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들이 ‘첫사랑 수지’를 품고 산다면 여자들 가슴속에는 ‘첫사랑 성당 오빠’ 가 살고 있다. 두 눈 가득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사랑에 아파하는 청순한 남자. 반듯하게 잘생긴 데다 한 여자밖에 모르는 가련한 남자. 2000년도 데뷔해 지금껏 조현재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때문에 많이도 울었다.
검은 옷을 입은 사제로 분한 <러브레터>에서 여성들의 ‘성당 오빠 판타지’를 극대화한 채 연신 눈물을 떨궜고, <구미호 외전>에서는 특수 요원이지만 하필 구미호와 사랑에 빠지는 바람에 또 펑펑 울어야 했다. 그렇기에 이쯤에서 조현재의 최근작 <용팔이>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줄곧 사랑밖에 모르는 지고지순한 남자를 연기해오던 그가 갑작스레 악역을 맡았기 때문이다.
극 중에서 조현재는 모자란 것 없이 다 가진 재벌 2세지만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망으로 비뚤어져 어디 때릴 데도 없는 김태희에게 몹쓸 짓을 일삼았다. 정략 결혼을 한 채정안에게도 사랑인지 집착인지 모를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지난 드라마를 통해 벽 하나를 가뿐히 넘어버린 조현재는 홀가분해 보였다.
시청자와 평단으로부터 호평이 쏟아진 덕에 자신감도 얻었다. 집안 좋고 잘생긴 첫사랑 오빠 대신 다양한 인물을 제대로 연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다. 그는 그간 ‘멜로 전문 배우’로 살면서 잠시 멀어진 액션은 물론이고 복잡다단한 감정 연기에도 욕심이 난다고 말한다. 한 호흡 가다듬고 신인 배우의 마음가짐으로 새롭게 시작한 조현재는 지금 그다운 방식으로 반듯하게 일탈하고 있는 중이다.
드라마 <용팔이> 반응이 워낙 좋았다. 이후 ‘수트 입고 잘생긴 나쁜 놈’ 역할이 쏟아지지 않던가?
비슷한 역할이 들어오긴 했다. 연달아 악역을 하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타이밍이 잘 맞지 않았다. 작품 끝나고 한두 달 쉰 후 일을 할 수 있다면 참 좋겠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는다. 그래서 다들 좋은 작품 만나는 게 ‘인연’이라고 하나 보다.
악역은 처음이었나?
16년 연기 생활하면서 그런 악역은 처음이었다. 사실 드라마에서 내 이야기 비중이 크지 않았다. 그럼에도 많은 분들이 내 캐릭터를 기억하고 언급해줘 참 뿌듯했다. 사진 찍을 때 느꼈겠지만 내가 마냥 착하고 순하게 생긴 얼굴은 아니다. 그냥 가만히 있어도 ‘세 보이니까 힘 빼주세요’라는 요구를 사진가가 한다. 여태까지 보여줄 수 없었던 또 다른 내 얼굴이 드러난 거 같아서 희열을 느꼈다.
이 역할로 탄력받아 악역 전문 배우로 길을 닦았으면 어땠을까?
안 그래도 어느 방송에서 정웅인, 손병호 선배님 등과 나를 악역 전문 4인방이라고 소개한 것을 본 적 있다. ‘어? 내가 악역 전문이었나?’ 갸우뚱했다. 뭐든지 전문가가 된다는 건 좋지만, 굳이 ‘악역’에 한정되기보다 다양한 역할을 할 수 있는 포문을 열었다는 의미로 생각한다.
‘조현재’ 하면 주로 ‘첫사랑’이나 ‘청순가련’을 떠올린다. 아무래도 늘 사랑에 헌신적이고 순정적인 역할을 맡아서인 것 같다. 다른 연기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안 했나?
데뷔 초기에는 반항아 역할을 해보고 싶었다. 실제로 반항적인 남주인공이 등장하는 작품에 출연 계약을 했다. 그런데 막상 촬영이 시작될 때쯤, 원래 내 이미지로 돌아갔다. 대본이 전면 수정되고 이야기도 많이 바뀌었다. 나름 변신을 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한 채 20대가 흘러갔다.
결국 연출자나 시청자가 조현재에게 원하는 건 ‘순정만화 주인공’ 느낌이었다고 해석하면 되나?
그때는 그랬던 것 같다. 드라마 <구미호 외전> 역시 준비할 당시엔 터프하고 남성적 캐릭터를 연기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정작 내가 주로 연기한 지고지순하고 청순한 이미지, 눈물 많이 흘리는 남자를 원하시더라. 극 중 역할이 특수 요원이라 때리는 장면을 연습했는데, 맞는 장면을 더 많이 찍었다. 하하.
