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독특한 영웅이다. 과학 실험을 하다 돌연변이가 되어 초능력이 생긴 것도 아니고, 지구가 아닌 우주 저편에서 왔다는 거창한 탄생 비화도 없다. 그래서 아이언맨은 언뜻 돈 많은 아버지를 만나 하고 싶은 거 마음껏 누리고 사는 ‘한량’처럼 비치기도 한다. 정의보다는 ‘흥 따라 멋 따라’ 기분파라고나 할까? 최첨단 의술로 강철 심장을 이식하고 주먹보다 촌철살인의 농담이 앞서는 유쾌한 히어로, 아이언맨은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라는 배우를 만나 마블의 상징적인 존재로 자리 잡았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역시 아이언맨이라는 캐릭터를 만나 파란만장했던 과거를 청산하고 제3의 인생을 시작할 수 있었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만큼 영화처럼 드라마틱하고 굴곡진 인생을 살아온 배우도 드물다. 그는 다섯 살 때, 아버지 로버트 다우니 시니어의 영화 <파운드>에 첫 출연한 이후 1987년 영화 <회색도시>에서 마약중독 청년을 연기해 배우로서 주목과 인정을 동시에 받았다. 영화 <채플린>(1992)에서 보여준 ‘찰리 채플린’ 연기는 그가 눈을 감는 순간까지 따라다닐 만큼 빛나는 순간이었다. 이 작품으로 그는 1993년, 생애 최초로 아카데미상 후보에 올랐다. 하지만 반짝임은 거기까지였다. 배역에 지나치게 몰두한 탓인지 그는 1996년부터 실제로 마약에 중독돼 체포당하는 등 배우로서 이미지와 커리어를 한꺼번에 잃었다. 한순간 촉망받는 배우에서 ‘뭔가 문제 있는 인간’으로 낙인 찍힌 그는 쉽게 일어설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2008년, <아이언맨>은 그런 그에게 새로운 인생을 안겨줬다. 아이언맨은 마블의 여러 캐릭터 중에서도 대중적인 인기를 얻지 못했다. 하지만 영화가 엄청난 성공을 거두면서 마블의 핵심 캐릭터로 자리 잡았다. 이전에도 마블 영화가 간간이 나오긴 했지만 이렇다 할 흥행 성적을 거두지 못한 것이 사실. <아이언맨>의 성공은 <캡틴 아메리카>와 <어벤져스>를 제작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됐고 마블 캐릭터 영화가 대중의 주목을 받는 계기를 마련해줬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어벤져스>와 <아이언맨 3>에 출연해 무려 10억 달러 이상의 흥행 수익을 올려 2013년 가장 많은 수입을 거둔, ‘비싼 배우’가 됐다. 지하 땅끝에서 지상 200m로 초고속 엘리베이터를 탄 이 남자에게 아이언맨은 캐릭터 그 이상의 존재다.
2016년 개봉하는 신작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는 그가 연기하는 ‘마지막’ 아이언맨이 될지도 모른다는 ‘소문’ 때문에 더욱 궁금해진다. 이번엔 아이언맨과 ‘미국 대장’ 캡틴 아메리카의 전쟁을 선언했다. 그런데 잠깐, 늘 농담을 따먹으며 적과 싸우던 돈 많고 흥 많은 토니 스타크가 마블 세계에 분열을 일으킨다고? 이 흥미로운 전쟁에 대해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마블의 현명하고 세련된 아이디어’라고 표현했다. “아이언맨과 캡틴 아메리카에게서 감동을 자아내는 건 사실 너무 뻔한 이야기죠. 아무도 보고 싶어 하지 않을 거예요. 그래서 약간 흥미로운 분열을 던져주는 거예요. 두 사람이 이 관계를 어떻게 회복하는지가 늘 궁금했거든요.” 어벤져스의 두 리더 사이에 전쟁이 벌어진 배경은 단순하다. 어벤져스 군단을 정부가 관리한다는 내용의 소코비아 합의안을 둘러싼 입장 차이 때문이다. 스티브 로저스, 즉 캡틴 아메리카는 정부의 개입에 반대하고 토니 스타크, 아이언맨은 찬성한다. 완고한 성격의 미국 대장과 풍류남 아이언맨의 성격을 고려한다면 굉장히 뜻밖의 선택이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역시 이런 반전에 적극적인 환영을 표했다. ‘무슨 짓을 하든 놀랄 것 없다’는 생각으로 토니 스타크를 연기한다는 그는 그 때문에 어벤져스 팀의 불화와 반목이 새롭지 않았다고 말한다. 무언가 하려고 할 때 뜻이 맞지 않은 건 흔한 일이었으니까.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에서 토니 스타크는 꽤 파란만장한 일을 겪는다. “토니 스타크의 인생 여정은 세 부분으로 나뉘어요. 먼저 비서이자 연인인 페퍼가 당분간 시간을 갖자고 하는데, 다들 알다시피 둘의 관계는 개선해야 할 점투성이죠. 그 와중에 토니 스타크는 파악이 잘 안 되는 낯선 인물이랑 일대일로 대치하고, 그때 소코비아 합의안 문제가 떠오르는 거예요. 또 악당 새디어스 로스와 불편한 동맹도 맺고요. 엄청난 이야기와 다양한 소재가 한곳에 엮여 있죠.” 그의 설명대로, 관객은 이번 영화에서 토니 스타크의 새로운 얼굴을 마주하게 된다. 끊임없이 유머를 던지고 쇼맨십 강한 토니 스타크가 ‘고뇌’하기 시작한 것. “토니는 어벤져스가 적들과 싸우면서 남긴 부수적인 피해에 대해 이야기하는 민간인과 마주쳐요. 그때부터 어벤져스의 활동에 대해 조심스러운 입장을 취하는 거죠. 