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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티는 힘

최지만이 LA 에인절스와 계약했다. 6년여 동안 그가 원한 건 딱 하나였다. 한 단계씩 밟아 드디어 마지막 벽을 넘었다. 로키 산맥보다 커 보이는 벽이었다. 메이저리그행 발표를 듣는 순간, 그의 머릿속엔 마이너리그 시절이 다큐멘터리처럼 흘러갔다.

UpdatedOn February 24, 2016

LA 에인절스 유니폼은 
본인 소장품.

LA 에인절스 유니폼은 본인 소장품.

LA 에인절스 유니폼은 본인 소장품.

본고장 야구를 접하기 위해 미국으로 떠난다. 처음에는 벽을 느끼지만 이내 불굴의 의지로 성공한다. 드디어 메이저리그 경기장에 선다. 모두의 예상을 뒤집고 활약한다. 청춘 야구 만화의 익숙한 전개다. LA 에인절스에 뽑힌 최지만도 그렇게만 바라봤다. 미국에 갔고, 트리플 A에 섰고, 결국 메이저리거가 된 한국 야구선수. 어쩌면 청춘 야구 만화의 뜨거운 장면만 쉽게 넘겨보려 한 건 아닐까. 장면과 장면 사이, 더 많은 사연이 전집만큼 숨겨져 있다. 최지만은 장면과 장면 사이를 더 주목한다. 기억한다. 그때 그 절실함이 자신을 버티게 했다고 말한다. 영화 <짝패>에서 장필호는 이죽거리며 말한다. 강한 놈이 오래가는 게 아니라 오래가는 놈이 강한 거라고. 최지만은 그 말을 몸으로 증명했다. 청춘 야구 만화 주인공 같은 얼굴로 그가 말한다. “안 된다는 사람들의 시선을 바꾸고 싶었다.” 뜨거운 장면이다.

일단 먼저 축하한다. 제일 인상 깊었던 축하 인사가 있었나?
어머니가 ‘이제 다 왔다. 좀만 더 버티면 될 것 같다’고 한 말이 기억에 남는다. 스스로도 대견하다. 마이너리그 간 동기들이 빨리 포기하고 한국에 많이 들어왔다. 나도 포기할까 생각했지만 한 단계를 잘 버텨서 산 넘은 게 잘한 거 같다.

처음 발표 이후 시간이 좀 지났다. 당시와 지금, 마음 상태가 달라졌나?
마음가짐은 똑같은데, 사람들이 작년 이맘때와 표정이 많이 다르다고 한다. 항상 웃는다고. 난 똑같다고 생각하는데 변하긴 했나 보다. 애들이 장난으로 기름기 많이 올랐다고 하고. 항상 부담은 느낀다. 부담감 갖지 말고 재밌게 하면 된다.

 

매년 연말이면 트리플 A에 있는 선수들 표정이 좋았다 나빴다 하겠다.
항상 그렇다. 경우의 수가 너무 많다. 우리도 모르는 룰이 굉장히 많다. 한 백 가지 넘으니까. 룰5도 있고, 드래프트도 있고, 트레이드도 있으니까. 그런 상태에서 갑자기 발표 들으니 너무 웃겼다. 사실 예지몽을 꿨다. 기자회견 꿈을 5일 동안 세 번 꿨다. 볼티모어 유니폼을 입는데 입지 말라는 거다. 대신 하얀 걸 빨리 입으라고. 그 꿈을 꾸고 부정적 마음이 있었다. 나는 볼티모어에선 안 되나? 연말이면 올라가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매번 꿈꾼다. 시선들, 지인들 기대감이 스트레스 주긴 한다. 그래도 그 스트레스가 어떻게 보면 내겐 열심히 할 수 있는 동력이다.

미국으로 갔을 때, 처음에는 곧 나도, 이런 마음이었을 테니까.
그런 건 아니었다. 처음 루키였을 때 위로 일곱 단계가 있었다. 그 단계를 막 빨리 올라가야지, 하는 마음보다는 한 단계, 한 단계 올라가자는 생각이 컸다. 그러다 허리 수술하고 3~4년 차가 되면서 어느 정도 가까워지니까 부담감이 생기더라. 올라가야 하는데 못 올라가니까. 한 단계씩 올라갈 땐 올라가는 기쁨이 있었는데 트리플 A에선 마지막 단계가 너무 높은 거다. 점프해도 안 되고. 산처럼 높았다. 트리플 A에 가서 좌절할 때도 내년에 더 잘하라는 벌이자 약이라고 생각하고 더 열심히 하자, 했다. 그게 작년 초인데, 또 발목이 부러지고….

