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에 비가 많이 오는데, 그래서 너무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왔다. 이승열과 비는 어쩐지 어울리는 것 같아서. 비, 좋아하나?
비가 서프라이즈하게 오는 건 좋아한다. 그러니까 ‘아니, 이게 웬 비?’ 이런 건 좋다. 예고된 비는 잘 모르겠다. 뜻밖의 상황은 늘 좋다.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는 상황이라거나, 태풍이 예보됐는데 하늘에 구름만 잔뜩 낀 경우. 그래서 딱히 맑은 날, 흐린 날을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빤한 날은 뭐랄까, 그냥 견딜 뿐이다.
의외성을 즐기나?
자극이 되는 걸 좋아하는데, 그게 좀 위험한 것 같기도 하고…. 사는 게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가운데 간간이 의외의 요소들이 박혀 있는 것이 좋다.
그래? 당신의 예전 인터뷰를 보면 음악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 많더라. 오늘은 좀 뜻밖의 질문들로 진행해볼까?
아, 그런데 담배 안 피우나? 괜찮다, 같이 피우자. 내가 실내에서는 담배를 잘 안 피우는데 이렇게 실내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도 참 뜻밖의 일이다.
담배는 얼마나 태우나?
반 갑? 많이 피울 때는 한 갑.
생각보다는 많이 안 피운다.
골초는 아니다. 담배를 좋아하는데 내 몸도 아낀다.(웃음) 그래봤자 아내밖에 없지만 그래도 가장이니까. 아이는 원하고 있는데, 미루기만 하다가 여기까지 와버렸다. 그러고 보니 내년이면 함께 산 지 10년째다.
10년이면 권태기가 올 때도 되지 않았나?
부부 관계에 대한 유머는 과거부터 존재해왔잖나. 아마 예전부터 결혼이 족쇄의 개념으로 작용했던 것 같다. 난 결혼을 배터리 같은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배터리?
사랑이 완전히 1백 퍼센트 충전이 됐을 때 결혼을 하는 거잖나. 하지만 사랑도 방전되고 소모되니까. 그걸 채워야만 유지가 되는 거지. 서로 그런 충전의 기회를 갖지 않으면 안 되는 거다. 족쇄라기보다는 울타리인 것 같은데 아주 무시무시한 울타리인 것 같다, 결혼은.
…하여튼 뮤지션이 좋은 남편이 되기에는 힘든 직업인 건 확실하다.
응, 나 좋은 남편 아니다. 워낙 일관성 없는 생활을 하다 보니까. 낮과 밤이 바뀌고, 작업 시간도 일정치 않고, 남들 다 휴가 갈 때 혼자 집에 있어야 하는 경우도 있다. 내가 미리 계획해서 시간을 할애하는 것들은 일반적인 남자에 비해 한참 떨어질 거다.
인터뷰 전 소속사의 홍보팀장과 통화하면서 느낀 건데, 그녀가 당신을 좀 어려워하는 것 같더라. 내가 몇 가지 요구를 했더니, ‘이승열은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는 분’이라고 하더라. 팀장이 그렇게 어려워할 정도면 당신도 어지간한 거 아닌가 싶었다.
하하. 그분이 좋은 분인데, 서로 잘 적응을 못하는 것 같다. 난 글쎄… 편한 사람이 아닌 건 확실하다.
가끔 유앤미블루는 과거의 명성에 박제된 상태로 남아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 이름은 이제 전설같이 되어버렸으니까.
사실 그게 두렵긴 하다. 유앤미블루라는 이름의 크기가 우리 생각 이상으로 너무 커져버렸다. 그래서 아직도 유앤미블루를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면 뭔가 생소하다.(웃음) 내 기억 속에서 유앤미블루는 치밀하게 계획했던 게 아니라 그냥 젊은 혈기로 저지른 일에 가깝고, 그게 어떤 현상이 됐다면 그건 그 자체로 봐야 하지 않을까. 난 그 과거의 영광을 분리해서 보고 있다. 이제 내 나이가 마흔인데 적어도 예순까지는 음악을 열심히 할 생각이니까…. 갈 길이 먼 사람이다. 나를 너무 작가로 보는 시선은 조금 부끄럽다.
얼마 전 유앤미블루의 첫 콘서트는 어땠나. 떨렸나.
