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필이면 스피커에서 엘비스 프레슬리의 음악이 흘러나왔다. 김반장이 갑자기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지금 나오는 음악과 제 몸의 비트가 조금 안 맞아서요. 음악을 꺼주시면 더 편할 것 같습니다.” 너무도 정중한 그의 한마디에 눈치 빠른 포토그래퍼가 선곡을 바꿨다. 다행히, 밥 말리였다. 아마도 수천 번, 수만 번은 들었을 밥 말리의 목소리 속에서 김반장은 더할 나위 없이 편안하게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온몸에서 특유의 바이브와 그루브가 넘쳐났다. 그가 새롭게 선보일 음악의 주제는 ‘관능’ 그리고 ‘춤’이다. 비교와 경쟁 속에서 하루하루 개성을 잃어가는 무미건조한 우리에게 태초의 관능을 일깨워 각자 가지고 있는 ‘얼굴값’을 하게 만들어주겠다는 야심찬 포부를 밝혔다.
지난해 봄에는 〈인디 20〉이라는 컴필레이션 앨범에 참여했고, 오는 2월 20일에는 인디 20주년 콘서트에 참여한다. 20년 전, 한국 인디 음악계는 어땠나?
1990년대 중반이면 홍대에 인디 신이라는 말이 생기기도 전인 극초반이다. 음악을 좋아하는 청년들끼리 소모임하면서 밴드 만들어 연주하고, 드럭이라는 클럽에서 크라잉넛이 탄생했다. (이)성우가 노브레인을 결성하기도 전이니까 엄청 오래됐지. 나는 당시에 언니네이발관에 드러머로 참여했었다. 아, 그리고 델리스파이스가 주류에서 인기를 얻기도 했다.
인디 신의 태동을 함께했던 사람으로 격세지감을 느끼겠다.
그렇다. 크라잉넛과 노브레인은 여전히 활동 중이지만 당시에 등장했던 많은 밴드들 중 어떻게 지내는지 소식을 모르는 친구들도 있다. 슬래시 메탈을 했던 팀들은 상당수 없어진 것 같다. 모던 록이나 펑크 록을 했던 뮤지션을 중심으로 명맥을 이어가는 듯하다.
인디 음악이라는 말의 정의도 시대 흐름에 따라 바뀐 것 같나?
‘인디’라는 단어, ‘인디펜던트’가 결국 ‘독립적’이라는 의미 아닌가? 주류 음악은 산업적인 부분을 배제할 수 없으므로 자기만의 화법으로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비주류 음악을 ‘인디 음악’이라 부르는 것은 타당하다. 다만 중요한 것은 ‘무엇을 위해 독립할 것인가’ 하는 음악적 동기 같다. 어쨌거나 이전보다는 인디 뮤지션이라고 불리는 것이 훨씬 긍정적인 의미다. 성향과 스타일이 뚜렷한 뮤지션을 칭하는 말이니까.
20년 전과 지금, 눈에 띄는 큰 변화는 뭔가?
당시 포크적인 성향의 모던 록, 브리티시 기타 팝을 하는 밴드는 완전한 비주류였다. 언더그라운드 뮤지션으로 불렸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랜드 민트 페스티벌을 만들어낼 정도로 주류 음악이 됐다. 음악적 다양성의 한 축을 담당하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또 그때와 달리 지금은 청자가 새로운 음악을 어색해하지 않는다. 예전엔 펑크 록 밴드를 보고 “저게 무슨 음악이야?” “쟤네 머리는 왜 저래?” 하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지금은 훨씬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다. 반면에 당시엔 펑크 록을 하던 친구들을 중심으로 대규모 문화 조직이 있었다. 다 같이 열정을 가지고 똘똘 뭉쳤는데, 요즘엔 그런 모습이 잘 안 보인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1990년대에는 젊음의 에너지가 폭발하는 느낌이었다면, 요즘 세대의 젊음은 고단한 느낌이다.
젊음이 사회상을 반영하는 건 당연하다. 그래서 나 역시 ‘긍정적으로 살아라’ ‘아프니까 청춘이다’라고 말할 순 없다. 다만 미워하지 않는 마음이 중요한 거 같다. 미워하는 에너지는 독이 돼서 건강한 심신을 해칠 수 있다. 가급적 이해하려고 하면 참 좋다. 사회가 경직되어 있다 보니 젊은이들이 살아가기에 너무 ‘빡세지’ 않나? 나도 예전에 참 고단하다 생각했는데, 지금은 더한 것 같다. 얼마 전, ‘33분에 한 명꼴로 스스로 삶을 마감한다’는 기사를 봤을 때 전쟁과도 같은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기성세대가 사회에서 자기 역할을 제대로 못해서인 것 같기도 하고, 보통 문제가 아니다.
계속해서 20년 전 얘기를 하고 있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늘 청년 같다.
청년 맞다. 하하.
언제나 청년인 김반장도 불쑥 ‘꼰대’ 같은 모습을 발견할 때가 있나?
전혀 없다고는 못하겠다. 아직 내 주변에 젊은 친구들이 많이 남아 있으니까, 대단히 잦은 편은 아닌 것 같다. 하하. 가끔 ‘내가 이렇게 해보니까 좋더라’는 말을 해줄 때가 있긴 하다. 하지만 곧 역지사지로 생각해본다. 내가 그 나이대를 살고 있다면, 나 역시 누군가의 조언이 귀에 들리지 않을 것 같다. 또 내가 알면 얼마나 알겠나. 언제나 배워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으려고 한다.
이번 공연을 준비하면서 과거를 돌아보는 기회가 됐을 것 같다.
