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graphy 김영호 Editor 이지영
hair 유로(앳폼조성아) make-up 임민영(앳폼조성아) stylist 구정란
이렇게 옷을 좋아하는 남자라면, 나도 좋다. 이토록 스타일 좋은 남자를 사귄다면, 굉장히 다정다감할 것 같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어느 저녁, 성수대교 남단에 위치한 커피빈에서 그를 본 적이 있다. 그는 잡지를 뒤적이고 있었다. 어깨 같은 매니저를 잔뜩 대동해도 모자랄 판에, 그는 혼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의외였다. 얼마 후 다시 그곳에서 똑같은 모습의 이범수를 발견했다. 그때도 그는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그 흔한 까만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리지도 않고 말이다. 인터뷰를 위해 그를 만나기 전의 기대는 그날의 기억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오늘도 그날처럼 편안할까. 오늘도 그날처럼 <아레나>를 뒤적이고 있을까.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말은 정설(定說)이 아니다. 이범수는 기자가 예상한 그대로였다. 아니, 기대보다 훨씬 더 <아레나>와의 인터뷰에 정성을 보였다. 커피빈의 그 기억으로 대화를 시작했다.
당신을 커피빈에서 서너 번 본 적이 있다. 처음에는 우연히 들렀거니 했다가, 나중엔 그곳의 주주가 아닌가 싶었다. 원래 그렇게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기나.
아, 나를 봤나? 커피 마시는 즐거움 중 하나가 머리를 비우는 시간이라는 데 있는 것 같다. 커피빈은 일주일에 다섯 번은 가는 것 같다. 이젠 사람들이 알아보는 것에 익숙해졌기 때문에,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혼자 커피도 마시고, 때로는 극장에도 간다.
검은 양복 입은 매니저들을 잔뜩 대동하고 다닐 줄 알았는데, 의외다.
그런 거 정말 싫어한다. 너무 과하게 특별한 사람처럼 다니는 거, 싫다.
드라마를 한다고 해서 솔직히 섭섭했다. 나처럼 당신을 ‘영화인’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당신의 드라마 출연은 일종의 배신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지 말아달라. 드라마 출연은 일종의 나들이라면 나들이다. 영역 확장 정도로 생각해주면 고맙겠다. 좋은 배우가 되는 방법에 있어서 공식화된 정도는 없는 것 같다. 결국 나는 배우 이범수의 길을 잃지 않겠지만, 내 스스로 새로운 매체에 대한 자극을 받고 싶었다. <외과의사 봉달희>는 일단 책이 재미있었다. 이번 주 토요일에 첫 촬영이 시작되는데, 꽤나 낯설 것 같다. 나는 그 낯설음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드라마뿐만 아니라 어쩌면 그리 바쁜가. 본인이 출연한 세 편의 영화가 줄지어 개봉하고 있다.
<조폭 마누라 3>를 제외하고는 죄다 우정 출연이다. <미녀는 괴로워>는 <오! 브라더스> 감독과 3년 전에 약속한 걸 올해 찍게 된 거고, <언니가 간다> 역시 2년 전에 약속한 거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세 편의 영화가 동시에 개봉하게 되면서 마치 굉장한 다작을 한 것처럼 되어버렸다. 기사에 ‘우정 출연’이라는 말을 꼭 넣어줘라.(웃음)
의리와 인연을 죄다 챙겨가면서 사는 타입인가 보다. 작품 선택의 기준이 있다면.
정성스럽지 않은 건 싫다. 시나리오에서부터 이미 정성을 다한 것인가를 본다. 물론 시나리오, 감독, 배급, 마케팅까지 모두 내 기준에 맞는다면 그게 최상이겠지. 하지만 100%를 기대할 수 없다면, 일단 어떤 작품이든 정성이 우선이다.
이제는 시나리오만 보고도 되겠다, 안 되겠다는 감이 올 것 같다.
의미 있는 질문이다. 하지만 되겠다, 안 되겠다가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이 될 수는 없다. 흥행에 있어 100% 자유롭다고는 할 수 없지만, 100% 흥행지수만으로 작품을 선택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슈퍼스타 감사용>은 장사가 되겠다 싶어서 출연한 영화는 아니다. 이런 이야기는 꼭 하고 싶다는 생각, 이런 이야기는 할 만하다는 자신감으로 출연을 결정했다. 내가 관객들에게 꼭 우스운 이야기, 그들이 좋아할 만한 연기를 전달해야 할 의무는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맡은 캐릭터가 재미는 없을지라도, 흥미는 있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조폭 마누라 3>의 기대감은 어느 정도인가.
오락영화니까 재미있어 할 것 같다.
자신 있게 말하건대, 나는 당신이 나온 영화를 다 봤다. ‘경찰 2’역으로 나온 <개 같은 날의 오후>부터 <지상만가>의 웨이터, <퇴마록>의 바람둥이까지. <하면된다>에서 독극물을 먹고도 살아남아서는 “밤새 피똥 쌌어유”라고 말하던 당신의 연기를 잊을 수 없다. 최근 작품 중에서는 <짝패>를 가장 인상 깊게 봤다. 본인이 생각하는 ‘베스트 3’를 꼽아달라.
