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를 앞둔 12월의 어느 금요일 밤, 오모테산도의 밤거리로 나섰다. 반짝이는 가로수와 길을 가로지른 전등 장식이 연말의 들뜬 기운을 북돋고 있었다. 다소 상기된 채 생 로랑 쇼룸으로 향했다. 그곳엔 2016 S/S 시즌 컬렉션이 전시되어 있었다. 한쪽 벽에선 쇼 영상이 나왔다. 무지갯빛 조명이 현란하게 돌아가던, 유독 아름답다 여겼던 그 컬렉션이다.
에디 슬리먼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음악과 젊음을 모티브로 삼았다. 좀 더 세부적으로 말하자면 서프 뮤직이다. 각각의 옷에선 빈티지함이 뚝뚝 흘렀다. 패치워크가 돋보이는 모터사이클 재킷, 낡은 체크 셔츠, 몇 년은 족히 입은 듯한 청바지, 꽃무늬를 수놓은 오버사이즈 카디건, 야자수가 그려진 새틴 점퍼 등은 1990년대의 자유로운 뮤지션을 떠오르게 했다. 유독 커트 코베인이 겹쳤다. 볼드한 프레임의 선글라스를 봤을 땐 확신했다. 에디 슬리먼이 그를 마음속에 그렸다는 걸.
그 밖에도 시퀸과 비즈 등으로 장식한 턱시도 재킷이나 미국 우주인이 달에 착륙한 장면을 수놓은 블루종, 캘리포니아 출신의 아티스트인 루시아 리비시의 작품을 자수로 놓은 테디 재킷 역시 눈길을 끌었다. 세세한 탐방을 마친 후 다시 오모테산도의 메인 길로 들어섰다. 그 길 한가운데 생 로랑 플래그십 스토어가 자리했다. 새롭게 문을 연 이 매장은 아시아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들어서자 밟기 무안할 정도로 고급스러운 대리석 바닥이 이어졌다. 1층은 가방과 가죽 액세서리를 위주로 전시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에디 슬리먼이 제작한 금빛 슬롯 머신이다. 레버를 당기면 생 로랑의 구두와 가방들이 돌아가다 멈춘다. 잭팟은 없지만 아무렴 어떠하리. 이 머신을 볼 수 있는 건 이곳을 포함해 전 세계적으로 여섯 개의 매장뿐이다. 2층으로 올라가면 생 로랑의 남녀 컬렉션을 고루 구경할 수 있다. 뿐만 아니다. 매장을 통틀어 가장 멋진 공간이 이곳에 숨어 있다. 바로 피팅룸이다. 거울과 백색 대리석으로 둘러싸인 공간에 금색 야자수가 서 있는 것. 그 앞에서 한참을 보냈다. 황홀한 기분으로 진열된 옷들을 만져본 뒤 통유리 창문 앞에 섰다. 호화로운 밤이 비로소 완성된 기분이 들었다.
커트 코베인의 단상
색이 바랜 체크 셔츠와 동그란 선글라스, 낡은 청바지와 축 늘어진 오버사이즈 카디건, 다소 촌스러운 니트 비니까지, 생 로랑의 2016 S/S 시즌은 커트 코베인의 옷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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