아소토 유니온, 윈디 시티 시절의 트랙과 김반장의 솔로 프로젝트 등 3가지 파트로 무대를 채울 계획이다. 나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앞으로 나올 신곡도 들려줄 작정이다. 준비하다 보니 재미있게도 나이를 먹어가면서 음악을 바라보는 관점, 음악인으로서의 마음가짐 같은 것이 달라진다.
후회되는 것도 있나?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그렇지만 시간을 되돌릴 순 없는 거니까. 그리고 그때가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는 거겠지. 가장 아쉬운 것은 ‘관계’다. 멤버들과, 함께 작업했던 스태프들과 좀 더 소통하고 잘 어우러졌다면 훨씬 더 큰 시너지를 낼 수 있었을 것 같다. 하지만 이 후회를 디딤돌 삼아서 앞으로 나아가야지.
오, 굉장히 긍정적이다.
예전보다 훨씬 고집을 덜 피우게 됐다. 예전에는 작업할 때 내가 생각한 그림을 그대로 구사하려고 노력했는데 지금은 그런 틀에서 자유로워졌다. 어느 날 산에 갔는데 계곡 물이 전부 위에서 아래로 흐르더라. 아래에서 위로 흐르는 것은 없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자연스럽다는 것은 뭘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별다른 일정이 없을 때, 어떤 일상을 보내나?
혼자 사니까 집에서 밥을 해먹고, 근처 북한산에 올라가 약수 물을 떠온다. 설렁설렁 산책을 하면서 다음 앨범 구상을 해보기도 한다. 이도저도 할 기분이 아니라면 색연필로 그림을 그린다. 새벽 5, 6시에 일어나니까 하루가 길어서 참 좋다.
정말 자연인이다.
음악을 직업으로 삼다 보니까 밖으로 도는 일이 많지 않나. 대부분 일상이 공연 같은 일정에 맞춰져 있다. 그래서 아무 일이 없을 때에는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려고 노력한다. 음악이나 악기 소리보다는 공간에 있는 그대로의 소리 들으려고 하는 편이다. 마당에 나가 길냥이들 밥 먹는 모습도 관찰하면서. 누군가 내게 “새벽과 노을을 볼 수 있다면 그곳이 곧 여행지다”라는 말을 해줬다. 예전엔 여행을 즐겼는데 요즘엔 내가 속한 공간의 시간 변화를 세밀하게 관찰하면서 즐거움을 느낀다.
김반장의 음악적 뿌리는 아프리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국악과 레게를 접목하려는 시도를 계속해서 하고 있다. 한국인이니까 한국 음악을 해야 한다는 당위성 때문인가?
처음엔 미국의 솔 음악을 듣기 시작했다. 그다음에 재즈, 힙합, 레게 음악을 들었다. 그러다 세계 곳곳의 여러 레게 페스티벌에 초청되어 공연을 하기 시작했다. 밖으로 나가니까 한국 전통 음악 고유의 신명과 흥이 아주 진한 맛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보이더라. 그때부터 어떤 음악을 하건 기본적으로 가락과 장단을 이용해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풍물 놀이를 유심히 들어보면 그 안에 아프로비트와 훵크, 블루스가 다 있다. 공부하면 할수록, 국악이 정말 놀 줄 아는 음악이라는 걸 깨닫는다. 저잣거리의 신명은 너무도 매력적이다.
‘굿’도 음악에 많이 차용하던데?
굿은 당시로서는 동네 사람들이 어우러지는 한마당, 규모가 큰 축제였다고 생각한다. 굿판에 관한 종교적, 문화적 해석이 다를 수 있겠지만 중요한 건 이웃 간의 반목이나 일상의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역할을 했다는 거다. 요즘 우리가 공연을 보러 가는 것도 마찬가지 아닌가? 좋아하는 음악 들으면서 일상의 때를 벗기려는 시도다. 그래서 난 모든 음악인이 굿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음악 인생에서 들었던 최고의 찬사는?
몇 해 전 부산에서 공연을 마쳤는데 어떤 분이 “내가 오늘 굉장히 마음이 무거웠는데, 덕분에 가벼운 마음으로 돌아간다. 치유받은 기분”이라는 말을 건넸다. 음악을 한다는 것은 결국 이런 교감 행위가 아닐까? 오래도록 그분의 한마디가 잊히지 않는다.
2016년, 김반장이 들려줄 새로운 음악은?
나는 드럼 치고 노래를 하는 사람이다. 드럼 비트가 좋은 이유는 사람을 춤추게 한다는 거다. 드럼이 가진 원초적인 에너지를 극대화할 수 있는 음악을 선보일 거다. 땀 흘리며 춤추는 건강한 섹시함을 이끌어내고 싶다.
정신 놓고 춤을 춰야 할 것만 같다.
그렇게 될 거다. 나는 관능적인 아름다움이 참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관능은 남자를 남자답게, 여자를 여자답게 만들어준다. 남자답다는 것이 눈물 흘리면 안 된다, 책임감이 강해야 한다, 이런 류의 이야기를 의미하는 건 아니다. 남자가 가지고 있는 특유의 바이브를 부드럽고 젠틀하게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거다. 요즘 말로 하면 ‘굿 바이브레이션(Good Vibration)을 주고받는 거지. 모든 사람은 고유의 개성과 매력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하면 각자의 ‘얼굴값’, 즉 ‘꼴값’이 있다는 거다. 요즘 사회가 개개인의 아름다움을 한 줄로 세워놓는 폭력을 가하고 있다. 그 줄을 느슨하게 두고 자신만의 꼴값을 마음껏 떨어보는 장을 만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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