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패션’의 위상이 드높다. 서울을 찾는 해외 디자이너와 바이어, 프레스들이 자꾸만 늘어나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3월 21일부터 26일까지 열린 헤라서울패션위크엔 바니스 뉴욕과 레인 크로퍼드 등의 바이어들을 포함해 이탈리아 <보그>, 미국 〈W〉 매거진의 에디터들이 직접 참석했다. 뿐만 아니다. 중화권의 관심 또한 대단했다. 무엇보다 반가운 건 정구호의 진두지휘로 이루어진 헤라서울패션위크가 점점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아간다는 사실이다. 송지오와 김서룡, 장광효 등 관록 있는 디자이너들의 쇼가 중심을 잡아주었고, 노앙, 요하닉스, 프리마돈나 등 젊은 디자이너 브랜드가 화제를 불러 모으는 역할을 했다. 컬렉션의 질적 향상도 돋보였다. 87MM와 블라인드니스의 성장, 오디너리 피플과 병문서의 완성도 있는 컬렉션은 헤라서울패션위크의 품격을 높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다만 한 가지 갸우뚱했던 건 ‘제너레이션 넥스트 서울’이 문래동 대선제분 공장에서 열린 것이다. 신진 디자이너 브랜드에게 쇼와 함께 수주 상담과 계약의 기회를 제공하는 ‘트레이드 쇼’ 형태는 좋다. 문제는 장소다. 본진인 DDP와 너무 멀었다. DDP에서 열리는 쇼만 챙겨 보기에도 빠듯한 스케줄이었다. 하지만 아쉬움은 잠시 접기로 한다. 좋았던 기억만 들추기에도 모자란 시간이다.
Best Look 16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던 16벌의 룩.
오디너리 피플
‘부티크 호텔’을 주제로 한 오디너리 피플의 컬렉션. 그중에서도 이 차림이 유독 눈에 띈다. 고급스러운 색감, 여유로운 뉘앙스가 온전히 담겼다.
디그낙
강동준은 자메이카의 종교 신자를 이르는 ‘라스타’에서 영감을 얻었다. 독특한 실루엣이 여러 번 등장했는데, 그중 가장 현실적으로 다가온 건 바로 이 룩이다.
문수 권
오빠 부대를 부활시킨 문수 권. 1990년대 후반 유행한 더플코트를 와이드 팬츠와 매치한 모습이 귀엽다. 흰색 풍선 다발과 동그란 안경이 딱 맞아떨어진다.
카루소
묘한 분위기가 흘렀던 카루소 컬렉션. 성직자 같은 이 차림이 기억에 남는다. 흑과 백의 대비, 여기에 파란색 포인트를 더하니 절제된 멋이 흐른다.
비욘드 클로젯
관중을 클럽으로 이끌었던 비욘드 클로젯. 네온사인 같은 현란한 색감을 적재적소에 활용한 점이 인상 깊다. 소시지색 트러커 재킷은 신의 한 수다.
에이치 에스 에이치
‘소년, 학교, 폭동’을 주제로 한 디자이너 한상혁의 컬렉션. 오버사이즈 재킷과 턱시도 팬츠, 가죽 캡의 조합은 다른 어떤 화려한 룩보다도 주제와 맞아떨어졌다.
무홍
무홍 컬렉션의 주제는 10대다. 그들의 반항기와 호기심을 실험적인 실루엣으로 담아내고자 했다. 독특한 보머는 그 의도를 드러내는 동시에 실용적이다.
김서룡
김서룡의 섬세한 색감 매치가 이번 시즌에도 빛을 발했다. 특히 고급스러운 크림색과 진득한 캐러멜색의 조화는 고급 제과점의 디저트처럼 황홀하다.
병문 서
디자이너 서병문은 규칙에서 벗어난 조합을 통해 새로운 실루엣을 구현하고자 했다. 유독 눈길을 끈 건 바로 이 스웨터. 소매의 겉 부분을 보머처럼 마무리했다.
푸시 버튼
추억의 만화 캐릭터 ‘캔디’를 전면에 내세운 점퍼다. 당혹스럽지만 한편으론 귀엽다. 과감하고 키치한 푸시 버튼의 정체성을 이보다 더 제대로 보여줄 순 없다.
소잉 바운더리
소잉 바운더리 컬렉션의 주제는 1990년대에 유행하던 장르인 ‘뉴 잭스 윙’이다. 펑키한 코트와 밑위가 긴 청바지는 당장 따라 입고 싶을 만큼 쿨하다.
블라인드니스
전체적으로 트렌디한데, 과한 구석이 전혀 없다. 이 정도의 가죽 바지라면 입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스포티한 집업 장식 스웨터와 매치한 것이 결정적 한 방.
87MM
사고 싶은 아이템들이 자주 눈에 띄었다. 회색 스웨트 콤비 위에 걸친 연분홍색 퍼 코트 역시 그중 하나. 회색과 분홍색의 조합, 이제 남자들도 즐길 때가 됐다.
