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프 버클리 ‘그레이스(Grace)’
때는 2000년대 중반. 프랑스 칸에서 열린 미뎀(MIDEM) 행사를 통해 프랑스 남자 한 명을 알게 되었다. 그날 저녁 그의 제안으로 따라간 곳은 어느 건물에서 열린 파티장. 그 남자는 “너 와인에 대해 알아? 난 좀 알지?”라면서 와인 한 잔을 주고는 이내 사라져버렸다.
너무 ‘뻘쭘’해서 주위를 둘러보니 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웃음꽃 활짝 피우며 토크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특히 서양 남자에 둘러싸여 할리우드 여배우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고 있던 일본 여성의 얼굴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도저히 이 상황을 견딜 수 없었다. 화가 난 것은 아니었다. 그저, 나처럼 평범하게 생긴 동양인 남자는 그들에게 단 1%도 관심을 끌지 못한다는, 만고의 진리를 되새겼을 뿐이다. 아니, 어쩌면 내 소심한 성격이 문제였을 수도 있겠다.
낯선 이에게 말 한번 걸어볼 용기가, 예전이나 지금이나 내게는 부재하니까. 파티장을 빠져나왔다. 숙소로 향하는 길에 플레이어를 켜고 음악을 들었다. 아아. 나를 진실로 위로해주는 그 목소리. 마치 내 옆에서 “괜찮아, 친구. 삶은 계속될 거야”라고 얘기해주는 것 같았다.
이 음악을 들으며 숙소로 돌아왔다. 와인 한 병을 열어 잔에 부었다. 오로지 그의 목소리와 나만이 존재한 칸의 그날 밤을 잊지 못한다. 다름 아닌 음악의 힘이다. 지금도 이 음악, 가끔씩 꺼내 듣고, 언제나 감동받는다. 그 주인공은 바로 제프 버클리의 ‘그레이스(Grace)’.
기실 노래 가사는 긍정이라기보다는 부정에 가깝다. 그러나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중요한 건, 그의 목소리가 품고 있는 ‘결’ 그 자체다. 이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게 하나 있다면, 농담 하나 안 보태고 이 곡이 언젠가는 지겨워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나는 이 곡을 요즘에도 아껴 듣고, 또 아껴 듣는다. 내 인생의 BGM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배순탁(음악 평론가, <배철수의 음악캠프> 작가)글렌 굴드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 (Bach Goldberg Variations) BWV 988 (55)’
비 오는 날에는 동네 시립도서관에 가끔 간다. 비가 내려서 서가는 한적하기만 하고, 정체를 알 수는 없지만 한눈에도 유별해 보이는 사람들이 보통 사람은 절대 읽지 않을 두꺼운 책을 읽고 있을 뿐이다.
나도 그 옆에 앉아 책을 펼쳐놓기는 하지만 특별히 집중은 하지 않는다. 대신 창밖을 내다본다. 어느 시립도서관에는 나무가 꽤 많이 있으니까. 아마 도서관 정책상 도서관에는 나무를 심어야 한다는 법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번잡한 도시 중심에 있지만 초록으로 뒤덮인 도서관은 이질적인 장소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물론 그 순간에 음악을 듣는다. 책에 집중하지 않는 것처럼, 그저 귀에 빗소리처럼 음악이 들릴 뿐이다. 그럴 때면 평온함이 느껴진다.
마치 나만 세상에 떨어져 나온 듯한 기분이다. 비가 내리고 시립도서관에 있는 날에는 늘 글렌 굴드의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 BWV 988 (55)〉 음반을 들었다. 글렌 굴드는 오직 한 사람만 사랑하다 동정으로 죽은 피아니스트다.
가장 독창적인 피아니스트이고, 가장 많은 연주 앨범을 녹음한 클래식 피아니스트이기도 하다. 비 내리는 날, 이만큼 도서관과 잘 어울리는 음악은 없다. 어쩌면 이 음악을 듣기 위해 비 오는 날 도서관에 가는지도 모르겠다.
요즘은 나름 바빠서 도서관에 자주 가지는 않지만 대신 비가 내리는 날에는 이 음악을 듣는다. 그럴 때면 서가에 앉아 있는 괴짜들과 결국 다 읽지 못한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그리고 큰 창으로 내다보이는 비 내리는 풍경이 떠오른다.
생선 김동영(작가, 작사가)
#와인_좀마시는_칸동양남 #삶은_계속된다 #제프버클리의_결
#비올땐_한적한_시립도서관 #도서관은_정책상_초록초록해 #동정으로죽은_순정파피아니스트 #괴짜들의도서관
틴에이지 팬클럽 ‘라디오(Radio)’, 피쉬만즈 ‘나이트 크루징(Night Cruising)’
자전거를 타고 전국을 7번 정도 돌았다. 2002년 여름에는 무작정 해남을 향해 쭉 내려간 적이 있다. 나흘째 되던 날 비가 미친 듯이 왔다. 장대비 사이로 페달을 성실하게 굴렸고 폐가와 논밭이 소박하게 펼쳐진 작은 마을에 도착했을 때에야 비가 그쳤다.
