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으로 드러나는 게 다가 아니라는 걸 아무리 되뇌어도 그 진가를 알아차리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속내까지 볼 수 있는 깊은 심미안을 가진 이들은 분명 존재한다. 건축가 김찬중의 얘기다. 겉으로는 평범해 보이는 슈퍼마켓 건물이지만, 안으로 들어서면 높은 박공지붕(삼각 지붕)과 마당이 있는 오픈 스페이스가 나타난다. 그가 아니었다면 이 공간은 지금까지 폐창고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그의 통찰력 덕분에 거듭난 ‘더시스템랩’은 건축가 김찬중이 재도약하기에 충분한 밑거름이 되었다.
오픈 스페이스
어떻게 이런 공간을 찾았나? 도심에서 만나기 힘든 규모다.
지금은 이렇게 멋진 공간으로 재탄생했지만, 전에는 폐허나 다름없었던 탓에 2년 동안 비어 있었다. 분당의 부모님 집을 방문하던 날 지나가다 우연히 평범한 슈퍼마켓 건물 위층을 올려다보게 됐다. 호기심에 부동산에 문의했더니 창고나 다름없는 공간이라고 소개하더라. 그야말로 거의 쓰레기통 수준이었다. 천장을 뜯으면 뭐가 나올 것 같았다. 무엇보다 마당이 있는 게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상상력을 발휘했다. 그 결과 지금의 사무실이 완성된 거다.
널찍한 공간 덕분에 일의 능률도 오를 것 같다.
처음에는 점유 공간의 밀도가 더 낮았다. 5명으로 시작했으니까. 인원이 늘어나면서 점유 공간이 많이 줄었다. 딱 10명까지는 좋았는데, 13명 이상 되니까 책상 배치 공간이 잘 안 나오더라.
홀로 서기 이후, 직원이 5명에서 21명으로 늘지 않았나. 성공했다고 볼 수 있겠지? 어찌 보면 공간 자체가 가진 힘 덕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재도약 공간이 도움을 준 공간처럼 느껴지니까.
맞다. 전에는 클라이언트를 찾아다니는 입장이었는데 요즘은 클라이언트가 먼저 찾아온다. 물론 어느 정도 신인 티를 벗은 이유도 있겠지만, 공간의 힘을 부정할 수는 없는 것 같다. 얼마 전에는 모 회장님이 기사한테 10분 안에 내려올 테니 건물 앞에서 대기하라고 지시해놓고 막상 안으로 들어와서는 2시간 넘게 놀다 가셨다. 밖에서 보는 것과는 다른 반전 덕분이랄까.
오픈 스페이스도 이 공간이 지닌 매력 중의 하나다.
건축주도 방문하고, 협력사도 방문하는 날에는 생기 넘치고 역동적인 느낌이 든다. 단점은 말이 섞인다는 것 정도.
미팅이나 회의는 어떻게 할까 궁금해진다.
당연히 모두 오픈된다.
그럼 설계비 이야기는 어떻게 하나? 모든 귀가 열려 있으니 건축주 입장에서는 깎아달라는 말을 꺼내기 어렵겠다.
비밀의 방 따위 존재하지 않으니 이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직원 모두가 안다. 미팅 때 오가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배우는 것도 많을 거다. 이를테면… 먹고살기 쉽지 않다는 것?(웃음)
크리에이티브한 일을 하는 데는 공간 자체가 받쳐주는 힘이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공간은 딱이다. 내가 느끼듯이 미니멀한 공간의 부피감은 타인에게도 깊은 인상을 줄 거다. 도심 속에서 마치 공장을 개조한 느낌이랄까. 직원들의 반응은 어떤가?
잘 봤다. 사무실 같은 느낌을 내기보다는 공장에서 쓰는 장비들을 가져다 쓰려고 했다. 장비 운영을 할 누군가가 필요하고… 그러다 보니 잘 안 됐다. 2년 후에는 본격적으로 다시 해보려고 생각 중이다. 음, 천장고와 창의성이 비례한다고 말하지 않나. 별것 아닌 것처럼 보여도 높은 천장이 일하는 데 도움이 많이 된다. 모두가 느끼는 거다.
그런데 천장이 높으면 냉난방이 비효율적일 수 있지 않나?
