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색 문을 열고 들어서니, 빨간 바지를 입은 건축가 문훈이 반겨주었다. 그의 공간에서는 빨간색이 두드러진다. 누군가는 부담스러워하는 강렬한 색. 더군다나 무책색이 가득한 서울에서는 보기 드문 색. 하지만 문훈은 그런 빨간색을 고집한다. 아니 요즘에는 분홍색을 사용하기도 한다. 한국적인 사이키델릭함을 건축에 녹여내는 그의 역량은 독특하다 못해 경외감이 든다. 그는 건축을 영화와 결합하고, 건축을 일러스트로 표현하기도 한다.
그에게 건축은 유희의 대상인 듯 건축 그 자체가 즐거움으로 느껴진다. 그의 건축물들을 모두 찾아가 볼 수는 없었지만, 사무실에 마련된 모형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유쾌했다. 우리는 인터뷰를 하기 위해 그의 사무실 옆에 있는 작은 치킨집으로 향했다. 그는 한 손에 하얼빈에서 사온 중국 술을 들고 있었다. 향이 깊은 술이었다. 마실수록 웃음이 잦아졌고, 기사에 담을 수 없는 대화가 넘쳐나는 요술 같은 인터뷰였다. 웃다 보니 문훈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제는 건축도 재미있어야 하고, 그래서 지금이 문훈의 시대라는 것을 말이다. 중국 술을 다 마실 때까지 인터뷰는 진행됐다. 술병은 빨간색이었다.
싱글맨
직원 하나 없이 혼자 일했다고 들었다.
처음에는 직원이 둘 있었다. 월급은 적게 주는데, 일이 없어서 못 데리고 있겠더라고. 그래서 직원들 내보냈다. 그런데 혼자 일을 할 수가 없다. 숨은 얘긴데, 실무를 오래 쌓은 여자 프리랜서가 있다. 그분이 거의 모든 도면 작업을 했다. 사무실에 혼자 있는 것은 맞는데 실사 도면은 그분의 도움을 받았다.
인터넷이 활성화되면서 본격적으로 문훈의 이름이 알려졌다. 그러면 유명해지기 전까지 홀로 4년을 버틴 건가?
혼자 4년을 하는데, 망하지 않은 게 특이하지 않나? 사무실을 접어야 하는데, 안 접어. 그래서 괴짜라는 말이 나온 것 같기도 하다. 근데 더 놀라운 것은 그때도 먹고살았다는 점이다. 혼자 일하면서 집에 월급 갖다 주고, 할 거 다 했다.
문훈의 더 특이한 점은 결혼하지 않은 싱글처럼 자유분방해 보이는데, 의외로 집에 엄청 잘하는 남편이자 아버지라는 점이다.
잘하는 것은 아니다. 작업은 아방가르드를 지향하는데, 인생살이는 보수적이다. 겁도 많고.
지금 사무실로 옮긴 지는 얼마나 됐나?
5년째다. 처음 역삼성당 옆에서 시작해 논현동에서 점집 같은 사무실을 운영했다. 그다음 옮긴 곳이 여기다. 논현동 점집 때는 혼자 있었다. 직원이 많을 때는 3명까지 있었고. 그런데 그 좁은 공간에 4명이 있으니 너무 불편했다. 여기도 빨간 박스를 왜 만들었겠나? 혼자 일하려고 만들었다.
집은 어떤가? 집 안 인테리어도 문훈의 빨간색이 두드러지나?
신혼 때는 정말 잘 꾸몄다. 그런데 애가 생기고 나니까 아내가 모형을 다 치우라고 했다. 그래서 집은 포기했다. 집은 아내와 아이의 공간이라서 터치 안 한다.
지금도 빨간 바지를 입고 있는데, 빨간색을 자주 사용하는 이유는 뭔가?
빨간색이 보여야 좋다. 약간 흥분된 상태라고 할까? 대학 때 사진을 보니 빨간 재킷을 입고 있더라고. 미국 유학 가서는 더 자주 입었다. 왜냐하면 동양인에 대한 편견 때문이었다. 말 잘 듣는 너드 이미지 말이다. 그렇게 보이지 않으려고 프레젠테이션 때 문짝 네 개를 구해다 빨갛게 칠해놓고 시작했다. 그 당시 빨간색이란 나를 보호하는 동시에 드러내는 장치였다. 또 내가 좋아하는 색이라 그 파장이 나와 맞았던 거고.
건축에서도 빨간색이 엿보인다.
