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말해서 요즘 드라마를 못 보겠다. 볼 게 없기 때문이다. <선덕여왕>을 보면 된다고 하겠지만 나는 이 드라마도 별로다. 흥미롭기는 하나, 예전 <대장금>과 거의 유사한 구조를 지닌 탓에 관심은 덜 간다. 찬사를 보낼 정도는 아니라는 뜻이다. <트리플>은 짜증을 넘어 화가 날 지경이었고, <스타일>은 손발이 오그라든다. 심지어 ‘사내들의 땀 냄새가 물씬 풍겨난다’는 <드림>과 <태양을 삼켜라>를 보면 맙소사, 졸게 된다. 일단 내가 최근 드라마의 경향에 대해 좋게 말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부터 밝히겠다.
먼저 짚어야 할 게 있다. 나는 ‘남자 드라마’라는 장르 구분에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는다. 대중문화를 성별로 나누는 건 꽤 위험한 일이다. 그건 성(性)을 고정된 것으로 보는 편견을 확산시키고 그 차이가 본질적인 것이라 여기게 만든다. 나는 이런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드라마를 성별로 구분할 수 있는 건 장르적 특징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007 시리즈’를 남성적이라고 하듯 <태양을 삼켜라>와 <드림> <친구> 등을 남자 드라마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남자 드라마들이 다양한 맥락에서 ‘시망(시원하게 망)’하고 있다. 이유가 뭔가. 재미가 없어서라고 말하면 그만이지만 그러기엔 이 남성성의 연속된 추락은 의미심장하다. 거창하게 들리겠지만 남성적인 색채를 띤 드라마가 망하는 것에 대해서 ‘시대적 징후’라고 말하고 싶다. 그게 바로 이 글을 쓰는 이유다.
<태양을 삼켜라>는 어떤 점에서 <에덴의 동쪽>과 형제지간이다. <올인>의 제작진이 다시 뭉친 것을 주요 마케팅 포인트로 활용하는 이 작품은 라스베이거스와 아프리카 올 로케이션을 부각시킨다. <에덴의 동쪽>이 한국 현대사의 험한 계곡을 어설프게 비행하다 욕을 먹은 것처럼 <태양을 삼켜라>도 그렇다. 이 드라마에는 1960년대 박정희 정권의 강제 노역 정책이었던 ‘국토건설단’의 비극이 묻어 있지만 그야말로 상흔이 아니라 흔적으로만 남아 있다. 드라마의 개연성과 리얼리티가 부족하다는 불평은 팬들 사이에서도 팽배하다. 인물들은 단선적이고 동기도 불명확하며 스토리에는 비약과 우연이 남발한다. 과연 제작비 1백20억원은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인지 궁금해질 정도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제작비를 1백억원 이상 들인 작품들이 대중적 지지와 비평적 호의를 얻은 적은 드물었던 것 같다. <로비스트>가 그랬고, <태왕사신기>도 (처음엔) 그랬다. <태양을 삼켜라> 홈페이지에 호기롭게 새겨진 기획 의도에서도 언급되지만 누구나 ‘소재와 주제 의식이 중요하다’는 건 알고 있다. 문제는 작품 제작 과정이 아니라 결과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종격투기를 소재로 삼은 <드림> 역시 여기서 자유롭지 못하다. 온갖 인물들의 다양한 욕망과 투지가 사각의 링으로 결집되는 <드림>은 대본소 만화에 등장하는 내러티브의 전형이다. 그 때문에 장점과 한계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20년 전의 추억에 빠진 채 보고 있으면 소소한 재미도 느낄 수 있지만 그게 전부다. 좋은 드라마라고 말하기 어렵고 재미있는 드라마라고 추천하기에도 망설여진다. 취향에 따른 호불호가 명확하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차라리 <드림>은 <태양을 삼켜라>보다는 자신의 존재 이유를 정확히 알고 있다. 최소한 이 세계를 어찌해보겠다는 ‘가오’는 잡지 않기 때문이다.