그렇긴 하다. 다만 정서적 가치에 돈을 더 들이는 것이 맞는다는 방향으로 생각이 흘러가고 있다. 난방비를 좀 더 내더라도 정서적 가치를 높일 수 있다면 돈이 아깝지 않다고나 할까. 내가 머물고 싶은 공간이라는 의미가 더 중요해지는 거다. 배만 부르면 됐던 옛날과 달리 지금은 혀끝에서 느껴지는 맛의 경험이 더 중요한 것과 같은 이치다. 우리뿐 아니라 자신의 취향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난 덕분에 작은 부티크들도 일이 많아졌다.
김찬중의 취향
토머스 헤더윅(Thomas Heatherwick)의 의자나 뱅앤올룹슨의 오디오 등이 취향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인다. 내부 공간은 리처드 로저스(Richard Rogers)나 렌초 피아노(Renzo Piano)의 사무실과 비슷한 느낌이 들기도 하고.
취향이라기보다 일반적으로 유명한 것들을 다 사용해보면서 느끼자는 취지다. 커피도 때로는 블렌딩한 것만 마신다든가. 사람들이 선호하는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걸 파악해야 하므로 일부러라도 사용해보는 거다. 왜, 어떤 점이 좋은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으니까. 아마 내가 음악에 조예가 깊었다면 더 좋은 오디오를 들여놨을 거다.
밤에 음악을 크게 틀어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겠지?
그렇다. 층간 소음을 걱정할 필요도 없고 좋다.
와인 셀러도 보이는데 사무실에서 와인도 마시나?
금요일마다 해피아워 같은 걸 진행하는데 와인을 많이 마셨다. 바로 아래층에 슈퍼마켓이 있으니 요즘은 맥주를 더 자주 마시게 되더라. 우리끼리는 아래층에 큰 냉장고가 있다고 말한다.(웃음) 따로 사다 놓을 필요도 없다. 날씨가 좋을 때는 마당에서 바비큐 파티도 하는데 계단 몇 개만 내려가면 재료가 다 있어서 그렇게 편할 수가 없다. 어딜 가도 이런 냉장고는 없을 거다.
술 많이 늘었겠다. 5~6년 전에는 잘 마시지 못하지 않았나. 보통은 1차에서 오바이트하면서 전사하는 타입이었는데. 부인이 데려간 적도 있었고. 하하.
지금은 오바이트 안 한다. 무려 새벽 2~3시까지 버틴다. 아내는 아예 날 기다리지 않고 잔다.(웃음)
다른 이야기해보자. 좋아하는 건 뭔가?
자동차와 시계. 한때 꿈이 자동차 디자이너였다. 하지만 아버지가 미대 진학을 반대하셔서 건축과에 갔다.
미대에 가고 싶었다고?
어머니가 화가다. 거의 우리나라 최초로 누드 크로키를 그리셨다. 인간의 몸이 자연의 곡선을 다 가지고 있다는 말을 늘 들으면서 자랐고, 그래서 그림에 자신 있었지만 아쉽게도 그림을 배우지는 못했다.
어떻게 보면 지금의 자유 곡선이 어머니의 영향을 받은 것일 수도 있겠다.
그렇다. 자동차도 다 곡선인 걸 보면. 어릴 때부터 익숙했던 것 같다. 집에 어머니 누드 작품이 많이 걸려 있는데 종종 집을 방문하는 손님들의 오해를 산다.(웃음) 그래서 최근에는 다른 작가들의 그림을 사기 시작했다.
시계를 좋아한다고 했는데 지금 차고 있는 시계는 뭔가?
파네라이. 마니아적인 성향이 강하고, 가장 좋아하는 시계다. 파네라이에 대해서는 나보다 내 아내가 훨씬 더 많이 알고 있다. 나는 캐주얼한 지샥(G-Shock)부터 IWC까지 두루 좋아한다. 다만 IWC는 좀 더 나이가 들면 차야겠다는 생각이다. 시계는 아내와 공유하므로 여러 개 가지고 있다.
자동차와 시계는 아내들이 가장 경계하는 취향 아닌가?