이런.
그때 멘털 코치와 많이 얘기했다. 멘털 코치는 내 멘털이 붕괴될 줄 알았다더라. 그런데 내가 하루 이틀 지나고 일어서니 놀라더라. 그런 면이 내 장점이다. 빨리 좌절하지만 오래가지 않는다. 그냥 인정하고, 뭐 어쩌겠어, 하면서 빠져나온다. 물론 혼자 있을 땐 힘들다. 잘 때 힘들었다. 자꾸 생각하고 괴로워하고.

미국 생활하며 많은 고비가 있었겠다. 포수로 갔는데 수술해서 1루수로 바뀌기도 했다.
척추를 수술했다. 포수형 수비수인데 방망이 잘 쳐 얘는 슈퍼스타 되겠다고 했다. 그랬는데 갑자기 1루를 보라니까 배신감 같은 걸 느꼈다. 그런데 왜 포수를 못 보는지 듣고 나서 하루 만인가, 뭐 어쩌겠어, 하면서 적응했다.

어릴 때부터 잘 적응하는 성격이었나?
야구 하면서 많이 바뀌었다. 원래는 소심한 A형이었는데 야구 하면서, 미국 가서 많이 변했다. 미국에선 뭐라 하는 사람이 없다. 한국에선 누군가 뭘 하면 저 사람 뭐야? 하는 시선이 있잖나. 미국은 다른 사람이 뭘 하든 상관하지 않는다. 그런 점 때문에 더 변했다.

그런 자유로움을 긍정적으로 생활에 적용했다.
난 긍정적으로 바꾸자, 하면 더 안 된다. 그냥 그걸 없애야 한다. 사람들이 날 긍정적이라고 하는데 난 정말 부정적인 사람이다. 대신 부정적인 걸 확 느끼고 한 번에 끝내버린다. 입에서 내뱉지 않고 그냥 생각도 안 하려 한다. 긍정적으로 하자, 하면 더 힘들다.

뒤끝도 없고?
뒤끝은 있다. 잘 때 만날 나오니까. 그래서 에이전트한테 심리학 배우고 싶다고 해서 대학도 다녔다. 수업을 들어야 해서 디지털 대학에 갔다. 작년에 부상당했을 때 사람들이 내 시즌이 끝났다고 했다.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무조건 한 게임 뛴다는 마음으로 재활했다. 괜찮다고 하니 멘털 코치가 놀라더라. 디지털 대학 다닐 때도 새벽 4시까지 만날 봤다. 그러니까 학교에서 놀라더라. 선수로 복귀했는데 수업 일수가 좋아서 운동 안 하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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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색 수트와 흰색 셔츠는 모두 검서룡 옴므, 회색 줄무늬 타이는 브리오니, 검은색 레이스업 슈즈는 에르메네질도 제냐, 은색 반지는 구찌 타임피스&주얼리 제품.

검은색 수트와 흰색 셔츠는 모두 검서룡 옴므, 회색 줄무늬 타이는 브리오니, 검은색 레이스업 슈즈는 에르메네질도 제냐, 은색 반지는 구찌 타임피스&주얼리 제품.

스스로 찾아서 할 때 잘할 수 있는 동력을 얻는 건가?
어릴 때부터 삼촌이나 중학교 감독님께서 항상 스스로 하라고 말씀하셨다. 자율 야구를 경험한 거다. 경험이 있으니 미국 가서도 그 방법에 적응할 수 있었다. 대부분 한국 사회는 시켜야 한다. 그런 상태로 미국 가서 아무도 시키지 않는 상황에 처하면, 풀린다. 특히 운동선수들이 그렇다. 거기서 실력 차이가 난다.