전혀.(웃음) 방준석과 함께 구상하면서부터 충분히 극복을 했다. 우리 쓸데없는 부담 갖지 말자, 누가 보러 온들 어떤 비판을 들은들, 중요한 건 우리 마음이다,라고.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그 공연에서 불렀던 대부분 곡이 10월에 발매될 예정인 유앤미블루의 3집 음반에 실릴 거다.
첫 콘서트에서 대부분 곡을 신곡으로만 채웠다고? 심지어 아직 공개도 안 된? 이건 무슨 자신감인가.
이승열 혼자가 아니라 유앤미블루를 하는 거라 생각하니까, 그런 자신감 아닌 자신감이 생겼다. 사실 팬들에 대한 고민을… 많이는 아니고 조금 했다. 하지만 누군가는 욕한다 해도 대부분 팬들은 더 좋아할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유앤미블루의 신곡을 그 누구보다 먼저 들었다는 기쁨 때문에? 하긴 충성도가 높은 팬들을 가지고 있긴 하다.
응, 그것도 맞는 말이다. 사실 팬 입장에선 충분히 황당할 수 있다. 콘서트는 신곡을 듣는 기쁨보다는 추억을 곱씹어본다는 의미가 크니까. 그런데 우리 팬들은 대부분 관대한 마음으로 잘 안아주셨다. 어떤 평가를 듣게 될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만, 공연은 정말 재미있었다.
일단 저지른 다음 ‘이렇게 됐으니까 당신이 이해해줘’라고 말하는 스타일인가.
하하. 물론 어느 정도 계획적으로 사는 사람이지만 당신 말이 틀렸다고는 못하겠다. 젊었을 때는 더 그랬다. 그러니까 처음에는 나를 보고 ‘뭐 이런 애가 다 있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겠지만, 그것도 한결같다면 어느 순간 캐릭터가 될 수 있잖나. 난 남의 이해심을 먹고 자라는 꿈나무랄까.(웃음) 그런 사람이었던 것 같다.
다른 뮤지션들 보면 몇몇이 무리를 지어서 친분을 과시하는 경우가 많은데, 당신은 그런 경우가 거의 없다.
원체 사교적인 성격이 아닌 데다가, 보통 같은 소속사에 있는 분들과 친해지는데 내가 속해 있는 레이블의 분들도 대부분 사회성이 별로 없다. 남들이 한 달에 친해질 걸, 1년씩 걸리는 사람들이다.
“타협 자체가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다. 다만 타협도 기술인데 그건 쉽게
익힐 수 있는 게 아니잖나. 멋진 타협을 해야만 플러스가 되는 거잖나.
어중간한, 안 하느니만 못한 타협을 한다면 난 더 이상 음악 못할 것 같다.”
그래서인지 당신을 생각하면 항상 섬 같은 느낌이다.
아….(웃음) 아직 완성된 가사는 아니지만 곧 나올 새 음반의 노래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다. 그 말이 맞는 것이… 누가 내 섬 안으로 들어오려고 하면 그걸 막지는 않는다. 하지만 내가 적극적으로 섬 밖으로 나가서 누구를 데리고 오려고 한 적은 없다.
음악이 아닌 다른 일에는 관심이 없나?
음, 다른 문화예술 분야에도 별로 관심이 없다. 가끔 회사의 오디오 엔지니어 분들과 B급 영화들을 찾아보는 경우는 있다. 이런 걸 누가 봤을까 싶은 영화들을 보면서 즐거워한다. 미국에서 학교를 다닐 때 영화 관련 일을 해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한 적은 있지만, 역시 생각만 하다가 그만뒀다.
그럼 처음 음반을 낼 때, 누군가의 인정을 받겠다는 식의 야심이 없었나.
미국에 있을 때, 틈틈이 만들었던 곡들로 데모 테이프를 만들긴 했지만, 그건 우리가 연주한 곡이 어떤 느낌일지 궁금해서였지, 그걸로 음반 계약을 성사시킨다거나 하는 마음은 없었다. 그때 행동대장이 방준석이었다. 방준석이 그걸 들고 음반회사에 가더니 계약을 해서 온 거다. 그때도 난 한국에 가야 할까 말아야 할까 3개월 가까이 고민했었다. 매사에 너무 고민이 많은 사람인 거지.
뮤지션들이 나이가 들면서 점점 초반의 색깔을 잃고 대중의 취향에 맞춰가는 상황을 많이 목격한다. 15년 전과 달리 당신에게도 음악 외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들이 많지 않나. 어떤 식의 타협을 말하는 거다.
