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했다. ‘세계는 한 권의 책이다. 여행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 책의 한 페이지만 읽는 것과 같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4세기 인물이 여행의 정수를 꿰뚫었다. 21세기엔 숱한 페이지를 넘길 기회가 널려 있다. 이번에 새로운 페이지를 넘겨볼 기회가 생겼다. 베트남 사파라는 미지의 페이지.
물기 머금은 더운 공기가 덮쳐온다. 하노이 노이바이 국제공항 출입문을 사이에 두고 온도 차가 극심하다. 가이드가 오길 기다리며 둘 사이를 오간다. 베트남의 더위에, 아니 하노이의 더위에 몸을 맞춰야 한다. 호찌민과는 또 다르다. 호찌민은 여느 동남아처럼 작열하는 태양의 기운이 가득하다. 하노이는 습식 사우나에 들어앉은 듯하다. 여행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는 게 실감난다.
사파는 처음 들어본 지명이다. 하노이도, 호찌민도, 다낭도 들어봤는데. 아는 사람만 아는 베트남의 명소다. 북베트남을 지배한 프랑스 사람들이 조성한 휴양지다. 해발 1,650m 고산 지대로 더위 피해 올라간 거랄까. 프랑스 사람이 떠나고 이젠, 전 세계 사람의 휴양지가 됐다. 베트남 사람들에게도.
사파 여정의 시작은 하노이다. 하노이는 호찌민 묘가 있는 곳이자, 강으로 둘러싸인 베트남의 수도다. 사파는 그보다 북쪽이다. 지도상 중국과 맞닿은 국경과 근접한다. 사파에 가려면 우선 라오까이로 가야 한다. 하노이에서 라오까이까지는 보통 기차를 탄다. 자그마치 9시간이나. 대부분 야간열차를 선택한다. 유라시아철도는 아니지만 기차 침대칸의 낭만을 기대하면서.
날이 지고, 잠시 비가 내린다. 어둠 속 불빛이 습도 머금은 공기에 굴절된다. 홍콩의 불빛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불빛을 뒤로하고 기차에 탄다. <다즐링 주식회사> 보고 꿈꾼 열차 침대칸 여행을 베트남에서 이룰 줄이야.
침대칸은 4인실과 2인실이 있다. 2인실은 4인실을 두 명이 쓰는 형태다. 침대와 그 위 침대가 양쪽으로 마주 보는 공간. 가운데 협탁 같은 선반도 달려 있다. 그 위에 놓인 바나나와 비스킷이 정겹다. 의외로 아늑하다. 마음 맞는 친구와 위스키 기울이기 좋은 분위기다. 위스키 대신 베트남 맥주 333을 마신다. 규칙적인 선로 진동에 취기가 섞이자 눈이 감긴다.
라오까이역에 도착한다. 사파의 관문이지만, 아직 사파에 도달하려면 멀었다. 다시 버스를 타고 1시간 정도 달린다. 대관령 고갯길 같은 길을 돌고 돌며 올라간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풍광이 바뀐다. 사파가 장막을 하나씩 내리며 방문객을 맞는다. 그 사이사이 다랭이논이 하나둘 막간 쇼처럼 눈길을 호객하기도 한다.
사파는 작은 곳이다. 도시보다 마을이 어울린다. 마을 중간에는 광장이 있다. 주변으로 길이 여러 갈래 뚫려 있다. 골목 같은 길 양옆에는 여행자를 위한 가게도 늘어서 있다. 사파의 첫인상은 인도 올드 마날리와 비슷하다. 올드 마날리는 인도의 혹독한 더위를 피해 자연과 벗 삼아 쉬는 곳이다. 사파 역시 그런 곳이다. 뾰족한 침엽수가 마을을 호위하듯 두른다. 그 뒤편으로 산과 구름이 마을을 감싸 안는다. 건물 구석구석 산악 마을의 소박함이 스며 있다. 칠 벗겨진 벽면마저 편안해 보인다. 호흡이 한결 편해진다.
사파에 오면 누구나 산악 마을 트레킹을 경험한다. 고산족 마을을 방문해 그들의 삶을 겪어본다, 라고 하면 거짓말이다. 그냥 본다. 자갈만 한 손에 천 팔찌를 여러 개 쥐며 장사하는 아이를 본다. 그 등에 업힌 젖먹이의 눈을 본다. 관광객에게 호객하는 장사치를 본다.
그 옆 다랭이논에서 일하는 농부를 본다. 지나가는 개도 본다. 닭도 본다. 우리 속 돼지와 오리도 본다. 이 모든 걸 품은 자연을 본다. 어쩔 땐 평화롭고, 어쩔 땐 치열하다. 그 사이를 걷는다. 어떤 생각이 뜨고 질까? 그 생각을 하나씩 펼쳐보는 게 사파 트레킹의 본질이다.