다행히 아내도 나만큼 좋아한다. 산업 디자인을 하기 때문에 관점이 다르더라도 관심사가 비슷하니 대화가 잘된달까. 덕분에 취향은 꽤 잘 맞는다. 여행지에서도 함께 쇼핑하는 편이다. 대부분 남자는 쇼핑을 싫어한다는 편견이 있지 않나. 나는 아니다. 아이쇼핑도 하루 종일 할 수 있다.
하루 종일이라니… 사는 것보다 보는 걸 더 좋아하는 건가?
그렇다. 사실 쇼핑하는 이유는 사람들을 관찰하는 게 재미있어서다. 기본적으로 경치보다는 도시 여행이 좋다. 사람들이 뭘 먹고, 뭘 하는지 보는 것. 결국, 내가 하는 일이 삶에 관한 것이지 않나. 도시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 대부분이니까. 근데 이 얘길 계속하면 다시 일 얘기가 될 텐테?
그럼 안 된다. 여행 얘기나 계속 하자. 얼마나 자주 다니나?
1년에 5~6번 정도는 해외에 나간다. 물론 대부분 출장 때문이다. 여행을 좋아하긴 하지만 시간이 없어서 자주 못 간다.
선호하는 여행지가 있나?
자주 가는 곳은 홍콩이다. 영어를 쓰니 편하다.
시계 사러 가는 건 아니고?(웃음)
하하. 가끔 산다. 홍콩은 아내와 함께 쇼핑하는 즐거움이 있고 저녁에 클럽도 가는데 일단 여행은 스케줄이 없어야 한다는 주의라서 즉흥적으로 움직인다. 그런 의미에서 좋아하는 여행지는 교토와 오사카다. 일본인들이 해놓은 걸 보면 그냥 감탄사가 나온다. 음식도 예외는 아닌데, 철로 밑 다 쓰러져가는 식당에 들어가도 맛이 끝내준다. 즉흥적으로 다니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다.
꿈 만들어주는 사람
온전히 쉬고 싶을 때는 뭘 하나. 뭘 ‘하느냐’는 질문 자체가 아이러니하지만.
드라마를 본다. 웬만한 한국 드라마는 다 봤다. TV 앞에 붙어서 종일 전화도 안 받고 8편씩 몰아서 보니까. 드라마가 좋은 건 삶의 판타지를 그리기 때문인데, 최근에 가장 재미있게 본 건 <그들이 사는 세상>이다. 2008년에 방영한 작품인데 심리 묘사가 정말 뛰어나다. 그리고 <내 딸, 금사월>도 보고 있다. 주인공이 건축가로 나오더라.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건축가를 그리는 모습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건축학개론>이 가장 리얼리티가 있었다. 정재은 감독의 <말하는 건축가>나 <말하는 건축 시티:홀>도 잘 표현했고. 그 외 일반적으로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표현하는 건축가는 자기 주도적인 성향이 강하다. “나 안 해!” 이러면서 재떨이도 던지잖나.(웃음) 하지만 우리는 자본가가 아닌, 우리가 이룬 꿈을 이용해 자본가의 꿈을 만들어주는 사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건축가는 철저히 서비스 업종으로 분류된다. 그러니 카리스마 따위로 클라이언트를 누를 게 아니라 잘 듣고, 잘 설명해서 설득하는 게 중요하다.
그래도 도면을 던져본 경험이 없진 않을 것 같다.
설계 포기각서를 지금까지 4~5번 썼는데, 다른 클라이언트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누구 한 사람 때문에 다른 사람의 일을 망칠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포기하는 게 맞다고 본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클라이언트가 백지수표를 내밀더라. 원하는 금액을 적으라고. 별 생각이 다 들었지만, 일단 적었다. 그 뒤의 상황은… 끔찍했다. 클라이언트가 원하면 때와 장소를 막론하고, 내 상황은 뒤로한 채 언제든 달려가야 했다. “나는 당신이 해달라는 대로 다 해줬는데, 왜 당신은 그렇지 않느냐”는 말에 도저히 반박할 수 없었다. 다만 이렇게 계속 가다가는 다른 클라이언트들에게 피해가 가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 일을 그만뒀다. 그때의 경험이 큰 배움이 됐다. 생각해보면 매 순간 어려움에 부딪친다. 어떤 일이든 마찬가지겠지.