많이 썼다. 내부를 완전 빨갛게 칠했다. 모든 주택에 빨간색을 사용했다. 건축주들이 빨간색을 칠해달라고 했다. 빨간색을 많이 써서 요즘은 분홍색으로 바꾸고 있다. 마젠타와 형광 옐로의 조합이 좋아졌다.
색에 대한 취향은 나이를 먹어서 바뀌는 건가?
사이키델릭해지는 거다. 무당 옷을 생각해봐라, 노란 숄에 분홍색! 죽이지 않나? 그런 사이키델릭함은 매우 한국적인 거라 생각한다. 서양에서 교육을 받고, 살았다고 해도 내 안에는 매우 동양적인 성향이 내재되어 있는 거다. 그래서인지 국악을 들으면 리듬에 반응하고, 사고방식도 직관을 따른다. 논리적이지 않은 전형적인 한국인에 가깝다.
호주의 화가
중학교 때 호주에서 살았는데, 호주의 생활이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 같다.
아버지가 지질학자인데 박사 학위를 받으러 호주에 가셨다. 그때 아버지를 따라 갔다. 그렇게 호주의 태즈메이니아란 섬에서 잠깐 살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호주에서 다닌 학교에 다시 가본 적 있나?
2010년에 호주 여행을 할 수 있는 스폰서십을 받았다. 한 달 동안 퍼스만 제외하고 호주의 반을 돌았다. 옛날 교정도 보고, 좋았다. 태즈메이니아에 대한 향수를 느껴 늘 가고 싶었는데, 막상 가보니 상상에 못 미치더라. 감동의 물결을 기대했는데, 그 정도는 아니었다.
그림도 잘 그리는데, 혹시 화실 다닌 적 있나?
없다. 화실은 안 다니는 게 좋다. 내 그림은 굉장히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의 펜터치는 아니다. 그런 사람들은 구조가 있는데, 내 그림은 제멋대로거든. 초등학교 때 그림을 그려 전국대회에서 상을 탄 적 있다. 아주 드문 상이었다. 다른 건 모르겠지만, 그림에 대한 재능은 있었던 것 같다.
언제부터 그림을 그렸나?
4세 때 부터다. 그때 그린 그림들을 아버지가 사진으로 찍어뒀다. 근데 어린이 그림치고는 꽤 정밀하다. 창들을 나누고, 그 안에 사람을 그렸다.
호주에 가서도 4B 연필로 그림은 계속 그렸고?
호주에서는 수채화를 그렸다. 호주에서 첫 미술 수업이 기억난다. 정해진 것 없이 아무거나 하면 됐다. 정말 좋은 나라구나 싶었다. 그래서 방학 동안 그린 그림을 미술 선생님께 보여줬더니, 전시를 해주겠다고 했다. 선생님이 전시를 해준다는 말은 생전 처음 들었다. 감동 받았지. 도서관에 그림을 스물몇 점 전시했는데, 희한하게 거의 다 팔렸다. 그것도 신기하더라. 선생님들과 학부모들이 개당 20달러에 사줬다. 그러면서 내가 그림 좀 그리는 애라고 학교에 알려졌다. 부잣집에서 전화가 오고, 50달러씩 받고 그림을 그려줬다. 그러다 아버지가 이제 한국 가야 하는데, 남을 거냐고 내게 물어보시더라. 호주에 남았다면 내 인생이 바뀌었을 거다. 혼자 있기에는 겁이 나서 그냥 왔다.
장순각 교수의 건축가 재정립
인생은 끝없는 공사의 시작이다. 우리는 자신만의 성을 지으며 살아가고, 공사를 한창 진행하고 나서야 깨닫곤 한다. 더 나은 건축 방식이 있었다는 것을. 건축가 장순각이 유별난 성을 짓고 있는 건축가들을 만나 그들의 건축 인생을 구성하는 재료와 방법에 대해 묻고 답하는 시간을 가진다.
만일 호주에 남았다면, 건축가가 됐을까? 화가가 됐을까?
화가가 안 된 게 다행이다. 먹고살기 힘들잖아. 그리고 화가는 안 됐지만 작품은 많이 팔았다. 그림 팔면 화가지 뭐. 오히려 화가였으면 고민하느라 지금처럼 못 그렸을 거다. 건축가니까 아무 생각 없이 그림을 그릴 수 있지. 트렌드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어서 좋다는 거다.
지금 소장하고 있는 그림은 몇 장이나 되나?