일단 네 편을 꼽고 싶다. <짝패>, <음란서생>, <슈퍼스타 감사용>, <오! 브라더스>다. <짝패>는 나도 꽤나 재미있게 찍은 영화다. <음란서생>도 마찬 가지고. <오! 브라더스>는 의외로 진짜 어렵게 찍은 영화다. 내가 관객들에게 ‘조로증에 걸린 어린아이’라는 것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어야 했다. 너무 어린아이로 비춰지면 유치하고, 반대로 너무 무거우면 ‘저게 어른이지, 무슨 어린애야?’ 할 수 있는 역할이었다. 그 중간 톤을 잡는다는 게, 정말 어려웠다.
<음란서생>의 광헌은 “체구는 크지 않지만 기골이 장대한 데다 성품이 아주 잔인하다”고 소문난 캐릭터였다. 그는 낮이면 의금부 도사로, 밤에는 음화를 그리는 삽화 작가로 이중생활을 즐긴다. 따뜻함과 차가움. 실제의 당신도 두 가지 면을 모두 가지고 있나.
그런 것 같다. 우리가 일반인이라면 후덕함이 미덕이 되겠지만, 나는 배우는 섬세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긍정적으로 보면 꼼꼼함, 섬세함, 정확함으로 비춰질 수 있겠고, 부정적으로는 까칠함, 까다로움으로 보여질 것 같다.
모 배우가 “배우는 싸가지 없어도 된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아마 같은 맥락의 대답인 것 같다. 나는 마찬가지로, 기자도 착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마냥 좋은 얘기만 늘어놓을 순 없으니까. 말 나온 김에, 배우로서의 자의식을 묻고 싶다.
이범수라는 배우는 고정화되어 있지 않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있다. 10년 넘게 연기 생활을 해오면서 하나의 이미지에 국한되지 않기 위해 노력해왔다. 처음에는 코믹한 연기, 웃기는 캐릭터를 맡아오다가, 차차 부드럽고 평범한 남자의 연기 쪽으로 옮겨왔다. 그리고 나서 지금까지. 늘 ‘변화’를 염두에 두면서 작품을 고르고, 연기한다. 이범수라는 배우의 스펙트럼을 넓히고 싶다.
나는 개인적으로 당신의 이죽거리는 연기가 마음에 든다. 본인은 어떤 역할이 마음에 드나?
나 역시 강한 역이 마음에 든다.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유약한 캐릭터보다는, 강한 역이 접근하기 편하다.
연기는 할수록 알 것 같나, 아니면 그 반대인가.
연기는 할 수록 알 것 같다기보다는, 하면 할수록 넓다는 생각은 한다. 연기라는 게, 생각보다 훨씬 더 넓은 세계를 가지고 있더라.
<슈가도넛>이라는 밴드의 리더가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조그마한 구멍이 있어서 파봤더니, 거기에 생각보다 훨씬 더 큰 무엇이 있더라고. 그래서 계속하게 되는 것 같다고.
물론이다. 연기는 나에게 재미고, 오락이고, 취미고, 놀이고, 휴식이다. 그래서 연기가 좋다. 좋아하지 않으면 할 수가 없다. 좋아하는 일도 하다 보면 하기 싫을 때가 있는 법인데,나는 그럴 때마다 내가 배우를 꿈꾸던 과거를 떠올린다. 배우가 되기를 얼마나 간절히 바랐는지를 생각한다.
변화하는 환경에 어느 정도 유연한가. 솔직히 나는 매체와 기자들이 너무 많은 지금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소박했던 시절이 그립다.
재미있는 질문이다. 나 역시 어느 순간 인터뷰를 하다 보니, 인터뷰가 싫어진 적이 있다. 내가 뭐라고 얘기해도, 글 쓰는 사람이 의도한 방향대로 기사가 나오곤 했으니까. 지금은 즐기려고 노력한다. 언제 또 바뀔지는 모르겠지만.
<태양은 없다>의 배역을 따내기 위해 감독을 직접 찾아가는 등 삼고초려를 했다고 알려져 있다. 주연 배우로 거듭난 지금의 이범수는 그럴 필요가 없겠다. 연기하는 환경이 훨씬 편해지지 않았나.
물론이다. 환경은 점점 좋아지는 것 같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생각하는 것처럼, 대우가 달라졌다든지 하는 건 별로 못 느끼겠다. 예전에 나를 하찮게 대했던 사람이, 내 위치가 나아짐으로써 깍듯해진 것을 느낀 적은 있으나, 신경 쓰지 않는다. 나를 알아주지 않을 때도 나는 늘 당당했으니까. 나에 대해 잘 모르니까 무반응을 보였을 수는 있었겠지. 지금은 나를 아니까 반응을 보이는 것일 테고.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점점 비중 있는 주연 배우로 성장할수록, 외로워질 것 같다. 외로움을 좀 타나.