결국, 다시 일 얘기네.
그래서 아내가 싫어한다. 하하.
폴 스미스 플래그십 스토어를 보면 존경스럽다. 우리나라의 몇 안 되는 프리폼 건축(자유로운 형태의 비정형 건축)을 많이 추구했고, 그걸 시공하는 사람 중 한 명이니까. 때문에 디테일이나 시공 부분에서 낭패를 본 적도 많을 거라 여겨진다.
물론이다. 건축가는 절대로 예산 문제를 피할 수 없다. 새로운 형태나 시공 방식을 제안해서 좋은 결과를 얻은 건 예산 안에서 완성한 프로젝트들이다. 예산을 넘어가면 줄이는 게 쉽지 않으니 결국은 퀄리티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예산 안에서 구현할 수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크랙이 생기거나 형태적인 불안전성이 발생하면 그동안 벌어들인 걸 한 방에 날릴 수도 있다.
자유 곡선을 사용하는 것이 보기는 좋지만, 방수나 비용 등의 문제로 건축가 대부분은 감히 시도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김찬중은 용감하다. 방법은 알더라도 건축적으로 어떻게 풀어나가느냐 하는 문제는 쉽지 않은 작업이니까. 아마도 과감한 도전이 지금의 김찬중이 존재하는 이유일 거다.
대부분 제시한 예산 안에서 가능하다고 하면 우리와 함께하고 싶어 한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공사 비용을 줄일 수 있을지 미리 시뮬레이션해보고 디자인 과정에서 풀어야 하는데… 그게 굉장히 어렵다. 늘 어렵지.
일본 가서 베껴오면 쉽겠지만 아무나 할 수 있는 걸 한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나. 물론, 안전하고 돈도 많이 벌겠지만 한국에서 자신만의 프리폼 건축을 구축했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
솔직히 일은 되게 힘들다. 쉬운 일이 하나도 없다. 건물을 지을 수 있을 만큼 인생 황금기에 있는 사람들을 상대해야 하는 일이다. 그런 분들을 상대하면서 내 인생의 황금기는 언제 올까 생각한다. 내 집은 내가 안 지을 거다.
그게 될까?
가끔 모임에 나가면 여기 모인 사람 중 한 명에게 내 집을 맡기겠노라 말한다. 나도 누려보고 싶다. 그러면 다들 미쳤다고 하더라. 굉장히 피곤한 클라이언트가 될 거라는 우려와 함께.(웃음)
지금이 황금기라고 생각 안 하는 건가?
독립한 지 이제 4년 됐다. 첫해는 빚을 갚았고 두 번째는 이제 키워보자는 마음으로 열심히 임했고, 그다음은 어느 정도 컸다고 생각했고, 이제 돈을 좀 벌었지만 아직 황금기라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세상에 영원한 건 없다는 걸 안다. 나이가 들면 일도 어려워진다. 처음 같이 고생했던 내 오른팔들에게도 내가 없어지더라도 알아서 잘살 수 있을 만큼 기반을 마련해두라고 얘기한다. 황금기가 있다는 건 그 반대도 있다는 얘기 아니겠나. 인생은 불안한 거다. 그래서 재미있지만.
인생은 불안해서 재미있다?
그런 의미로 그해 번 돈은 그해에 다 쓰자는 주의다. 직원들에게도 파격적으로 보상해준다. 인센티브가 700~800%인데, 이런 곳 별로 많지 않을 거다. 고생한 직원들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최고는 경제적 보상이니까.
함께하는 스태프의 중요성을 알고 있는 것 같다.
한 번 망해봤으니 그 위험도 안다. 망하는 위험이 아니라 진짜 내 스태프가 필요하다는 것 말이다. 그들이 각자 스스로 오너라고 생각하며 움직이는 모습을 볼 때 행복하다.
건축가 재정립
인생은 끝없는 공사의 시작이다. 우리는 자신만의 성을 지으며 살아가고, 공사를 한창 진행하고 나서야 깨닫곤 한다. 더 나은 건축 방식이 있었다는 것을. 건축가 장순각이 유별난 성을 짓고 있는 건축가들을 만나 그들의 건축 인생을 구성하는 재료와 방법에 대해 묻고 답하는 시간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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