정확하진 않은데, 몇백 장 정도 될 것 같다. 혼자 일할 때 주로 그렸는데, 2010년부터 2012년까지 집중적으로 많이 그렸다. 그때는 내게 욕망이 있었다. 필사본 하나밖에 없는 책을 만들자는 생각으로 많이 그렸던 것 같다. 지금도 그리고는 있지만, 그때 더 집중적으로 한 거지.
강원도의 시골, 호주의 섬, 서울에서 유년기를 보낸 것은 굉장한 경험이다.
아버지가 지질학자였다는 게 중요한 건 아니다. 억압이 없었다는 게 중요하다. 아버지가 내게 뭘 하라고 강요한 적 없다. 맞은 적도 없다.
문훈의 그림은 재미있다. 해외에는 어떻게 팔게 된 건가?
베니스 비엔날레 때 팔았다. 나는 사실 베니스에는 관심이 없었고, 포르투갈에 여행 가고 싶었다. 비엔날레는 오프닝만 보고, 다음 날 바로 떠났다. 솔직히 전시 보는 걸 안 좋아한다. 루브르 박물관도 10분 이상 못 있겠더라. 그렇게 포르투갈에 갔는데 내 그림이 1등을 했다고 연락 와서 그림 설명을 해달라고 하는 거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내 그림에 관심을 보였고, 베를린에서도 구입한다고, 베를린으로 와달라고 하더라. 그래서 운전해서 베를린까지 갔다. 그때 처음 내 그림이 해외에 팔린 거다. 그렇게 그림이 팔리면서 점차 내 이름이 알려졌고. 나중에 시카고에서도 전시했다. 처음 그림을 팔 때는 내 새끼 같아서 아까웠는데, 누가 잘 보존해주겠다고 해서 팔기로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림을 팔았으니까 화가다. 화가가 되려고 한 적은 없는데 얼떨결에 된 거다.
스피드광 드라이버
보통 건축가는 현장에 갈 때, 비행기를 타고 현장 근처까지 이동하는데, 문훈은 운전해서 현장까지 간다고 들었다.
운전을 엄청 좋아한다. 1년에 60,000km를 달린다. 남해에 갈 때는 평균적으로 150km/h로 달린다. 워낙 속도를 좋아해서 그렇다. 독일 다녀오면서부터 그랬다. 독일에서 4,500km를 여행했는데, 아우토반에서는 독일차로 달렸다. 달리면서 한국 가면 독일 차를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운전을 워낙 좋아하다 보니 도로에서 배틀도 붙고 그런다. 누가 뒤에서 빠르게 추월해가면 나도 쫓아간다. 어제도 오후 4시쯤 나가서 7시까지 운전했다. 그냥 밟히는 대로 간다. 수원 갔다가 평택 들러서 돌아오는 크루징인데 그 느낌이 참 좋다.
지금은 무슨 차를 타나?
640i를 탄다. 예전에는 428i M을 탔는데, 그 차를 샀다가 아내한테 된통 혼났다. 그리고 중고 에쿠스까지 차가 두 대이다 보니 스트레스가 쌓였다. 쓸데없이 주차비가 두 배로 나온다고, 갑부도 아닌데 차가 두 대나 되냐는 소리를 들었다. 428i M을 1년 타고, M4로 바꾸려고 했다. 근데 아내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난감했다. M4를 사서 튜닝했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판매점에 가보니까 6시리즈도 괜찮더라. 640i는 내부가 넓으니까 안정감 있고, 아내도 속일 수 있어서 산 거다. 차에 대한 내 이야기는 이게 전부다. 운전할 때는 사실 스피드를 즐기는 편이다.
운전 외의 취미는 술이지?
좋아하지. 혼자서도 먹는다. 독한 술을 좋아하는데, 요즘 술이 약해진 것 같아서 맥주 한 병 또는 소주 한 병 마시고 집에 간다. 더 이상은 안 먹으려고 한다. 하지만 치매에 걸리기 싫어서, 필름 끊기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필름이 끊기면 기분이 엄청 나쁘다.
MIT와 건축상
대학 시절 경쟁률이 심한 공모전에서 대상을 탔다. 공간학생건축상이다. 정말 실력으로만 탈 수 있는 상이었다.
중요한 것은 나 혼자 한 게 아니란 거다. 선배가 ‘꼼뻬(경쟁 설계)’를 하자고 했다. 88올림픽공원을 리모델링하는 꼼뻬를 둘이 합작했다. 그리고 2006년에 한국건축가협회상을 탔다. 건축 ’하면서 유일하게 탄 상이다. 내가 상을 신청한 건 아니고, 다른 소장님이 나를 추천했다. 나는 그런 상이 있는 줄도 몰랐다. 남이 대신 신청해서 얼떨결에 탔다. 상 받은 게 싫은 건 아니다. 상은 달라고 신청해야 하는데, 나는 달라고 한 적 없고, 앞으로도 안 그럴 거다. 상은 알아서 줘야지, 왜 받으려고 신청하나? 대학도 얼떨결에 갔다.
