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6년 9월 30일. 출판사 스윙밴드에서 <하우스 오브 픽션>이 출간됐다. 6명의 작가들이 각각 쓰고 그린 픽션을 모은 책이다. 이들에겐 4절지 4장이 주어졌다. 작가들은 ‘이곳’을 그림과 글로 채웠다. 그들은 이곳을 공간으로 생각했다. 원고지가 아니라 자유롭게 무엇이든 들여놓을 수 있는 공간. 책은 두 가지 버전으로 출간했다. 하나는 양장본. 다른 하나는 무선본과 ‘리브르 아 를리에’를 함께 구성한 패키지다.
리브르 아 를리에는 제본되지 않은, 낱장의 상태로 판매하는 책을 뜻한다. 그래서 작가들이 애초에 부여받은 4절지가 그대로 담겨 있다고 보면 된다. 한국에서 리브르 아 를리에 형태로 책이 출간된 것은 처음이다. 특별한 책을 갖고자 하는 사람들은 리브르 아 를리에를 구입해 자신만의 방식으로 제본하거나, 제본 예술가들에게 의뢰한다.
비슷한 시기에 ‘#문단_내_성폭력’ 사태가 발발했다. 트위터로 제보가 이어졌고, 많은 남자 작가들이 거론되었다. 남자 작가들이 여성 작가, 여성 독자를 대하는 태도가 얼마나 무지하고 무모하고 부도덕했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지목된 작가들은 잠정적으로 ‘매장’되었다.
이제 와서 법적 제도로 그들을 단죄하긴 어려우나 독자의 ‘처단’은 그 이상으로 거대해 보인다. 이 사건을 계기로 수많은 감시자가 남자 작가들의 왜곡된 위계를 지속적으로 감시할 것이라 예상한다. 하지만 그 감시자란 대단한 지위를 가진 누군가가 아니라, 평범한 (지금으로선) 여성 독자다. 이런 표현이 적합할지 확신이 서지 않지만, 그들이 승리했다.
이제 글만 잘 쓴다고 작가로서 존중받는 시대가 아니다. 작가는 삶을 대하는 태도로 다시 한 번 평가받는다. 독자에게 작가가 어떤 방식으로 살아왔는지 중요한 문제가 됐다. 이것은 언뜻 가혹해 보인다.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 지금 깊이 논의할 수는 없다. 일단은 우리 시대가 이 시기를 견디며, 더 성숙해져야 한다.
2017년 1월 이런 책이 출간된다. 가제이긴 한데
맥락 없이 읽히는 이 세 사안을 통해 ‘의심’이란 단어를 도출할 수 있다. 책의 형태에 대한 의심, 작가에 대한 의심, 문단의 흐름에 대한 의심. 뭉뚱그려서 책에 대한 의심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책도 작가도 권위의 상징이던 때가 있었다. 이제 그 권위를 대중이 의심한다. 이 의심은 존중받아야 한다.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궁극적으로 이러한 의심은 책의 발전에 기여할 것이기 때문이다. 권위는 다양성의 대척점에 있다. 거대한 흐름은 대부분의 것들을 일괄해버린다.
책이, 모호하게 어떠한 집합체인 책이, 예술품이라면 그것의 존재 이유는 다양성 그 자체에 있다. 다시 원래 책의 가치에 집중한다면 책을 의심하는 일은 새롭게 책을 정의하고, 사라져버린 진짜 책을 발견하는 일이 될 것이다. 어떠한 흐름이 그런 일을 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이제 누구라도 책 위에 앉아, 아무렇지 않게 책의 가능성을 탐구해도 괜찮다. 그런 2017년이 왔다.
어렵지 않게 깊이
두 번째 시집 <다만 이야기가 남았네>를 출간한 김상혁 시인이 신간 세 권을 추천한다.
격 월간지 <릿터>는 내가 정기구독하는 잡지다. 첫 호를 읽은 뒤 나는 주저 없이 자발적 구독자가 되었다. <불과 글>은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이 쓴 에세이다. 유명하고 난해한 철학자가 에세이를 출간하는 건 언제나 환영할 만한 일이다. <제후의 선택>은 어린이를 위한 단편 동화집이다. 제17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대상을 수상하며 심사위원들에게 이례적인 극찬을 받았다.
<제후의 선택>
김태호 글, 노인경 그림 | 교양인
<제후의 선택>은 흔히 ‘글 좀 쓴다는’ 자의 오만을 일거에 무너뜨렸다. 표제작 ‘제후의 선택’을 비롯한 여러 단편의 놀라운 내용은 독자가 직접 확인하기 바란다. 몇몇 작품은 어른이라도 단박에 이해하기 어려울 만큼 깊이 있다. 또 이혼 가정, 우화로서의 전쟁 등을 소재로 쓴 단편들은 꽤 무겁고 진지한 편이다. ‘남주부전’처럼 일견 가벼워 보이는 이야기조차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아이를 한 인간으로 대하며 그에게 질문을 던지는 동화는 언제나 귀하다.
<불과 글>
조르조 아감벤 | 책세상
<불과 글>은 읽고 쓰기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가장 문학적인 방식으로 독자에게 전달한다. 아감벤은 옛날이야기나 자신의 경험담을 짧게 제시하고 나서, 이를 독서와 창작에 연관된 깊이 있는 사유로 이어나간다. 전형적인 에세이 구성을 따라서인지 책은 의외로 쉽게 읽힌다. 혹자는 출판사 서평이나 옮긴이의 말을 먼저 읽고 꽤 어려운 책이라는 인상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만만한 책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과 글>의 매혹적인 이야기와 문장은, 독자가 가진 철학 수준에 상관없이, 모든 이의 시적 감수성에 호소한다.
<릿터> 3호
민음사 편집부 | 민음사
단순한 문학잡지가 아니다. 창간호의 ‘뉴 노멀’을 비롯하여 ‘페미니즘’ ‘랜선-자아’ 등 지금껏 <릿터>가 커버 스토리로 다룬 이슈는 일반적인 문학 담론의 틀을 거뜬히 초과한다. 각각의 이슈를 길고 지루한 해설로 채우지 않는다는 점도 마음에 든다. 독자는 깊이 있고 읽기 쉬운 ‘플래시 픽션’과 전문가의 짧은 에세이들을 통해, 한국 문화의 키워드에 손쉽게 접근할 수 있다. 물론 진지한 소설과 시들이 보여주는 문학적 깊이 역시 훌륭하다. 게다가 이렇게 예쁜 문학잡지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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