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사주는 파리의 골목과 골목을 연결하는 비밀스러운 통로다. 프랑스 대혁명 직후부터 1853년에 이르는 사이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전국에 50여 개가 생성될 정도로 유행했다.
마르크스주의자이자 문학 평론가이며 철학자이기도 했던 발터 벤야민은 파리에서 보낸 생의 마지막 15년을 파사주 연구에 몰두했다. 그는 자신이 사랑한 파사주를 ‘외면화된 거실’이라 불렀다.
파사주는 당시 소비문화를 주름잡던 신흥 부르주아의 사랑을 받기에 충분한 요소를 갖추고 있었다. 지붕이 있는 아케이드라는 공간적 개념을 넘어, 쇼윈도를 통해 들여다보고 소유할 수 있는 수준 높은 물건들이 있는 상점, 시끌벅적한 서민의 일상을 보여주는 술집과 극장이 공존하는 장소였다.
그러나 20세기 중반, 센(Seine) 지역 도지사를 맡은 오스만 남작이 파리를 새롭게 구획하는 사이 파사주는 설 곳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큰 골목을 중심으로 아케이드와 백화점이 들어서면서 소비의 중심이 옮겨갔기 때문이다.
여전히 파리에는 파사주가 존재한다. 전성기에 비하면 이를 데 없이 빈약해졌지만 말이다. 그리고 최근, 갤러리 비비안과 더불어 파리에서 가장 활기찬 분위기를 보여주는 곳이 바로 파사주 데 파노라마(Passage des Panoramas)다.
파사주 데 파노라마는 지금 트렌드를 주도하는 젊은이들의 아지트로 부상했다. 파리 사람들이 다시금, 파사주를 찾기 시작한 것이다. 프랑스의 컬처 주간지 <텔레 라마>는 파사주 데 파노라마를 취재해 ‘식도락가들의 엘도라도’라는 특집 기사를 내보냈다.
<미슐랭> 가이드북과 여러 음식 가이드북에도 파사주 데 파노라마의 기사가 실리니 그 인기를 충분히 가늠해볼 수 있을 것이다.
파사주 데 파노라마는 길이 133m, 너비 3.2m로 이루어졌다. 이곳의 터줏대감은 본래 오래된 우표와 주화를 취급하는 작은 가게들이었다. 지금은 다른 곳으로 이전하고 없지만, 과거에는 구 증권거래소와 프랑스 국립은행이 인근에 있었다.
시대가 바뀌며 우표와 주화를 모으는 수집가의 거래 무대는 점차 인터넷으로 옮겨갔다. 자연히 우표와 주화 가게에 드나드는 고객은 줄었다. 소상들은 비싼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하고 하나둘 자리를 내놓고 떠나기 시작했다. 그 빈 공간을 메운 이들이 지금의 파사주 데 파노라마를 부흥시킨 레스토랑과 베이커리, 카페다.
이들은 애타게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이미 수명을 다 한 듯 늙어버린 작은 파사주를 거침없이 꿰차기 시작했다. 파사주 데 파노라마에는 새로운 생명의 활기가 돋았다. 그 선봉에는 <미슐랭> 레드 가이드북에서 2스타 타이틀을 거머쥔 ‘파사주 53’ 레스토랑과 네오 비스트로의 대표 격이라 할 수 있는 ‘라신’, 이탤리언 레스토랑이자 카페인 ‘카페 스턴’ 삼총사가 있다.
본격적으로 파사주 데 파노라마로 미식 투어를 떠나보자. 미식 투어의 첫 순서는 입구에 위치한 빅토리아 스타시옹이다. 오래된 기차 내부를 콘셉트로 꾸린 식당으로, 가볍게 즐길 수 있는 피자 종류를 낸다. 빅토리아 스타시옹을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면 아르헨티나 스타일의 만두를 맛볼 수 있는 아르장티노 클라시코, 담백한 교자로 이름을 알린 교자 바 등이 이어진다.
