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플레이보이>는 변화를 줬다. 책 어느 구석에도 여자의 누드를 싣지 않겠다는, 정체성을 전복시키는 의지랄까. 물론 예쁜 여자들이 여전히 헐벗고 나오긴 한다. 이불, 베개, 남자 셔츠, 조막만 한 속옷 같은 걸로 가릴 건 가리는 정도? 책은 예전보다 ‘예뻐’졌다. ‘커피 테이블 북’으로 삼아도 민망하지 않은, 적당히 예쁜 사진집.
<플레이보이>는 어쩌다 이런 결정을 하게 되었을까 생각하다 보면, 결국 2016년을 이야기하게 된다. 섹스가 도처에 널린 세상, 스마트폰으로 포르노를 보는 건 은행 앱으로 송금하는 것보다 쉬운 일일 수도 있으니까. 시류에 맞춰, 패션계에도 흥미로운 몇몇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디젤의 니콜라 포미체티는 이모지, 해시태그, 모델들의 인스타그램 ID를 대수롭지 않게 활용한 가벼운 광고를 만들었는데, 이 광고는 애초부터 SNS와 온라인에 특화된 형식이다. 재밌는 건 포르노 사이트인 포른허브(Pornhub), 유포른(Youporn), 성인 데이팅 앱인 틴더(Tinder), 그라인더(Grindr)에 광고를 넣기로 한 것. 질퍽한 섬네일 이미지가 난립하는 와중에 디젤의 배너 광고가 불쑥 튀어나온다. 실컷 포르노를 본 남자에게 디젤의 드로어즈를 구입하도록 권하는 친절함이란!
J.W. 앤더슨은 지난 1월 10일, 2016 F/W 컬렉션을 게이 데이팅 앱인 그라인더에서 중계했다. 게이와 스트레이트, 남자와 여자 할 것 없이 그라인더로 몰려들었고, 생중계되는 컬렉션을 감상하며 채팅을 즐기는 기묘하고도 흥미로운 상황들. 그라인더는 작년 말부터 디올, 루이 비통, 라프 시몬스, 아크네 스튜디오 등을 홍보하는 PR 에이전시인 ‘PR 컨설팅’이 홍보를 맡으면서 변화를 겪는 중이다. 패션과 연계한 이벤트가 더욱 늘어날 수밖에 없을 것.
디젤과 J.W. 앤더슨의 경우가 그 어떤 섹스 마케팅보다 흥미로운 이유는 섹스가 강조되는 것이 아니라 뉴 미디어 채널로서 수단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태도 때문이다. 포르노 사이트, 데이팅 앱이 가진 본질적인 의도에 개의치 않고,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몰리는 ‘그곳’을 택했을 뿐인 거다.
실제로 니콜라 포미체티와 조너선 앤더슨은 한 인터뷰에서 방문객 수가 많은 곳에 광고할 뿐이라는 ‘쿨’한 답변을 내놓았고, 덧붙여서 이 같은 플랫폼들이 현재의 유스 컬처를 가장 잘 반영하는 것이라고 했다. 물론 섹스와 젠더 이슈가 꽤 중요한 두 브랜드에 있어서 아주 영리한 선택인 것은 확실하고, 속물들이 들끓는 패션계에 한 방 먹인 사건으로 기록될지도. 작정하지 않고, 가볍고 쉽고 일상적인 섹스 마케팅이 늘어날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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