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홍진경의 디지털 싱글이 나왔는데 피처링에 당신 이름이 있더라. 홍진경과 김광진이 썩 어울릴 조합이라고는 생각 못했다.
진경 씨가 예전부터 내 음악을 좋아했다. 계속 나와 작업을 하고 싶어했는데 처음에는 좀 망설였다. 내가 여자와 듀엣을 한 적이 없었거든. 그런데 결과가 마음에 들어서 다행이다.
그분이 회사 차려서 돈을 많이 벌었잖나. 사업가 홍진경이 투자를 빌미로 곡을 부탁한 건 아닐까 생각도 했다.
하하. 그건 아니다.
증권가에서 일하는 걸 좋은 경험이라고 했다. 어떤 의미에서?
일단은 펀드도 매일 수익률 경쟁을 해야 하는 분야다. 실적을 내야 하고. 그런 긴장감 같은 것들이 나를 단련시킨 게 아닌가 싶다. 그런데 항상 생각보다 운이 잘 안 따른다. 회사 일만 봐도 우리 팀이 좋은 수익률을 낸 것에 비하면 투자가 많이 안 됐다. 그런 것들이 좀 아쉽다. 운명이나 사주 같은 걸 잘 믿는 편인데, 이게 내 팔자인가 싶기도 하고. 내가 좀 비관적인 성향이 많다. 음악을 만들 때도 잘 안 나오면 너무 불안해 하고. 그래서 어떤 두려움이나 불안감을 없애기 위해서 일정한 직업에 종사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음악만 열심히 하는데 좋은 곡이 안 나오면 정말 견디기 힘들 것 같다.
사주? 좀 놀라운데.
진심인데, 역학이나 명리학 공부를 본격적으로 해볼까 생각 중이다.
더 놀랍다.
내가 그런 쪽에 약간 직관력이 있어서 잘 보는 분한테 사주를 보내봤더니 나에게 역술인 기질이 있다고 하더라.
사주 보면 결과가 일관되게 나오나?
어 재능이 있고, 무지 예민한데 생각만큼 명성이 잘 안 따른다던가. 얼마 전에 마이클 잭슨의 마지막 인터뷰를 봤는데 아직도 보여줄 게 많이 남았다는 말을 했더라. 근데 그게 음악 하는 입장에서는 와 닿았다. 다른 뮤지션들도 항상 뭔가 더 보여주고 싶은 마음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을 거다. 하지만 시장이라는 걸 고려하지 않을 수 없으니까. 나도 항상 아쉬운 마음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점점 더 무뎌지는 게 아닌가 싶어서 두렵기도 하다.
말은 그렇게 해도 당신은 음반마다 변화가 많은 뮤지션이다. 그런 변화에도 불구하고 결과물은 편차 없이 늘 훌륭했고.
음반을 준비할 때는 항상 막막하다. 내가 좋은 음반을 낼 수 있을까, 걱정만 하다가 막상 음반이 발매되면 이게 너무 맘에 드는 거다. ‘아, 이것보다 더 좋은 음반을 또 낼 수 있을까, 이제는 더 이상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다가, 새로운 음반을 내면 또 그 음반이 좋은 거다. 그런 후회와 기대의 반복이랄까. 항상 그런 식이다. 하하.
그래도 지금 생각해도 잘 쓴 곡들이 있지 않나?
나는 잘한 걸 오래 기억하는 성격이 아니라 못한 걸 오래 기억하는 성격이다. 안 좋은 습성이지. 잘됐던 건 다 잊어버리고, 불편했던 기억만 남아 있는 거다.
완벽주의자 기질이 있는 건가.
완벽주의자는 아닌데 항상 안 좋았던 점들, 어떤 고정관념이 있나를 많이 생각하는 편이다. 내 노래 들으면 고정관념이 많이 남아 있는 것 같아서 그걸 빨리 깨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항상 난 예전과 전혀 다른 걸 해냈을 때의 나 자신이 좋다. 나한테서 이런 게 나왔네 싶은 것들. 기존의 것들을 답습하는 걸 굉장히 답답해한다.
그래도 팬들은 변화를 그렇게 원하지는 않는다.
