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 아니면 도일 거라고 생각했다. 대화가 잘 통하면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면서 웃을 수 있을 것이고, 대화가 막히면 길고도 불편한 침묵에 휩싸일 거라 예상했다. 이게 다 매체를 통해 접한 선입견 때문이다. 집 앞 식당에서 코끼리 본 이야기를 담담하게 들려주던 모습이나 상어를 주제로 자작곡을 부르던 모습, 애장품 경매 행사에서 실제 크기의 신호등을 아무렇지 않게 가져온 모습 등. 몇 년이 흘러도 잊히지 않는 강렬함 때문에 이상우를 많이 오해하고 있었다. 실제로 그는 진지한 말투로 사람들을 웃겨놓고 혼자만 쏙 빠져나오는 재밌는 남자다. 게다가 질문 하나를 던지면 성심성의껏 막힘 없이 대답을 쏟아냈고, 심지어 말도 잘했다. 이날 촬영장에서 그가 가장 많이 한 말은 “천천히 해볼게요”였다. “나 자신을 믿고 상황에 집중하면 느리더라도 모두를 만족시키는 컷을 건질 수 있어요. 제가 한번 천천히 만들어볼게요.” 정말 그랬다. 느리지만 정확하게, 그는 결국 원하는 포즈를 만들어냈다. 남들 앞에서 발표 한번 해본 적 없던 수줍은 남자가 주말 안방극장을 주름잡는 연기자가 될 수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시간에 쫓기지 않는 이상우는 차분하게, 자신의 때를 기다렸다. 그렇게 그는 자신의 인생을 주말 드라마보다 더 멋진 드라마로 만들었다.
최근 몇 년 동안 우리는 주말마다 이상우를 보게 됐다. 쉬지 않고 계속 주말 드라마에 출연 중이기 때문이다.
주말 드라마는 호흡이 워낙 길다. 한번 촬영이 들어가면 금방 7~8개월이 지나간다. 드라마 끝나기 2개월 전부터 다음 작품 제안이 들어오는데, 결정을 하면 쉬지 않고 곧장 또 촬영이 시작된다. 그래서 어떻게 하다 보니 방송국 3사의 주말 드라마를 차례로 돌고 있다. <부탁해요, 엄마> 끝나고 쉬려고 했는데, <신들의 만찬> 감독님과 작가님이 <가화만사성>에 출연을 부탁하셨다. 당시 힘들었지만 재미있게 촬영한 기억이 있어 기꺼이 출연했다. 그런데 역시나 힘들더라. 하하.
주말 드라마 특성상 캐릭터가 정형화될 수밖에 없다. <가화만사성>에서는 ‘자유분방한 의사’ 역할을 맡았다. <부탁해요, 엄마>에서 연기한 ‘호탕하고 남성미 넘치는 건축가’와 어떤 점이 다른가?
사실 주말 드라마 속 남자 주인공은 디테일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대체적인 느낌은 비슷하다. 역할이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아까 촬영할 때 봤겠지만, 나는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보다 내가 잘할 수 있는 한 가지를 계속 다듬어가면서 완성해나가는 편이다. 이것저것 어느 하나 제대로 못하는 것보다 하나라도 깊이 있고 진실되게 하고 싶다. 그래서 변화나 변신에 대한 욕심도 없을뿐더러, 그런 욕심을 부릴 만한 선천적인 재능도 없다. 담금질을 하듯, 한 가지를 꾸준히 파고들면서 더 견고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다.
드라마, 특히 주말 드라마 속의 사랑은 언제나 풍파가 많다. 이번 드라마에서는 어떤가?
매번 사랑이 평탄하면 드라마가 나올 수 없다. 이번엔 극중에서 의사로 나오는데, 내가 수술을 집도하다 사랑하는 여자, 김소연의 아들이 목숨을 잃는 비극적인 상황에 처한다. 이제 김소연도 전말을 알게 되면서 앞으로 피곤해질 일이 많다. 이런 배경 때문에 저돌적으로 사랑을 표현하다 일말의 죄책감을 느끼고 멈칫하는 연기가 참 어렵다. 슬픈 눈으로 농담을 건네는 식이다. ‘슬픈 기쁨’을 표현해야 한다는 점이 힘들다. 하하.
사실 나는 이상우를 영화배우로 기억한다. 2006년 <내 청춘에게 고함>이라는 영화를 인상 깊게 봐서다. 계속 영화를 찍을 줄 알았는데, ‘드라마 왕자님’이 됐다.
나는 연기를 해본 적도, 끼도 없었다. 2004년쯤 데뷔했는데, 초창기 내 연기를 보면 알겠지만 아마 TV나 영화를 보는 평범한 사람보다도 더 연기를 못했을 거다. 워낙 숫기도 없고, 말도 더듬었다. 그래서 결국 ‘이미지’로 캐스팅이 많이 됐는데, 그때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라서 불러주면 어디든 출연했다. 영화와 드라마를 왔다 갔다 하면서도 마음이 내내 안 좋았다. 내 연기가 ‘발연기’라는 걸 잘 알았으니까. ‘이대로 괜찮을까?’라는 불편한 마음을 안고 활동하다 어떤 계기를 딱 만났다.
어떤 계기인가?
