다. ‘연기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지 못한 상태에서 작품에 출연했을 때 너무 의욕과 욕심이 앞서 연기의 균형을 깨면 어쩌나 걱정된다’고. 에너지를 제대로 적당히 발산해야 하는데 자제가 안 될까 염려되기도 한다. 너무 어렵게 말했는데, 쉽게 말하면 감 떨어질까봐 걱정된다는 얘기다. 하하. 그렇다고 해서 내가 끌리지 않고, 잘할 자신이 없는 작품을 선택할 순 없다.
그렇게 고심한 끝에 고른 <재심>은 살인 사건 목격자가 억울하게 범인이라는 누명을 쓴 ‘약촌 오거리 사건’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전작 <히말라야>에서는 산악인 박무택 씨를 연기했다. 이처럼 실존 인물을 연기할 땐 아무래도 조심스럽지?
조심스럽다는 표현이 가장 정확하다. 실존 인물을 연기하면 당사자를 비롯해 그 주변 사람들 특히 가족이 신경 쓰인다. 내가 극 중에서 내뱉는 한마디 말이 그 인물을 대표하는 이미지가 될 수도 있고, 자칫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사실 배우라는 직업 자체도 그렇다. 잘못된 기사 한 줄, 짧은 영상으로 오해를 사기도 하니까. 이번 영화에서 박준영 변호사를 연기했는데, 그래서 컷마다 감독님에게 이렇게 연기하는 게 맞는지 틀린지 계속 여쭤봤다.
그런데 우리는 이 영화의 발단부터 결말까지 다 알고 있다. <그것이 알고 싶다>를 비롯해 다양한 매체에서 다룬 유명한 사건이니까. 극장에서 돈 내고 이 영화를 본다면 또 다른 재미를 찾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살인 사건이라는 소재 때문에 이 영화를 범죄 스릴러 등의 장르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진실을 부정당하는 억울한 사람이 나오는 것이 핵심이다. 그래서 시작부터 무거우면, 관객이 지치지 않고 끝까지 따라올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누명을 쓴 목격자 ‘현우’ 역을 맡은 강하늘 대신 내가 관객의 숨통을 터주는 역할을 했다. 긴장이 있으면 이완이 있고, 그런 극의 리듬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다. 어떤 인물에게 감정을 이입하느냐에 따라 재미나 감동을 느끼는 포인트가 달라질 거다.
변호사 역할을 맡았으니까 당연히 법정에서 열변을 토하는 장면이 있을 거라 예상했다. 그런데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고?
진범을 밝혀내고, 목격자가 살인범으로 뒤바뀐 억울함을 호소하고 뭐 그런 장면이 롱 테이크로 나왔으면 어땠을까, 배우로서 상상하긴 했다. 그런데 또 다른 영화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장면이니까 굳이 우리 영화에선 나오지 않아도 괜찮을 거 같기도 했다. 두 가지 생각이 공존한다. 나는 분석가에 가까운 수사관 같은 변호사를 연기했다. 직접 뛰어다니고 증거 확보하고, 법정보다 거리를 활보하는 활동적인 캐릭터라 아쉬움은 없다.
그래서 이 영화의 주제는 뭔가? 정의는 살아 있다?
영화를 떠나서, 정의는 살아 있어야 한다. 결국 그렇게 된다고, 긍정적으로 믿고 살아야겠지. 그런데 말이다, 사람이 없으면 사건은 벌어지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그 일을 만드는 건 사람이다. 이 영화는 사람에 의해 상처받은 사람이, 또 다른 사람에 의해 아픔을 치유하는 과정을 그린다. 정말 너무 억울하고 화나지만, 그래도 아직은 살아볼 만한 세상이라고 생각해줬으면 좋겠다.
작년 여름부터 촬영했으니까 진짜 더울 때였겠다. 그런데도 굉장히 기분 좋게 기억한다.
나는 히말라야도 다녀왔기 때문에 날씨 때문에 힘들다는 건 크게 느끼지 못한다. 하하. 더우면 더운 대로, 추우면 추운 대로 고생스러운 건 어쩔 수 없으니까. 그런데 이번 현장에서는 주요 스태프들이 정말 열정으로 똘똘 뭉쳐서 영화 안팎의 어려운 점을 함께 이겨냈다. 진한 동료애를 느꼈다.