타협 자체가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다. 다만 타협도 기술인데 그건 쉽게 익힐 수 있는 게 아니잖나. 멋진 타협을 해야만 플러스가 되는 거니까. 안 하느니만 못한 타협을 한다면 난 더 이상 음악 못할 것 같다.
하지만 TV 프로그램에서 당신이 원더걸스의 ‘노바디’를 편곡해 부르는 모습은 팬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했다.
나는 그게 게임 같은 거라고 생각했었다. MBC 관계자 분이 제안을 하셨는데 난 장난인 줄 알고 처음에는 그냥 웃어넘겼다. 그런데 이분의 표정을 보니 장난이 아닌 거다. 나에게나 프로그램에나 둘 다 좋을 거라고 했는데, 나도 그때 게임을 하듯 한 번 해보자고 했었다. 영 이상하면 방송에 안 내보내겠지 하고 생각했는데 뜻밖에 그 곡이 화제가 됐다.
역시 TV의 힘은 대단하지? 이승열이 누구인지도 모르다가 그 방송을 보고서야 관심을 가지는 경우를 많이 봤다. 이젠 뮤지션들도 TV에 한 번 출연하느냐 마느냐가 인지도에 큰 영향을 미치는 거다.
내 목적이 어디에 있느냐가 중요하다. 그러니까 소규모 음반만으로도 만족하고 음악을 평생의 업으로 삼겠다는 목표가 있다면 매체의 힘을 빌릴 이유가 없겠지. 하지만 매체가 없다면 날 모르던 사람들이 알게 될 가능성 자체가 사라진다. ‘노바디’를 불러서 내 음악을 아는 사람들이 생겼다면 그건 좋은 일일 수도 있다. 이제는 내가 시장에 대해서 불만을 제기하는 게 의미 없는 게 아닌가 싶다. 이미 거대한 하나의 산이 있는데 이걸 파내서 다른 곳으로 옮기자는 건 말이 안 되잖나. 대안이라면 난 창조론을 믿는 사람이지만, 문명 같은 인위적인 것들은 분명히 진화를 한다는 거다.
창조론 얘기를 보니 기독교 신자인가 보다.
맞다. 어쩌다 보니 나 자신의 의지로 선택하게 됐다.
신의 존재를 믿나?
나는 보기와는 다르게 굉장히 과격한 사람이다. 내 속에는 이글거리는 화산 같은 게 있다.
…영적인 접촉을 한 적이 있느냐고 물은 건데.
아, 죽었다 살아난 것 같은 경험은 아니지만, 내 개인사에 축적된 경험들을 떠올려보면 분명 그런 게 있다. 그런데 이게 너무 개인적인 경험이라 다른 사람에게는 큰 의미가 없다. 누군가가 날 보호해주고 있다는 느낌이랄까. 어떤 존재가 날 사랑해주고 있는 것 같은 따스한 느낌을 가질 때가 있다. 그래서 나는 신을 무서워한다. 다른 건 하나도 무섭지 않은데.
절대자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면, 그 사람은 극단적으로 도덕적인 행동을 보일 확률이 높다. 항상 누군가가 자신을 감시하는 기분일 것 아닌가.
그 정도는 아니지만, 실제로도 난 결벽증이 있다. 그런데 또 어떨 때는 너무 많이 풀린 나사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사이클의 진폭이 크다. 나 자신을 한 10여 년간 면밀히 지켜본 결과 패턴이 그렇더라. 난감할 때가 많지. 그런데 왜 내가 이런 얘기를 하고 있는 거지.
그런 혼란이 당신을 괴롭히나?
악은 분명히 존재하잖나. 악의 하수인이 되고 싶지는 않은데 언제라도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것. 인간은 모두 원죄가 있다. 언제라도 사악해질 수도 있다는 것이 날 괴롭힌다.
성악설을 믿나?
그렇다. 나랑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에 대한 연민으로 울컥하는 기분 느껴봤나? 아름다운 시를 읽을 때 느껴지는 어떤 충만함 같은 것들. 그런 게 희망인 것 같다.
아, 대화가 너무 추상적으로 흘러가고 있는데.
멈춰야 돼, 멈춰야 돼.
음악을 하는 동안, 행복했나?
불행한 일들도 많았는데 이제는 그것도 좋은 추억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됐다. 행복했다, 분명히. 처음 클럽에서 무대에 오르던 때가 생생하게 생각난다. 무대에서 첫 리허설을 할 때의 그 행복감… 빨리 연습하러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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