모두 파사주 데 파노라마에 찾아온 주머니 가벼운 사람들이 배를 채울 수 있는 주전부리다. 대표적인 프랑스 요리 중 하나인 콩피 드 카나르(Confit de Canard)를 맛보고 싶을 때는 카나르 드 샹파뉴로 향하자. 기름기를 쏙 뺀 오리 고기 메뉴가 일품인 이 레스토랑에서는 30여 종의 샴페인도 곁들일 수 있다.
한층 더 고급스러운 프렌치 가정식을 원한다면 라신을 추천한다. 낡은 와인 가게의 간판이 방문객을 반기는 곳으로, 프랑스 전국에서 생산되는 작은 규모의 와이너리를 직접 발로 뛰며 찾은 와인들이 가득하다. 오랜 내공이 느껴지는 레스토랑 겸 와인 숍이다.
미식 가이드북 <푸디>가 선정한 세계 1백 대 레스토랑에 이름을 올렸을 뿐 아니라 미식가들 사이에 난 입소문으로 명성을 얻었다. 실제 프랑스 어느 가정의 식탁에 오를 법한 음식과 내추럴 와인들이 완벽한 궁합을 자랑하며, 가격도 합리적이다. 파사주 데 파노라마 외에도 루브르 박물관 근처에 2호점이, 뉴욕에는 3호점이 있다.
파사주 데 파노라마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파사주 53이다. 새하얀 외벽과 인테리어가 인상적인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으로 간결하고 미니멀한 생김새와 대비되는 음식을 낸다. 깔끔한 식재료들의 품격과 맛을 최고의 테크닉으로 끌어올린다.
일본인으로서는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미슐랭 2스타에 오른 신이치 사토 셰프가 주방을 지휘한다. 그는 스페인의 유명 레스토랑인 무가리츠, 파리의 미슐랭 3스타 레스토랑인 아스트랑스 등에서 일하며 예술에 가까운 기술을 체득했다.
당일 배송한 송로버섯(트러플)과 상큼한 과일 소스를 탱탱한 식감의 랑구스틴에 곁들인 요리 혹은 6시간 동안 저온에서 조리한 전복, 오징어 먹물 요리 등이 대표 메뉴다. 꽤 비싼 값을 지불해야 할 테지만 그만큼 훌륭한 음식을 경험할 수 있다.
파리에서 가장 멋진 이탈리아 커피를 즐기려면 카페 스턴을 찾자. 1834년에 모이스 스턴이 처음 문을 연 카페로 옛 인쇄소 자리에 들어섰다. 낡은 인쇄소였던 공간은 디자이너 필립 스탁의 손길을 더해 몽환적 분위기를 낸다. 카페 내부를 가득 메운 에스프레소의 진한 향기, 서정적인 멜로디의 음악은 시간이 멈추어버린 듯한 순간을 선사한다.
카페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미슐랭 스타 셰프로 활약 중인 마시밀라노 아라모의 이탤리언 파인 다이닝을 즐길 수 있는 레스토랑도 만날 수 있다.
상상해보자. 카페 스턴에서 진한 이탈리아 스타일 에스프레소를 달콤한 크루아상과 함께 마시며 아침나절을 보내는 거다. 또 라신에 들러 훌륭하기 그지없는 프렌치 가정식에 와인 한잔을 곁들이고, 글루틴 없는 빵을 만드는 노글루에 들러 상큼한 산딸기 케이크로 디저트 메뉴를 대신하며 점심 식사를 하고, 파사주 일대를 유유자적 걷다가 파사주 53에서 정교한 손길로 완성한 프렌치 파인 다이닝으로 방점을 찍는 하루를.
파사주 데 파노라마는 파리라는 거대 도시의 작은 뒷골목일 뿐이다. 하지만 파리의 그 어느 골목보다 호사스러운 하루를 보낼 수 있는 비밀스러운 뒷골목이다. 여행자의 여정에 감동을 주는 거리다. 파리에서 파리지엥이 된 듯한 기분에 흠뻑 젖고 싶다면, 파사주 데 파노라마로 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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