남자 드라마를 표방하거나, 그렇게 이해되는 드라마들의 공통점은 바로 ‘가오’다. 어깨에 힘을 잔뜩 주고 한국 현대사를 어찌해보겠다고 허세를 부린다. 사실 이런 허세의 바탕에는 노스탤지어가 잔뜩 깔려 있다. 드라마 <친구>를 보면서 불편해지는 건 이 드라마가 영화를 충실하게 재현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너무 적나라하게 재현하기 때문에 불편하다. 드라마를 보고 있으면 곽경택 감독은 여전히 <친구>라는 영광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그러니까 그가 드라마를 통해서 시대를 말하겠다는 욕망은 사실 자신의 영광스러운 나날들을 또 한 번 재현하고 싶다는 욕망의 다른 말인 거다. <태양을 삼켜라> 역시 마찬가지다. 이 드라마는 유난히 <올인>을 자주 언급한다. <올인>이 성공한 드라마인 건 맞지만 그건 6년 전의 일이다. 지난 6년 동안 한국 사회는 급속도로 변화했다. 하나의 대중문화 작품은 결코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2003년에 성공한 대중문화는 그게 2003년이기 때문에 성공했다고 봐야 한다. 그걸 그대로 2009년에 재현하고 싶다는 건 과욕이다.
남자 드라마를 표방하거나, 그렇게 이해되는 드라마들의 공통점은 바로 ‘가오’다.
어깨에 힘을 잔뜩 주고 한국 현대사를 어찌해보겠다고 허세를 부린다.
사실 이런 허세의 바탕에는 노스탤지어가 잔뜩 깔려 있다.
남자 드라마는 공통적으로 스케일이 크다. ‘남자가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베야지’라고 억지를 부리는 남자 주인공들이 한반도를 수시로 넘나든다. 하지만 이야기 규모와 세계관의 스케일은 전혀 별개의 문제다. 특히 21세기에는 더더욱 그렇다. 해외 로케이션으로 화려한 볼거리를 만들어 대충 때우는 방식은 007이 동남아시아와 달을 오가던 1970년대에나 먹히는 거다. 우리는 이미 ‘본 시리즈’를 통해 스파이 액션 영화의 히어로가 저토록 위태롭고 불안할 수 있다는 리얼리티를 발견했다. <007 카지노 로얄>과 <퀀텀 오브 솔러스>에서 우리는 사랑에 목숨을 걸고 불면증에 시달리며 온몸에 상처를 새긴 ‘인간적인’ 제임스 본드를 발견했다. 그러니까 21세기 대중문화는 이제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남자의 모습을 스크린과 브라운관에 투영시킨다. 그걸 동시대적으로 체험한 한국 수용자들에게 20년 전의 캐릭터에 몰입하라는 건, 땅을 깊이 팔수록 한국 경제가 쑥쑥 자랄 거라는 농담 수준의 이야기에 동의하라는 것과 같다.
소위 ‘남자’ 드라마의 몰락은 시대 변화 때문이다. 그냥 한마디로 지금이 2009년이라서 그렇다. <모래시계> 이후 한국 현대사 3부작을 완성하려고 했던 송지나 작가의 <남자 이야기>가 ‘시망’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거칠고 무식하지만 한 여자에 대한 순애보를 지키는 남자 캐릭터는 이미 뮤직비디오에서도 사라진 지 오래다. 지금 한국 남자들은 그 어느 때보다 복잡하고 예민하면서도 다양한 정체성을 갖고 있다. 당연히 냉혹한 킬러와 바람둥이 스파이도 지난달 카드 값을 고민할지 모른다.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대기업에 입사한 신입 사원이 정작 까다로운 팀장 때문에 개고생할 수도 있다. 아프리카에 용병으로 팔려간 한국인이 김치를 못 먹어 향수병에 빠질 수도 있는 것이다. 남자 드라마가 몰락하고 있는 건 그게 남자에 대한 이야기라서가 아니다. 시시한 이야기라서 그렇다. 이제 한마디로 요점을 정리하자. 2009년의 대중은 남자 드라마를 거부하는 게 아니라 이제까지와는 다른 남자 드라마를 요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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