공부 잘했다고 하던데?
아니다. 공부 못했다. 호주 살다 고등학교 때 한국 와서 시험을 봤는데, 56등을 했다. 내 밑에 하키부 2명이 있었다. 중1 때 호주에 갔다 고1 때 돌아왔으니까. 뭘 알겠나? 아버지는 도와주는 성격도 아니었다. 그래서 3년만 외국에서 지내면 가능한 정원외전형이라는 외국인 특혜도 못 받았다. 불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건축과를 가야겠다는 생각은 있었다. 미대는 가기 싫었다. 볼펜으로 그림을 그리는데, 미술 선생님이 나보고 뭐라고 하더라. 왜 볼펜으로 그리면 안 되는지. 화가 나서 샤프로 그렸다. 미술은 경직되어 있었다. 그래서 가고 싶은 대학을 정하지 못했다. 그때 친구가 인하대학교 화공과에 원서 사러 갔다 건축과 원서도 사왔다. 나한테 줘서, 썼는데 붙었다. 어쨌든 두 개의 상은 내가 원한 게 아니었고, 대학도 운이 좋아서 들어갔다.
1990년대 초에 MIT에 석사 공부를 하러 간다는 게, 당시로서는 보통 특이한 게 아니었다.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어렸을 때 외국에서 살았기 때문에 외국 교육이 더 낫다는 것을 알았다. 학생을 자유롭게 내버려둔다는 걸 알았다.
그 당시와 지금 MIT는 많이 다른가?
그때는 건축 자체가 사회주의적이었다. 그러니까 MIT라는 학교의 건축학풍이 히피 영향을 받았다. 히피 문화와 소셜리즘이 섞여 있었다. 그래서 다분히 동양적이어서 나는 별로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동양에서 온 동양인이, 동양적인 걸 하고 있으니 재밌을 리가 있나. 사실은 잘못 간 거지. 반대로 말하자면 마찰계수로 버티는 거였다.
문훈의 건축도 겉은 자유로워 보이지만 내부를 자세히 뜯어보면 건축의 도덕성이 발견된다.
굉장히 기능적이다. 굉장히 자유롭지만 반대되는 부분이 있다. 자유로운 부분이 있지만 건축을 위한 부분도 신경 쓴다. 건축주들은 내가 그들이 원하는 점을 맞춰주는 걸 보면서 놀란다. 당신들 집이니까 당연히 수정하는 건데, 내 마음대로 할 줄 알았다고들 한다. 매우 기능적이고 실용적인 지점에서 출발한다. 그렇다고 내 욕망을 거세하는 것은 아니다.
요즘은 주로 주택 작업을 하고 있나?
주택은 많이 줄였다. 지금 7개 프로젝트 중에 주택은 30% 되는 것 같다. 주택 비율을 그 이하로 줄이려고 한다. 주택이 많으면 복잡하고, 설계비도 한계가 있다. 굳이 주택 설계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고, 설계를 4~5개 정도 하고 싶어서 그런다.
최근 작업을 검색해보니, 핑거프린트라는 건축이 있더라. 너무 독특해서 설명이 필요하다.
지금 작업 중인 핑거프린트는 영등포에 짓는 50m짜리 타워다. 그 지문은 건축주의 것이고, 작업에 대한 찬반은 있지만 어쨌든 내게는 매우 중요한 프로젝트다. 초대형 건물은 아니고, 약 330.5㎡짜리다. 대지 약 79.3㎡에 짓는 협소 타워다. 제일 작은 타워고, 지어놓으면 꽤 재미있는 건물이 될 거다. 작은 규모가 이렇게 커지는 경우는 거의 없거든.
유쾌하다. 이제 앞으로 문훈의 시대가 올 거다.
겸손하려는 건 아니지만 나는 잘 모르겠다.
운이 좋은 것 같다. 솔직히 설계는 재미있고, 지금도 새로 계약하면 흥분된다. 집에 가서 정신없이 그림도 그린다. 이틀이면 아이디어가 나오고, 그동안 무언가를 마구 그려낸다. 그러니까 설계와 연애질하는 거다. 아직까지는 그렇다. 무척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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