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촌 한옥마을과 삼청동, 점잖던 이 동네가 어느 순간부터 관광버스에서 우르르 내린 관광객과 여행객으로 잠식당하기 시작했다. 끝도 없이 쏟아지는 인파를 피해 ‘양반 동네’의 고즈넉함을 만끽하고 싶다면 청와대가 보이는 사잇길, 팔판동으로 향해보자. 오래된 한옥이 약간의 ‘모던함’을 더한 새 얼굴로 새초롬하게 서 있다. 부티크 숍부터 우유 가게, 그리고 북 카페까지 다양한 취향을 만족시키는 재미난 곳들이 많다. 볕 좋은 날, 잘 안 쓰던 사진기 하나 꺼내 들고 걷기 좋은 길이다.
우노우노 부티크
남다른 부티크 숍
우노우노 부티크는 여러모로 남다르다. 강남 한복판에 있어야 할 비스포크가 한적한 팔판동에 위치한 것도 그렇고, 그나마도 이곳을 찾아가려면 청와대 앞에서 간단한 검문을 받아야 하는 까닭이다. “어디 가십니까?” “저기 슈퍼 앞 골목길 가는데요.” 이런 대화를 주고받은 후에야 목적지인 우노우노 부티크 앞에 도달할 수 있다. 코앞에 청와대가 보이는 주택가 골목에 덩그러니 놓인 이곳은 디자이너 김현권의 ‘없는 거 빼고 다 있는’ 부티크 숍이다.
테일러 숍이 아니라 부티크 숍인 이유는 남성복을 비롯해 여성용 코트, 파우치, 가방 등 청바지를 제외한 거의 모든 옷과 액세서리를 만들기 때문이다. 내구성 좋은 영국 원단을 사용해 자연스러운 드레이프와 패턴으로 세련되게 풀어내는 덕에 한 번 ‘거래’를 트면, 계속해서 단골손님이 된다고. 디자인도 멋지지만, 비싸고 좋은 부자재를 사용해 해가 바뀌어도 계속 새 옷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이 가장 큰 이유다. 일부러 찾아오지 않으면 발견하기도 힘든 팔판동 골목길에 들어온 지 1년 남짓.
김현권 대표는 팔판동을 걷는 출근길이 가장 즐겁다고 말한다. 테일러링을 기반으로 고급 기성복을 만들면서 독자적인 가방 브랜드까지 론칭하는 것. 팔판동 길을 걷는 동안 그의 머릿속을 채우는 생각이다. 이미 팔판동 인근의 신사들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됐으니, 그 꿈도 곧 이뤄질 것 같다.
주소 서울시 종로구 삼청로7길 19-6
문의 070-7762-0082
2분의 1 그라운드 카페
할머니의 한옥집
아주 옛날에, 할머니 댁에 놀러 갔을 때 이런 마당을 본 것 같다. ‘ㄷ’자 모양의 마당에는 나무가 한 그루 심어져 있고, 방문 틈으로는 촘촘하게 햇살이 들어온다. 어디선가 본 듯한 예쁜 마당이 있는 한옥은 2분의 1 그라운드 카페 대표의 할머니가 살던 곳이었다. 손자는 할머니 집을 요즘 젊은이들이 지나다가 한번쯤 들르고 싶은 공간으로 바꿔놓았다.
할머니의 손길이 닿은 기와, 기둥과 마당은 그대로 남긴 채 말이다. 팔판동 골목길 한가운데 위치한 정갈한 기와지붕 앞에선 저절로 사진기 셔터를 누르게 된다. 동네 고유의 매력을 한데 응축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넉넉한 양의 아메리카노를 홀짝이며 벽에 걸려 있는 그림을 감상하다 보면 꽤 괜찮은 갤러리에 온 것 같다. 팔판동을 산책하다 보면 반드시 걸음을 멈추게 될 찻집이다.
주소 서울시 종로구 팔판길 30-1
문의 02-765-1752
밀크
한국 과자점
팔판동 구석구석에는 서양식 과자점들이 많다. 마카롱이나 케이크 전문점이 많은 골목길에서 귀여운 젖소가 활짝 웃고 있는 한옥이 눈에 들어온다. ‘밀크’는 이름 그대로 우유와 우유로 만든 빵을 파는 곳이다. 물과 버터, 그리고 첨가제를 넣지 않은 우유로 만든 식빵이 이곳의 시그너처 메뉴다. 준수한 용모 때문에 매스컴에도 꽤 모습을 드러낸 차겨울 대표는 팔판동에서 한국식 디저트를 소개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정오부터 밤 9시까지 쉬지 않고 빵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일부러 시간을 맞추지 않아도 언제든 갓 나온 따끈한 빵을 맛볼 수 있다. 삼청동을 여행하다 이곳까지 발걸음을 하는 관광객도 꽤 되는데, 그때마다 한국에서만 맛볼 수 있는 빵과 음료를 선보인다는 것에서 자부심을 느낀다고. ‘밀크’의 우유는 고소하고 우롱차 향이 난다. 갓 구워낸 쫀득쫀득한 식빵과 함께 먹으면 아주 전통적인 방식은 아니지만, 그래도 한국의 맛이 입안 가득 퍼진다.
주소 서울시 종로구 팔판길 37
문의 02-735-7111
진선 북 카페
낭만 한옥
갤러리가 밀집한 팔판동 골목을 지나면 넓게 트인 정원이 인상적인 한옥집이 나온다. 20여 년째 삼청동과 팔판동을 가로지르는 초입을 지키고 있는 ‘진선 북 카페’다. 그러니까 삼청동에 볼 것이 별로 없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우직하게 그 자리에 있었다는 얘기다. 진선 북 카페는 ‘북 카페’라는 개념이 별로 없던 그 시절에 진선 출판사에서 만든 커피와 책을 함께하는 공간이었다. 재작년 리모델링을 해서 1층은 카페, 2층은 출판사로 사용한다.
햇살 좋은 날에는 마당에서 주전부리를 까먹으며 책을 읽고 싶어진다. 요즘의 ‘힙’한 카페와는 다르게, 오래된 친구네 집에 놀러 간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여행과 자전거 관련 책들을 주로 비치해 차를 마시며 책을 읽다가, 문득 짐을 꾸려 산책을 하러 나가게 된다. 감나무에 열매가 크게 열리는 10월도,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드는 11월도 이곳을 방문하기 좋은 계절이다. 카페 마당에서 미술관 길 뒷골목을 따라 청와대까지 걸으면 가을의 낭만을 온몸으로 만끽할 수 있다.
주소 서울시 종로구 삼청로 59
문의 02-737-5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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