지난 일을 솔직하게 되돌아보고, 소코비아 합의안에 찬성하는 쪽으로 기울어요.”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캡틴 아메리카 팀과 비교해 아이언맨 팀 역시 실력에서는 뒤지지 않는다고 자랑스럽게 말한다. 무엇보다 그를 기쁘게 한 건 스칼렛 요한슨, ‘블랙 위도우’와 같은 팀이었다는 사실. <아이언맨 2>에서부터 나타샤, 즉, 블랙 위도우는 토니 스타크와 거의 붙어 있지 않았다.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만 보더라도 캡틴 아메리카와 그녀가 워낙 가깝게 지냈기에 신작에서 이런 전개를 예상하지 못했다고. 영화 내에서 스티브 로저스와 토니 스타크는 서로에 대한 어떤 애정도 없지만, 현실은 좀 다르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크리스 에반스를 ‘완벽한 캡틴 아메리카’라고 칭한다. “적어도 마블 코믹스에서만큼은, 크리스는 전설적인 배우 스펜서 트레이시 같아요. 우뚝 서서 진실을 말하고, 본인의 믿음에 따라 행동하죠. 신체적 조건도 정말 뛰어난 배우예요. 캡틴 아메리카는 마블 코믹스를 통틀어 가장 영화화하기 힘든 배역이었는데, 크리스가 처음으로 해냈죠. 그리고 그다음에도, 또 어벤져스 시리즈에서도 해냈어요. 이번에도 마찬가지예요.” 그도 그럴 것이, 쇼핑몰에 가면 캡틴 아메리카 옷을 적어도 20여 종류 발견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성공이라 할 수 있겠다. 현실에서 아이언맨과 캡틴 아메리카의 대결은, 아이언맨의 ‘폭풍 칭찬’으로 시시하게 일단락된다.
이번 영화에선 반가운 얼굴을 또 만날 수 있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arvle Cinematic Universe)에 출연한 배우들은 종종 특별한 방식으로 영화에 다시 참여한다. 토니 스타크와 전략적 동맹을 맺은 악당 ‘새디어스 로스’ 역으로 돌아온 윌리엄 허트도 이런 경우다. 그의 등장을 가장 반긴 사람이 바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였다. “윌리엄 허트라는 배우를 생각해보면, 돌아와야 하는 게 당연해요. 새디어스 로스 역을 끝내주게 소화하는 배우니까요. 토니 스타크는 새디어스 로스를 조금 신기하게 생각하지만, 저는 그분이 정말 좋아요. 그냥 앉아서 그가 일하는 모습을 구경하거나 함께 어울리면서 명상이나 역사에 관해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어요. 제가 상상할 수 있는 자기 계발의 가장 완벽한 형태가 바로 윌리엄 허트죠. 그는 계속해서 무언가를 배우거든요. ‘올드 스쿨’이면서 다른 출연진에게 영감을 준 인물이에요.”
감독 앤서니 루소, 조 루소와 처음으로 작업한 것 역시 좋은 경험이었다고. “감독으로서 마음에 들지 않은 점이 하나도 없었어요. 둘은 제가 원하는 방식으로 움직여요. 그래서 저는 한 걸음 물러서서 그들을 따르기만 하면 됐죠. 일을 하면서 늘 그런 독창성을 원했거든요.”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캡틴 아메리카의 결정과 그에 따른 여정에 관객이 놀라면서도 충분히 즐길 수 있을 거라고 한다. “두 감독의 첫 번째 마블 영화인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는 정말 좋았고, 멋있었어요. 많은 사람이 좋아하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죠. 이전 시리즈와 약간 다르고, 개성이 있었어요. 루소 감독님들은 마블 시리즈를 단순히 확장하는 게 아니라 새롭게 만들어냈고, 이번에도 성공이라고 확신해요.”
그렇다면 업그레이드된 아이언맨 수트는 어떨까? “원래 토니 스타크는 예산 부족 때문에 맥가이버처럼 기본적인 것만 갖고 있었어요. 하지만 이번에는 몇 가지 변화가 생겼는데 정말 맘에 들어요. 토니 스타크가 윈터 솔져랑 주먹으로 싸울 때 작은 신기술이 생겼거든요. 직접 보시면 알 거예요.”
앤서니와 조 루소 감독은 입을 모아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를 대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를 한 번 클로즈업하는 것은 다른 배우들 전체를 비추는 것만큼 가치 있다고 말이다. 그래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마블과의 계약에 종지부를 찍는다면 아이언맨은 당분간 볼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팬들의 바람을 읽었는지, 그는 신작 공개에 앞서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지금은 <아이언맨> 시리즈가 거대한 엔터테인먼트 사업이지만, 나중에는 결국 ‘토니 스타크’를 연기한 배우,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남을 거라고 생각해요. 내가 계속 잘나가는 배우가 된다면 앞으로 더욱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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