외로움을 느끼기는 한다. 나도 감성이 있는 사람이니까. 그런데 성격이 워낙 심약하지가 않다. 독립심도 강하고, 정신력도 강한 편이다. 나는 오히려 자책하는 사람들을 보면 질책하는 스타일이다. “그럴 시간에 더 노력을 해라”라고 말하는 편이다. 내 사고방식은 심플하다. 포기하지 않을 거면, 노력하자는 주의다.
흔히 오랫동안 한 분야에서 성장해온 사람은, 두 부류로 나뉜다. 자신의 과거를 경전 읊듯 하는 사람과, 과거 얘기라면 입에 올리기조차 꺼리는 경우가 많다. 당신은 전자인가, 후자인가.
과거를 얘기하는 거? 싫어하지는 않는다.
예상 밖이다. 단역으로 출연했던 영화들, 이를테면 <남자의 향기> 같은 작품은 개봉관에 가서 보지 않았다고 들었다.
그것으로 스스로를 평가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힘을 준 작품이 아니었으니까.
알 것 같다. 나도 스스로 빅딜이 아닌 기사는, 사실 제대로 챙겨 보지 않을 때가 많다.
그냥 한 건데, 그걸 가지고 자꾸 왈가왈부하면 사실 좀 쑥스럽다.(웃음)
배우로 살아가면서 가장 힘든 건 무엇인가.
불규칙한 생활? 틈만 나면 본능적으로 나만의 공간을 확보하려고 한다. 화장실에 가면 화장실까지 따라오곤 하니까. 물론 관심은 매우 고맙지만, 나도 나만의 시간과 공간을 갖고 싶을 때가 많다.
콤플렉스는 없나.
글쎄….
당신도 나만큼이나 자신감이 있는 사람인 것 같다. 노력해서 안 된 일도 있었나.
마음을 먹어야 하는데, 웬만해서는 마음을 먹지 않는다.(웃음) 얼토당토않은 건 아예 마음먹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한번 하겠다고 생각한 일은 반드시 해낸다. 내가 좀 강한 편이다.
배우로서 살아가는 원칙 하나만 얘기해달라.
영혼을 팔고 싶지는 않다는 거다. 거창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돈을 쫓고 싶지 않다는 얘기다. 옛날부터 가지고 있는 나의 원칙이다. 정말 당당한 배우이고 싶다. 내가 사라지는 순간까지, 한 시대를 풍미했던 배우이고 싶다. 호기 어린 말로 비춰질지 모르겠지만, 돈 때문에 아무 연기나 하고 싶지는 않다.
배고파진다 해도?
배고파진다 해도. 나는 기질상 그런 변죽이 있는 놈이 못 된다.
다행히 이제 어느 정도 럭셔리한 삶을 누릴 수 있게 됐다.
럭셔리한 거, 싫어할 사람 없지 않을까? 그것도 내가 누릴 수 있는 기쁨이라면 기쁨이다. 사람들은 왜 밥 먹을 때 밥풀 떨어뜨리면 “얘야, 식사 습관을 바르게 가져야지!” 하고 말하면서 옷차림이 흐트러진 것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지 모르겠다. 어깨 부분이 크다거나, 유난히 팔이 긴 옷을 입고 다닌다거나 하는 건 왜 고치지 않는 걸까? 세탁소에 가지고 가면 몇 천원에 해결되는데 말이다.
정장이 80벌도 넘는다고 들었다. 폴 스미스를 좋아한다고도 들었고. 이범수의 스타일을 정의해본다면.
패션 이야기를 엄청 좋아한다. 옷을 입는 원칙이 있다면, 디자인이 화려하면 반드시 단색으로 간다는 거다. 단순한 디자인은 그 반대고. 폴 스미스, 프라다, 돌체&가바나를 좋아한다. 단언컨대, 나는 정장을 매우 좋아한다. 매일 정장만 입으라고 해도 신나서 입을 사람이다. 그런데 문제는, 영화배우 이범수가 정장을 좋아한다는 걸 알릴 길이 없는 거지. TV 프로에 만날 정장만 입고 나갈 수도 없는 거고. 항상 정장 입은 회사원 역할만 맡을 수도 없는 거니까.
오늘 <아레나> 화보가 정장 입은 이범수를 알리겠다.
고맙다. 아마 나는 정장 못 입으면 속이 터져버릴 것이다. 그런데 이번엔 내가 한 가지 묻자. <아레나>에서 나를 인터뷰하라고 했을 때, 어땠나. 남성 패션지에서 생각하는 이범수는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다.
옷 좋아하는 사람! 약속하겠다. 오늘 이 인터뷰로 옷 잘 입는 이범수를 제대로 알리겠다. 나는 당신의 스타일을 좋아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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