시대 흐름에 따라 유행하는 남자상도 달라진다. 예전 영화나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은 다 정의롭고 한 여자만 바라봤다면, 이제는 욕망에 솔직한 남자를 쿨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악역을 선택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변화의 흐름 속에서 조금씩 달라지는 나를 발견하고 싶었다. 앞으로 진로를 결정할 때 가장 먼저 염두하는 것 역시 ‘다름’이다.
눈물을 엄청 흘렸을 것 같다.
정말 많이 울었다. 몰입이 저절로 돼서 내가 생각해도 너무 운 작품도 있다. 내가 연기자로 주목받은 작품에는 김종학 감독님의 <대망>이 있다. 세자를 연기했는데 감독님이 울지 말라고 당부하셨는데도 눈물이 주룩주룩 흘렀다. 마치 내가 전생에 세자였던 것처럼. 하하.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고 연기에 임했다. 또 <러브레터>에서도 신기할 정도로 울었다. 하루에 세 번은 기본으로 눈물을 흘렸던 것 같다. 촬영장에 갈 때마다 울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제는 다른 사람을 울리고 싶나?
세월이 흘렀으니까. 이제는 좀 더 강한 남자를 연기하고 싶다.
그러고 보니 데뷔한 지 16년이 흘렀다. 정말 긴 시간 아닌가?
시간 참 빠르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늘 지금을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지만 문득 ‘16년 동안 더 많은 작품에 도전해볼걸’ 하는 아쉬움은 있다.
가리는 게 많았나?
그렇다기보다 고민하다 흘러가버린 것 같다. 생각 많이 하지 않고 다양한 작품을 만났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지금 작품 하나를 끝내고 다른 작품을 기다리는 중이다. 이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있나?
너무 바쁘다. 나 혼자 왜 이렇게 바쁜지 모르겠다. <용팔이> 끝나고 처음으로 독립했다. 그전에는 어머니가 집안일을 다 도와주셔서 신경 쓸 게 없었는데, 이제는 조그만 것도 혼자 다 해보려고 한다. 그러다 보니 규칙적으로 생활하고 있다. 일단 요리를 해야 한다는 게 엄청나다.
조만간 <나 혼자 산다>에 출연하겠다. 밥 해 먹는 건 정말 일이다. 먹으면 치워야 하고.
일 중의 일이다. 최근 기본적인 반찬과 국 만드는 걸 배웠다. 여태까지 내가 재벌 2세와 왕 역할을 많이 해서 이런 생활 이야기를 하면 다들 어색해한다. 20대 때 못 해본 소소한 것들을 지금에서야 하나씩 하고 있는 기분이다.
제일 자신 있는 요리는?
찜닭, 닭볶음탕 그리고 묵은지 고등어찜은 정말 맛있게 할 수 있다.
오, 수준급이다. 혼자 요리하고 또 뭘 하나?
운동은 습관처럼 한다. 내가 올해 서른일곱 살인데, 나이 핑계 대고 싶진 않지만 정말 가만히 숨만 쉬고 앉아 있어도 살이 찐다. 운동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다. 하하. 그리고 영화를 많이 본다. 최근 <곡성>을 보고 충격받았다. 짜임새 있는 연출력과 혼이 담긴 연기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그동안은 영화보다 드라마에 무게를 많이 뒀다.
영화계에서 나를 좀 많이 봐줬으면 좋겠다. 하하. 작은 역할도 괜찮고, 생각보다 다양한 역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아무래도 주연을 많이 해오다 보니 영화 쪽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을 한정 짓는 경우가 많았다. 사실은 그렇지 않은데 말이다. 많은 분들이 <아레나>를 보고 그런 생각을 깨버리시길 바란다. 하하.
이렇게 의욕과 자신감이 넘치는데 아직 정해진 작품이 없어서 초조하지는 않나?
밥 해 먹고 집을 치우다 보면 하루가 금방 가는데, 자기 전에 누워서 생각한다. 내가 이래도 되나? 이렇게 하루를 보내도 되나? 하하. 그럴 땐 지금의 소속사 대표님에게 전화한다. “대표님, 저 이래도 될까요?” 물어본다.
그래도 된다고 하시나?
양보다는 질에 집중하라고 얘기해주신다. 물론 많은 작품을 하고 싶은 욕심도 생기지만, 이제는 비중이 적더라도 제대로 된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이 더 크다. 너무 초조하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래도 올해 가기 전에는 뭔가 해야 하지 않을까?
당연히 올해 안에는 보여줄 계획이다. 어떤 작품을 만나게 될지 기분 좋게 기다리고 있다. 분명 더 좋아질 거다. 많이 홍보 좀 해달라. 신인의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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