팬은… 잘 모르겠다. 난 누가 와서 팬이라고 하면 거짓말하는 것 같다. 그러니까 실감이 잘 안 난다. 가끔 금융권에 근무하는 후배들 중에도 음악 좋아하는 친구들은 내가 롤모델이라 하는데 사실 나는 하루하루 너무 빡빡하게 살고 있거든. 우연히 두 가지 일을 하게 됐지만 그렇다고 내가 하고 있는 일에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는 생각은 안 든다. 아쉬웠던 부분들이 많지. 오늘 인터뷰하러 나올 때도 고민했다. 남성지를 보는 독자들이 내 얘기에 관심이 있을까 싶어서.
“1990년대에는 어떤 곡이 차트에서 1위를 하면 충분한 당위성이 있었다. 그럴 만하다는
공감대를 형성했었던 거다. 하지만 요즘은 무엇 때문에 이 곡이 1위를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
경우가 많다. 내 음악? 내 음악은 저평가 우량주랄까? 아니, 저평가 장기 소외주가 더 맞겠다.”
남성지를 자주 보나.
남성지를 좋아한다. 신제품이나 자동차, 스포츠에 늘 관심이 있으니까.
자동차와 스포츠.
그렇다, 나 스포츠광이다. 농구를 굉장히 좋아하는데, 농구만이 아니라 모든 스포츠를 다 좋아한다. 어릴 때 꿈은 스포츠 보조 해설가가 되는 거였다.
참 의외의 코드들이 많다.
생각과는 좀 다르지? 모르겠다. 내가 이런 인터뷰를 힘들어하는데 오늘은 뭔가 유쾌하다. 어떤 인터뷰 가서는 예, 예만 반복하다 온 적도 있다.
가장 타보고 싶은 차는 뭔가.
요즘은 BMW X6가 그렇게 맘에 들더라. 근데 너무 비싸더라. 한 2년쯤 기다렸다가 중고를 살까 생각 중이다. 그 전까지는 아우디의 A6. 난 자동차는 좀 사치를 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가격이 문제여서 그렇지.
‘편지’를 부르는 김광진과 잘 조합이 안 된다. 아직도 그 노래를 들으면 가슴이 먹먹해지는데 말이지. 그 노래의 가사는 아내가 겪은 연애담을 바탕으로 쓰였다고 들었다. 남편으로서 질투가 날 만도 한데, 대인배라고 생각했다.
사실 가사 쓸 때는 그런 생각까지는 못했다. 일단 가사가 빨리 나와야 하니까 빨리 쓰라고 재촉은 많이 했지. 처음 아내에게 가사를 받았을 때는 좀 별로라고 생각했다. 이건 너무 비굴하지 않나, 이런 생각도 했었으니까.(웃음) 하지만 녹음한 테이프를 차에 타서 듣는데 굉장한 느낌이 있더라고. 내 노래 들으면서 눈물이 난 건 거의 처음이다. 아마 듣는 분들도 내가 느낀 것과 비슷한 감정을 갖지 않았을까 싶다.
‘편지’는 젊은 층도 굉장히 좋아했던 노래다. 그 정서가 10대에게도 어필하는 것이 참 신기했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었다고 해도, 보편적인 정서는 누구에게나 있다. 떼쓰고 징징대는 어린 사랑이 아니라, 어른의 속 깊은 사랑에 대한 동경이 아니었을까 싶다. 물론 그렇게 생명력이 긴 곡을 항상 쓰고 싶지만 의도한다고 항상 되는 건 아니니까.
뮤지션 입장에서는 젊은 세대가 음악을 소비하는 방식에 대해서 섭섭함이 있을 것 같다.
솔직히 요즘 발표되는 노래 가운데 대형 기획사에 속한 그룹들의 노래는 차라리 완성도가 있다. 시스템이 갖춰져 있어서 그런지 깜짝 놀랄 만한 곡들이 있다. 그쪽을 제외하면 많은 노래들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구태의연한 구성을 가지고 있다. 말도 못하게 후퇴한 부분도 너무 많다.
그건 리스너들의 책임도 된다.