롤모델보다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 잘할 수 있는 걸 계속 노력한다고 한 인터뷰가 인상적이었다.
한 선수가 잘하면 저 선수 본받아야지, 하지 않고 왜 저 선수가 잘하는지 생각한다. 왜라고 항상 생각한다. 왜 잘하지? 왜 나보다 나을까? 그러면서 빼먹는 거다. 잘하는 것 열 개 중 세 개만 얻어도 장점이 되는 거다. 미국에서 감독님, 코치님이 이렇게 해, 하지 않고 이렇게 해볼래? 하셨다. 그러면 난 왜 그래야 하는지 설명 들었다. 그 점이 나와 잘 맞았다. 열 개 알려주면 난 일곱 개 버린다. 그중 세 개만 내 것으로 만들려고 한다. 개인 스타일이 있으니 취할 것만 잘 취해야 한다.

마이너리그 동료에 관심 보여달라고 인터뷰마다 얘기하더라. 뭉클하더라.
왜냐하면 우리는 설움을 많이 겪었다. 우리도 한국 선수인데, 기자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거 같다. 메이저리그에 올라가야 그렇게 보는 거 같다. 미국에서 활동하는 한국 선수는 어릴 때 와서 온갖 설움 다 받으며 버틴 거다. 관심 보이면 너무 좋아한다. 기사로 한번 나오기라도 하면 다 본다. 네티즌이 얘는 누구냐고 해도, 그냥 감사하다. 얼굴이 나왔으니까. 가족이나 친구들이 궁금해한다. 기자들 만나면, 나중에 동기나 후배 애들 만나면 한마디만이라도 따뜻하게 말해주면 열심히 할 거라고 말한다.

마이너리그 동기인 건가?
같은 학년에 같은 해 각각 다른 팀에 입단한 동기다. 우리 때 일곱 명이 미국에 갔다. 최고로 많이 갔다. 당시 1차 지명이 없어져 빨리 계약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갔는데, 다 실패하고 들어왔다. 두 명 남았다. 나와 한 명 더. 함께 간 일곱 명 중에 제일 계약금 적게 받은 애들이 남았다. 걔가 꼴등, 내가 두 번째였다. 그 친구와 어떻게든 트리플까지 올라가 인정받고 가야 한다고 서로 얘기하며 버텼다.

이젠 마이너리그 한국 후배도 여럿 있겠다.
이젠 보면 오래 할 아이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 후배들한테 힘들지? 어때 야구? 하고 물어볼 때 아닙니다, 쉬워요, 하는 애는 오래 못 간다. 처음 미국 리그에 들어갔을 때 난 진짜 아무것도 아닌 애였다. 돈으로 따지면 난 1원, 다른 애들은 10원, 20원. 그때는 친구 많았으니까 힘드냐고 물어봤다. 애들은 되게 쉽다고 얘기하더라. 다 칠 만해, 하고. 나만 이상한 건가? 하면서 충격받았다. 나만 못하니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첫해 성적 보니 스스로 제일 잘하고 칠 만하다고 한 애들은 1할, 2할이었다. 쉽다고 말하는 애들은 한계가 다 보인다.

몇 명이나 남았나?
작년에도 한 명 떠났다. 이제는 여섯인가 일곱 명 남았다. 스무 명이나 있었는데, 열네 명이 가버린 거다. 만약 그중에 한 명이라도 빨리 메이저리그에 올라갔다면 나머지 중 몇 명은 더 올라갔을 거다. 희망이 있으니까. 우린 불씨가 없었다. (추)신수 형 뒤로 한 명도 없었다. 그렇게 10년 정도 흘렀다. 주변에서 누가 올라가면 나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할 텐데, 그게 없었다.

마이너리그에선 절실함이 원동력이 됐겠다.
맞다. 우린 절실함이 있다. 스무 살 때 한국 프로 구단에 들어가면 계약금 얼마 받고 한 달에 2백70만원 정도씩 나온다. 사실 그러면 할 거 다 할 수 있잖나. 우린 30만원 받았다. 그걸로는 한 달 동안 밥도 못 먹는다. 난 첫해와 둘째 해는 밥과 치킨 섞여 있는 멕시칸 음식을 3등분 해서 먹었다. 아침, 점심, 저녁. 한국에선 40만 달러, 50만 달러 받고 미국 가서는 성공하지 못한다고 했다. 난 그들 시선을 보기 좋게 바꾸고 싶었다.