카이
그로테스크한 패턴, 화려한 컬러와 소재가 돋보였던 카이 컬렉션. 그중에서도 이 스웨트 세트가 세련된 인상을 남겼다. 휴대폰에 씌운 퍼 케이스는 보너스.
노앙
첫 쇼를 치른 노앙은 주 무기로 승부를 봤다. 베이식한 옷들로 런웨이를 채운 것. 특히 허리를 조여 복고풍으로 연출한 바이커 재킷이 눈길을 끌었다.
송지오
디자이너 송지오가 직접 그린 페인팅을 옷에 접목했다. 불타오르는 듯한 패턴은 남성적이며 강렬하다.
Issue
현장을 달구었던 각양각색의 이슈들.
1. 각별한 사이
디자이너와 연예인의 친분은 식상할 정도로 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얘길 하는 이유는 그 사이가 특히 각별해 보여서다. 노앙의 디자이너 남노아는 유아인과 절친이다. 대부분이 디자이너와 연예인으로서 관계를 맺기 시작하지만 이들의 사이는 훨씬 전부터 시작됐다. 이해관계가 없는 친구로 출발해 서로 크게 성장하는 과정을 지켜본 둘. 쇼가 진행되는 내내 유아인은 남노아에게 진심 어린 박수와 격한 응원을 보냈는데 그 모습이 지켜보는 사람들마저 뿌듯하게 만들었다. 친구는 아니지만 그에 못지않은 의리를 자랑하는 디자이너 연예인 커플(?)이 또 있다. 바로 송지오와 배우 차승원. 차승원은 근 10년간 송지오 쇼의 문을 열고 닫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야말로 ‘의리 커플.’
2. 오빠 부대의 귀환
서른 명 정도 조촐한 팬클럽이 런웨이 뒤에서 쉴 새 없이 모델들의 워킹을 응원했다. 문수 권 컬렉션의 주제는 ‘리마인드 리와인드’. 1990년대 한국 아이돌 팬덤에 대한 추억을 컬렉션으로 재현했다. 당시의 오버사이즈 실루엣을 새롭게 해석한 아우터들, ‘오빠’란 단어를 큼지막하게 박아 넣은 스웨터 등이 형형색색의 풍선과 조화를 이루며 유쾌한 분위기를 냈다. 피날레에서 디자이너 권문수가 선보인 룰라의 엉덩이 춤이 쇼의 방점을 찍었다.
3. 거리의 아기들
스트리트 패션도 모자라 이젠 ‘베이비 스트리트 패션’까지 갔다. 스웨그 넘치게 꾸미고 나온 아이들이 스트리트 포토그래퍼의 피사체가 된 것. 투팍처럼 머리에 두건을 두르고 체인 목걸이를 두른 꼬마, 보머와 스냅백으로 멋을 부린 아기들이 엄마 손을 잡고 DDP 정원에 매일같이 등장했다. 그런 아이들을 흐뭇한 눈으로 쫓다가도 한편으론 어른들의 욕심이 보여서 씁쓸했던 게 사실.
4. 카루소의 BGM
핀 조명이 켜지고 흰 한복을 입은 여자가 걸어 나왔다. 무대 중앙에 앉더니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창도 아니고, 성악도 아닌 오묘한 여성의 소리, 그게 이번 시즌 카루소의 배경음악이었다. 알고 보니 그녀는 전통 성악인 정가를 전공한 정마리다. 고요한 가운데 울려 퍼지는 정마리의 청아한 음성이 쇼장 분위기를 압도했다. ‘직관’이란 주제에 이보다 더 알맞은 배경음악이 있었을까 싶다.
5. 걷고 타고 찍고 즐기고
매 시즌 ‘키덜트’ 요소를 곳곳에 드러내는 에이치 에스 에이치. 이번엔 세그웨이가 등장했다. 퍼 망토를 걸친 마지막 모델이 왕 같은 자태로 ‘셀카’를 찍으며 ‘세그웨이 워킹’을 한 것. 객석의 셔터 소리는 더욱 요란해졌다.
6. 레게 스피릿
디그낙 컬렉션엔 스컬이 등장했다. 짧은 랩 공연으로 컬렉션의 문을 열어준 것. 그런데 왜 스컬일까? 그건 디그낙의 이번 주제와 연관 깊다. 디자이너 강동준은 ‘라스타’에서 이번 시즌 컬렉션의 모티브를 발견했다. 라스타는 에티오피아의 옛 황제를 숭상하는 자메이카 종교 신자 ‘라스타파리안’을 의미한다. 스컬은 스페셜 게스트답게 쇼 중간 워킹도 했다. 피날레엔 밥 말리의 ‘No Woman No Cry’가 흘렀다. 끝까지 ‘레게’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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