2007년에 드라마 <조강지처클럽>에서 선배 배우들이 연기에 임하는 자세에 충격을 받았다. 특히 안내상 선배님이 나를 많이 도와주셨다. 104부작이 방송되는 1년 내내 참 많은 깨달음을 얻었다. 드라마의 인기로 나는 ‘아줌마’에게 얼굴을 많이 알렸지만 인기를 얻거나 유명해지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부족한 내 연기를 채우고 싶다는 생각으로 다음 작품을 고심했다. 가만 보니까 나는 영화나 미니 시리즈보다 호흡이 긴 연속극이 더 맞는 것 같았다. 천천히 하면 되니까. 노력하는 만큼 결과도 좋았다. 그래서 연속극에 연달아 출연하다 보니 이제는 다른 매체를 생각할 틈이 없다.
그렇게 긴 드라마에 계속 출연하다 보니 순발력이 엄청 생겼겠다.
순발력은 물론이고 융통성이 많이 생겼다. 드라마 촬영 현장은 늘 숨가쁘게 돌아간다. 매번 최고의 환경에서 연기를 할 순 없다. 고생하는 스태프와 동료 배우와 조화롭게 호흡 맞추는 법을 배웠다. 최고는 아닐지라도, 늘 주어진 상황 안에서 최선을 다한다.
영화배우라는 타이틀에는 욕심이 없나?
남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지보다 나 자신을 만족시키고 싶다는 생각이 더 크다. 노력한 만큼 어떤 목표에 도달했을 때 희열과 보람을 느낀다. 어렸을 때부터 운동을 했는데, 항상 남들과의 경쟁이 아니라 나 자신을 극복하고 싶은 게 먼저였다. 회사 대표님과 2003년 1월에 계약을 맺고 지금까지 함께해오고 있는데, 계약서에 사인을 한 이유도 마찬가지다. 남들 앞에서 발표 한번 한 적 없던 나 자신을 넘어서고 싶었다. 내성적이고 수줍은 나를 변화시키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런 내성적인 성격이 연기 생활 14년 차가 되니 바뀌던가?
사람 성격은 쉽게 바뀌는 게 아니더라. 하하. 오히려 바꾸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부자연스러워진다. 그런데 일을 하다 보니 나보다 더한 사람들도 있더라. 남들 앞에서 자신을 잘 드러내는 사람도 연기를 하지만, 자신을 잘 숨기는 사람도 연기를 하더라고. 그걸 보면서 성격을 개조하려고 노력하기보다 내가 편안하게 연기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자고 다짐했다.
아까 말한 ‘발연기’ 시절에도 어떤 재미를 느꼈으니까 활동을 계속 한 것 아닌가?
연기를 계속 하고 싶다, 더 잘하고 싶다고 느끼는 건 오래된 팬들 덕이 크다. 그들에게 감동받을 때가 많다. 부족한 내 연기력이 아주 조금 좋아졌다는 것만으로도 매우 기뻐해주고 그런다. 숫기 없는 사람들이 나를 보면서 힘을 낸다. 그래서 시상식도 부끄러워서 참석하지 않을까 싶다가도 나가서 당당한 모습을 보여줘야겠다고 생각을 고쳐먹기도 했다. 선순환의 재미가 있다. 그리고 나는 한 번에 척척 잘하진 못하지만, 진득하다. 시키는 대로 다 하고 엉덩이 붙이고 앉아 있으니까 어느새 내 차례가 오더라. 성실한 마음으로 기다리다 보니 14년째 활동하고 있다.
지금까지 얘기를 나눠본 결과, 이상우는 웃기는 사람 같다. 그런 말 많이 듣지 않나?
글쎄, 일부러 지어낸 건 아니지만 웃기는 에피소드를 보유하고 있어서인가? 나는 지루한 게 싫다. 영화나 드라마를 봐도 지루해지면 그 시간이 너무 아깝다. 그런 작품을 만들고 연기하는 것도 못할 짓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도 참 많은 죄를 지었다. 연기를 못해서 시청자가 집중하지 못하게 한 큰 죄인이다. 누군가의 인생에서 많게는 두 시간 반, 적게는 한 시간을 뺏어버렸으니까. 그래서 이왕이면 연기를 하면서도 중간중간 재미를 찾으려고 노력한다. 근데 지금 말하는 재미는 웃기는 것과는 다른 의미라, 내가 웃기는 사람인지는 모르겠다.
쉴 새 없이 일을 하다 작년인가, 갑자기 쉬는 시간이 생겼다. 그 시간을 어떻게 보냈나?
너무 두서없이 쉰 게 후회된다. 원래는 여행을 하면서 알차게 보내고 싶었다. 미국에 한 번도 가보지 못해서, 혼자 차를 빌려 미 대륙을 횡단할 계획을 막연하게 세웠다. 미군 부대에서 복무 중 알게 된 미군 친구가 몇 년 전 참전했다 전사했다. 그 친구가 묻혀 있는 오클라호마 주에도 가보고 싶기도 하고 꿈은 꽤 거창했다. 그런데 막상 쉬니까 밀린 약속을 이행하기 바빴다. 두 달 동안 매일 술 약속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몸이 아파서 한 달 동안은 집에서 요양을 했다. 술 먹으면서 밤을 새느니 차라리 일하면서 밤을 새자는 마음이 들더라. 그래서 2015년에 <상류사회> 특별 출연을 시작으로 다시 가열하게 일을 시작했다.
왠지 고민이 없을 것 같다.
고민을 고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편이다. 고민을 그대로 방치해두고 오늘만 충실히 살고 있다. 그럼 고민 없는 사람으로 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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