마이너리그라도, 미국으로 계약해서 간다고 하면 한국 프로보다 낫겠거니 했다. 듣고 보니 완전히 다른 경쟁 시장으로 뛰어드는 거다.
나는 그게 맞는 거라고 본다, 솔직히. 스무 살에 얼마나 유혹이 많겠나. 게다가 돈도 있으니. 나도 스무 살에 갔는데, 아는 사람 없고 돈도 없으니 오직 야구만 했다. 그 절실함으로 성장했다. 미국에선 조금 안주하는 마음을 먹는 순간 낙오한다. 어떻게든 물어뜯으며 전쟁에서 이겨야 한다. 메이저리그는, 내가 듣기로 식단이 뷔페란다. 마이너리그는 하이 A에 올라가야 과일이 나온다. 더블 A 올라가야 매일 과일 나오면서 햄 같은 게 다 나온다. 트리플 A 올라가면 미트볼, 파스타 같은 게 나온다. 처음에는 맛있다고 좋아하다가 1년만 지나도 질린다. 메이저리그 올라갔다 내려온 사람은 자기 돈 내고 다른 거 사 먹는다. 그런 거다. 입맛이 바뀌었으니까. 올라가면 내려오기 싫어진다. 항상 간절함이 생긴다.

그런 상황에서 메이저리거 됐다는 소리 들었을 땐 정말 환희의 종소리가 울렸겠다.
에이전시가 축하해, 됐어 하는 순간, 6년간의 마이너리그 생활이 싹 스치더라. 눈물 흘리진 않았지만, 눈물 났다. 이렇게 버텨서 결국 되는구나, 하고. 내 동기들도 올라갈 수 있는 실력은 다 됐다. 결국 버티느냐 차이다.

6년 동안 미국에서 생활하면서 야구 말고 스트레스 풀기 위해 뭘 했느냐고 물어보려 했다. 인터뷰하다 보니 진짜 야구만 했을 거 같다.
진짜 야구만 했다. 그동안 클럽도 딱 한 번 가봤다. 원정 갔다가 시즌 끝나고 마지막 날이었다. 다 가자고 해서 간 거다. 그럴 정도로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스무 살 때부터 그랬다. 난 습관이 진짜 무섭다고 생각한다. 밤에 놀면, 다음 날 게임을 못 뛴다. 힘들어서. 집에 와서 웃으며 TV 보며 쉬다가 편안하게 자야 한다. 집순이다. 나가면 재밌게 놀겠지만, 나가는 게 힘들다. 이제 LA 가니까 좋겠다고 몇몇이 말한다. 클럽도 술집도 많아서 좋겠다고. 난 술도 잘 안 마신다. 예전에는 아예 안 마셨다. 스물네 살 이후로 조금씩 마실 뿐이다. 한국 와서 가끔 친구들에게 술 마시자고 하면 놀란다. 어쩔 땐 사생활이 없어 좀 스트레스 받기도 한다. 취미 자체가 없다.

경기 끝나고 운동 안 하면 집에서 보는 TV가 유일한 낙인 메이저리거라니.
집에서 TV 보면서 웃는 게 제일 좋고 재밌다. 한국 프로 선수들이 스프링캠프 올 때가 있다. 오면 나한테 놀 만한 곳 물어보는데 진짜 몰라서 모른다고 한다. 한 달쯤 지나면 그들이 다 찾아내서 논다. 6년 동안 산 나보다 더 잘 안다.

1년 목표는 딱히 생각하지 않는다고 인터뷰에서 말했다. 자기가 잘하는 부분을 계속 잘하도록 노력할 거라고?
매년 목표가 두 개 있다. 하나는 아프지 않는 것. 다른 하나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성적 목표인데, 이 성적 내려면 아프지 않아야 한다. 나중에 은퇴할 때 아무도 모르게 나 혼자 목표 달성했다고 좋아할지 모른다. 이 목표는 마이너리그 때부터 시작해온 거다.

계속 비밀로 해두길 바란다.
달성하고 나서 말할 순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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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INFO

EDITOR 김종훈
PHOTOGRAPHY 이상엽
STYLIST 김성일
HAIR&MAKE-UP 재황
ASSISTANT 이명준

2016년 0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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