어쩔 수 없는 거다. 우리가 어릴 때는 영화 같은 매체들을 가뭄에 콩 나듯 접할 수 있었잖나. 그러다 보니 대부분 문화적 연결고리는 음악이었다. 일단 팝 음악이 번성한 시기였고 많이 듣다 보니 어떤 음악이 수준이 높다는 걸 아는 거지. 책 많이 읽은 사람들은 어떤 책이 잘 쓴 건지 알 수 있듯이 말이다. 근데 요즘에는 환경이 너무 멀티미디어 위주라서 실력이 있고 없고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흔들리는 것 같다. 내 아이들만 봐도 엽기적인 음악들만 좋아하니까. 그런 음악적인 감각 면에서는 나이 많은 사람들이 젊은 세대보다 분명히 한 수 위다. 그러다 보니 우리 기준에는 수준 낮은 음악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지. 트렌드를 떠나서 음악적인 완성도의 문제인 거다.
서태지를 미워해야 할까? 생각해보면 더 클래식의 1집이 나온 1994년은 서태지와 듀스가 절정의 인기를 구가할 때였다.
참 좋은 시절이었지. 자기 이름을 걸고 자기 색깔을 가진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니까. 발라드건 댄스 곡이건 1990년대에는 어떤 곡이 차트에서 1위를 하면 충분한 당위성이 있었다. 그럴 만하다는 공감대를 형성했었던 거다. 하지만 요즘은 무엇 때문에 이 곡이 1위를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 경우가 많다.
당신 말대로 ‘마법의 성’은 1위를 할 만한 당위성이 충분히 있는 곡이었다. 하지만 그 곡 때문에 부담도 많았을 것 같다.
솔직히 말해서, 정말 힘들었다. 요즘도 생각한다. 더 클래식의 1집이 한 10만 장 정도만 팔렸으면 오히려 더 행복했을 테고 이후 작업도 의욕 있게 했을 것 같다고. 이후에 내놓은 곡들이 음악적으로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마법의 성’에 못 미친다는 상실감에 너무 힘들었다. 지난 2002년에는 콘서트 준비를 하다가 사기까지 당했다. 그러니까 뭔가 힘이 쫙 빠지는 거다. 음악을 당분간 그만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래서 이후 6년 가까이 음반을 내지 않았다. 그 6년 동안 뮤지션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직장 생활 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상처받을 일들이 많았지.
예를 들자면 어떤 건가.
그러니까… 가령 IR 행사 같은 곳에 갔는데 누가 노래 한 곡을 부탁하면 거절하기가 참 쉽지 않다. 물론 내가 노래를 하면 분위기는 좋아지겠지. 하지만 음악 하기 좋은 환경은 아니니까. 그렇게 노래를 하면 기분이 좋지만은 않다. 너무 소모되는 것 같고. 그런 경험들이 음악에 도움이 되는 것 같지 않다. 가뜩이나 비관적인 성향이 있는데, 더 비관적으로 변하는 거지. 우울해지고.
지금은 ‘마법의 성’의 짐을 좀 벗었나.
아직도 있지. 사실 ‘편지’는 히트 곡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그 노래를 많이 좋아해줬지만, 히트 곡이라기보다는 구전 가요 같은 느낌이 더 강했다. 음반이 나왔을 때도 폭발적인 반응은 아니었고. 그 당시 음반을 낼 때만 해도 매니저가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마케팅이 참 어려웠다. 지금도 그런 걸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게 참 어렵지. 마케팅에 재능 있는 사람들은 따로 있는 것 같은데, 그런 사람들과 일하자니 너무 많은 구속을 받기 때문에…. 이게 내 팔자인가 싶다. 내가 일하는 자산 운용사도 지난 3년간 성적이 1등인데도 불구하고 마케팅이 잘 안 됐다. 가요계에서 겪었던 일들을 금융계에서도 겪고 있는 거다. 하하. 좋은 성적을 내지만 약간 소외되는 게 나의 팔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당신에게 음악은 주식으로 치면 단기주가 아니라 장기주겠지? 죽을 때까지 품고 있어야만 할 그런….
그럼. 음악은 내 소명 같은 거다. 음악을 할 때 가장 고통스럽고, 또 가장 행복하다. 내 음악은 저평가 우량주랄까? 아니, 저평가 장기 소외주가 더 맞겠다.(웃음) 당신 말대로 죽을 때까지 품고 가야 할 그런 종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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