영화 개봉을 앞둔 배우의 심경은 늘 궁금하다. 진짜 긴장되고 떨릴 것 같다.
시사회 때 눈물 참으려고 했는데 나도 모르게 울컥했다. 그래서 옆에 앉아 있는 감독님 손을 잡았나, 무릎을 잡았나 그랬을 거다. 서로 긴장하니까. 이 작품 찍으면서 이마를 40바늘 꿰매는 사고도 당하고, 여러 감정이 교차했다. 전작들에선 선배님들도 많고 또 나보다 경력이 많은 동료 배우들도 있었는데 이번엔 어쩌다 보니 내가 힘이 되어줘야 하는 포지션이었다. 연기만 잘하면 되는데 참 이런 쓸데없는 생각까지 했다. 나도 모르게 자꾸 책임감이 생기더라.
가수가 히트 곡이 하나 있으면 다음 앨범을 내도 계속해서 따라다닌다. 아마 배우도 마찬가지일 거다. ‘정우’ 하면 ‘응사’나 ‘바람’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은데?
그런 얘기는 언제나 기분 좋다. 특히 <바람> 잘 봤다고 얘기해주면 또 다른 느낌이다. 왜냐면 그때 그 영화는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런 영화를 찍는지도, 개봉하는지도 아무도 몰랐으니까. 내 자전적인 이야기인 걸 제외하더라도 캐릭터와 이야기의 힘으로 거의 3년에 걸쳐 알려진 작품이라 남다르다. <응답하라 1994>는 정말 누구나 다 아는 드라마였고. 모든 배우는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만한 작품을 하고 싶어 한다. 나에게는 바로 이 두 작품이 그렇다. 이 작품들이 없었다면 <쎄시봉>도 없고 <히말라야>도 없고 <재심>도 없었을 거다.
시나리오는 요즘도 쓰고 있나?
마음먹고 쓴 적은 한번도 없다. 정말 너무 심심하고 할 일이 없을 때 끼적이는 정도다. 사실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 이런 책들도 있는데 봐도 잘 모르겠더라. 좋은 책인데 내가 흡수할 능력이 안 되는 거 같다. 그래서 공부하면서 시나리오 쓰는 건 내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다만, 주변에서 일어난 일이나 친구들의 이야기를 귀담아듣고 글로 표현하는 건 재미있더라. 쓰다가 중간에 포기한 것도 있고 <바람> 후속편은 몇 년 전에 완성해놓기도 했다. 그런데 글을 쓰면서 꼭 영화로 제작해야 한다는 욕심보다는 배우로서도 어떤 역량이 쌓이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다. 연기하는 데 도움이 되라고 쓰는 거다. <바람> 후속편은 내가 썼지만 재밌긴 하다. 나 혼자 울고 웃으면서 썼다.
그동안 작품과 작품 사이 공백이 좀 길었다.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지도 중요할 것 같은데?
예전에는, 그러니까 30대 초반까지도 운동으로 몸을 혹사시켰다. 연기하고 싶은데 작품 활동은 많지 않고, 바쁘고 싶은데 스케줄은 비어 있으니까 뭐라도 해야 했다. 영화나 드라마를 분석하는 것도 한두 달이지, 이게 길어지니까 뭔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되겠더라. 그래서 선택한 것이 운동이었다. 다이어트의 고통을 느끼다 보면 내가 삶에 대해, 꿈에 대해 노력하고 있다는 위안이 찾아왔다.
그러다 보니 무리한 운동으로 몸이 축나기도 했다. 그래서 요즘엔 무조건 마음 편하게 지내려고 한다. 산책하면서 내려놓는 연습을 꾸준히 한다. 배우는 나를 찾아주는 작품이 없을 때, 내가 지금 촬영장에 없을 때, 그리고 다다음 달쯤 예정된 작품이 없을 때 제일 불안하다. 그 불안은 앞으로도 계속될 거다. 그래서 더욱 잘 준비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아까 언급한 ‘숙성의 시간’ 말이다.
<재심>이 개봉된 후에도 올해는 아직 10개월이나 남아 있다. 어떻게 채울 건가?
올해는 정말로 작품 수를 늘려보고 싶다. 너무 드문드문 나와서 팬들에게도 죄송하다. 영화건, 드라마건 뭐든지 도전해보고 싶다. 특히 드라마 대본 좀 사무실로 보내달라고 적어달라. 또박또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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