젖을까봐 비닐봉지로 꽁꽁 싸놓은 MP3플레이어를 꺼내 음악을 틀자 일본의 인디 밴드 피쉬만즈의 ‘나이트 크루징’이 흘러나왔다. 널널한 리듬에 맞춰 몽환적 키보드 리프가 등장했을 때 물러가던 비구름 사이로 붉은 노을이 졌고 가로등이 켜졌다.
하늘은 보라색이었고 서울에서는 느껴본 적 없는 숨 막히는 정적이 손에 잡힐 듯 주변을 가득 채웠다. ‘업 앤 다운, 업 앤 다운 슬로 패스트’라고 외치는 첫 가사가 등장하던 순간의 전율을 잊을 수 없다.
또 하나, 2010년 ‘틴에이지 팬클럽이 내한하는데 간단한 통역 겸 수행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렇게 스코틀랜드 기타 팝의 험블한 왕자들을 공항에서 맞이했고, 밤에 마포 갈매기집에 데려가서 술을 먹였다. 밤새도록 3차, 4차를 외쳤는데, 베이시스트인 제라드 러브가 물었다.
“우리 노래 중에 뭐가 제일 좋아?” “(네 노래 중엔) ‘라디오’가 제일 좋아”라고 말했다. 옆에 있던 프랜시스가 “그 노래는 지난 2년 동안 공연에서 한 번도 안 했는데…”라고 말했다. 아저씨들은 다음 날 술기운 때문에 허스키한 목소리로 삑사리를 연발했다.
그러나 하이라이트는 남아 있었다. 공연 막바지에 BPM 160은 될 듯한 드럼 카운트가 들렸다. 틴에이지 팬클럽은 오랫동안 맞춰보지도 않은 노래 ‘라디오’를 엉망으로 불렀다. 드럼 박자는 계속 나갔고 보컬은 가사를 잊지 않으려는 듯 눈을 감았으며 리듬 기타는 몇 번이나 손을 절었지만, ‘라디오’는 내 인생 최고의 BGM으로 남았다.
박세회(<허핑턴포스트> 에디터)씨 없는 수박 김대중 ‘300/30’
넓고 좋은 집에 살고 싶은 건 아니었다. 다만 적당히 깨끗하고 깔끔한, 세련되고 단정한 공간에서 살고 싶었다. 하지만 언제나, 조금은 먼 얘기였다. 처음 자취했을 때는 보증금 없이 월세 8만원짜리 방에 살았다. 약 6.6㎡ 크기의 방에서 2년을 살다 군대에 갔다.
제대한 뒤엔 학생회실 구석에 소파 두 개 붙이고 먹고 자기를 1년. 수도가 어는 겨울에는 천원을 주고 교내 이발소에서 뜨거운 물로 머리 감았다. 졸업을 하고 회사에 들어갔을 때는 단골 술집 주인(!)이 이사한 전세에 남는 방 하나를 월 24만원에 빌려 살았다.
그나마 방 같은 방을 구한 건 서른이 넘었을 때다. 5백만원 보증금에 32만원짜리 원룸. 그곳으로 옮긴 지 7개월 정도 되던 크리스마스이브 아침, 직장에서 잘렸다. 출근 준비하다가 전화를 받았더니 “이제 그만 나와도 된다, 고생했어”라는 말을 들었다. 석 달 동안 보증금으로 월세를 돌려막다가 좌절해서 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2년 뒤, 약 49.5㎡ 크기의 빌라를 가까스로 구했다.
나는 ‘어떻게 살까?’보다 ‘어디에서 살까?’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대체로 선택권이 없다. 최근 급하게 이사해야 할 사정이 생겨서 몇 군데 집을 알아보러 다녔다. 오래전 날들이 떠올랐다. 보증금과 월세와 집의 위치와 방향과 구조를 살피다 보니 새삼 막막해졌다.
10년 전, 서울을 가로지르는 전철에서 창밖을 보다 “이렇게 집이 많은데 내가 살 데가 하나도 없다니”라고 중얼거린 적이 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열심히 달렸다고 생각했는데 멈춰보니 ‘똔똔’이다.
씨 없는 수박 김대중의 ‘300/30’은 옥탑방과 반지하를 훑으며 서울 집값 투어를 도는 포크 블루스다.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옮겨 다니는 서울살이들을 위한 BGM이라 할 만한데, 정작 그동안 집값은 더 많이 올랐다. 그러니까 요새는 죄다 반전세라고….
차우진(음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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