물론 생경한 풍광을 보는 재미도 있다. 깟깟 마을이 그중 최고다. 깟깟 마을은 사파의 대표적 고산족 마을이다. 물론 관광 자원으로 ‘리모델링’된 부분도 눈에 띈다. 하지만 좁은 산길 따라 자리 잡은 마을 구조는 태생적으로 독특하다. 비탈길 따라 내려가다 만나는 폭포는 트레킹의 절정으로 손색없다. 환경이 특별하기에 보존하고 발전시켰으리라. 해서 볼거리가 다른 마을보다 풍성하다. 자연과 고산족 생활에 양념 약간 뿌린 셈이다. 덕분에 더욱 맛깔스럽다.
아래로 내려가 고산족 마을을 봤으니 위로도 향한다. 목표는 함롱산. 사파의 또 다른 관광 코스다. 역시 걷는다. 사파에서 걷는다는 것은 보는 것과 동의어다. 함롱산은 기묘한 산이다. 관광객이 주로 가는 코스는 동네 뒷산처럼 가볍게 다녀올 수 있다. 단 풍광은 동네 뒷산과 비교할 수 없다. 중국 무협지 영산 같으면서도, 중세 판타지 영화 배경 같기도 하다.
고산지대의 산이니 안개 같은 구름이 걸쳐 있기도 하다. 기암괴석에 특수효과까지 가미됐으니 걷다 보면 미궁 같은 기분도 든다. 그러다 사파 시내가 한눈에 보이는 장소가 나타난다. 구름은 발밑으로, 바람은 이마 위로 흐른다. 흘린 땀이 아깝지 않은 순간이다.
함롱산에서 내려와 연유 듬뿍 들어간 베트남 커피를 홀짝인다. 지독한 달콤함이 노곤해진 몸을 깨운다. 카페 앞으로 외국인 한 무리가 지나간다. 그들은 본격적인 등산 복장을 입었다. 함롱산 외에도 사파에는 더 높이 오를 산이 있다. 사파에서 깟깟 마을과 함롱산을 들르면 초급반은 이수한 거다. 그들은 중급반인 셈이다. 며칠 더 묵으면 그들과 함께하려나.
더 높은 산을 타는 대신 스쿠터를 빌린다. 동남아에서 스쿠터는 또 다른 발 같은 존재다. 여행객도 이용하기에 편하다. 값도 싸다. 기름 좀 채우고 가이드 따라 스로틀을 개방한다. 도심이 아니기에 극악할 정도로 스쿠터가 많지 않다. 스쿠터 초보도 용기 낼 만하다. 도로도 의외로 깔끔한 편이다. 적당히 굽이진 도로를 따라 위로, 위로 올라간다. 풍광은 더욱 녹색으로 짙어지고, 기온은 점점 여름에서 가을로 변해간다. 새로운 여행이 열린다.
사파를 떠나는 길은 시작의 역순이다. 다시, 라오까이 기차역으로 향한다. 역시 9시간 동안 야간열차 침대칸을 타야 한다. 333 맥주를 들이켜며 할 이야기가 많다. 파울로 코엘료는 이렇게 말했다. ‘여행은 언제나 돈의 문제가 아니라 용기의 문제다.’ 여행을 사파로 바꿔본다. 사파는 이야깃거리를 풍성하게 들고 나올 만한 여행지다. 그런 곳은 보통 용기가 필요하다. 빼곡하게 채워진 사파라는 페이지를 다 읽고 나니 복습하고픈 의욕이 차오른다. 아직 못 읽은 구절이 너무 많다.
베트남 사파에 가는 가장 당연한 방법
베트남항공은 한국과 베트남을 주 46회 연결한다. 인천에선 하노이, 호찌민, 다낭 주 32회, 부산에선 하노이, 호찌민 주 14회 운행한다. 그러니까 베트남이 목적지라면 베트남항공은 당연한 선택지다. 특히 인천-하노이 노선에는 에어버스사의 신형 항공기 A350-XWB도 만날 수 있다. A350의 비즈니스석은 각 좌석마다 좌우가 담 같은 형태다.
자기만의 독립된 공간에서 여행의 시작과 끝을 맞이할 수 있다. 대나무 색으로 처리해 전체 분위기가 편안하다. 비즈니스 클래스가 아니더라도 딜럭스 이코노미 클래스도 있다. 7인치까지 등받이가 젖혀지고 좌석 사이도 넓다. 전기 충전과 USB 포트, LED 조명은 이코노미 클래스도 구비했다. 사파행이 시작부터 여유로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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