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보다 훨씬 가녀린 체구였다. 얼마 전까지 박규리는 저 작은 몸을 이끌고 분 단위로 쪼갠 치밀한 목표와 계획 속에서 살았다. 촘촘하게 짜인 틀에서 벗어나 조금 자유롭게 살기로 결심한 그녀는 “매일 해탈하는 기분으로 살고 있다”며 웃었다. 지나온 시간을 말할 땐 담담했고, 앞으로의 시간을 이야기할 땐 설렘을 감추지 않았다.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 누워서도 흐트러지지 않고 능숙하게 포즈를 취하던 박규리도, 촬영 끝나고 친구들과 놀러 갈 생각에 기분 좋은 눈웃음을 짓던 박규리도 낯설지 않은 모습이었다. 10년 차 베테랑 걸 그룹 리더에서 풋풋한 연기의 배우로 인생 2막을 맞이한 그녀는 새로운 흐름에 편안히 몸을 맡긴 채 매일매일을 즐겁게 채워나가고 있었다.
한동안 뜸했죠?
재작년부터 카라는 1년에 한 번씩 앨범 발매하는 것 외에 활동이 뜸했죠. 저를 비롯한 멤버들은 각자 개인적으로 활동을 하려고 노력했어요. 일렉트로닉 듀오인 프럼 디 에어포트와 일본 서머소닉 페스티벌에서 함께 공연을 하기도 했고, 독립 영화에도 출연했어요.
그 영화로 부산 국제영화제에 초청받아 참석했던 거죠?
맞아요. 당시 영화제에선 <거꾸로 가까이, 돌아서>라는 제목으로 공개됐어요. 저는 김재욱 씨의 ‘구 여친’ 역할을 맡았는데, 일본에서 취재차 한국에 와서 ‘구 남친’과 함께 강릉으로 여행을 떠나요. 현재 여자친구인 최정안 씨와 강릉 터미널에서 마주치면서 양다리 걸친 남자의 ‘멘붕’을 담은 영화예요. 개봉 제목은 <두 개의 연애>로 바뀌었더라고요.
가요제는 숱하게 참석했겠지만, 배우의 입장으로 부산국제 영화제를 방문한 건 처음이었잖아요. 어땠어요?
관객의 입장으로 제천 국제음악영화제는 혼자 가본 적 있지만 이런 공식 초청은 처음이죠. 영화인들에게 부산 국제영화제는 남다른 의미가 있다고 들어서 떨리기도 했어요. 생각지도 못했던 기회라 꿈같기도 했고요. 감독님한테 진짜 감사하다고 여러 번 얘기했어요. 하하.
어떻게 영화에 출연하게 된 거예요?
조성규 감독님과는 일로 만날 줄은 전혀 몰랐어요. 친한 사람들끼리 술자리를 하다가 감독님이 동석하게 됐는데, 그날의 저를 기억하고 나중에 <두 개의 연애> 시나리오를 보내오셨더라고요. 극 중에서 일본어를 능숙하게 할 여배우가 필요했는데, 제 생각이 나셨대요. 카라로 일본 활동을 오랫동안 하면서 공부 열심히 했으니까, 잘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올 상반기에 또 다른 영화 한 편도 연이어 개봉한다고 들었어요. 그 또한 조성규 감독님 작품이더라고요.
<어떻게 헤어질까>라는 영화예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고양이를 키우며 살고 있는 여자가, 고양이의 영혼을 보는 옆집 남자를 만나면서 사랑에 빠진다는 내용이에요. 그런데 원래는 연이어 개봉할 계획은 아니었어요. 그래서 좀 걱정이에요. 어쨌건 저는 주어진 기회에 최선을 다했고 관객의 반응을 기다릴 뿐이에요.
어쨌건 연기가 흡족했기에 두 번째 영화에도 출연할 수 있었던 거 아닐까요?
안 그래도 제가 감독님에게 여쭤봤어요. “왜 저를 또 캐스팅하셨어요?” 그랬더니 그냥 평소의 제 모습이 그 역할과 맞아떨어진다고 하시더라고요. 뭔가를 거창하게 하려고 하지 말고, 너답게 연기하라는 주문을 하셨어요.
박규리다운 평소의 모습은 어떤데요?
사실 잘 모르겠어요. 직업을 빼면 저는 정말 평범한 여자거든요. ‘카라의 박규리’로 10년을 살아왔는데, 때로는 ‘대중의 기대와 틀에 맞춰진 모습을 나라고 착각하고 있진 않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해요. 쾌활하고 긍정적인 모습을 꾸며낸 것 같기도 하고요. 연기를 하면서 저도 모르는 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어서 좋아요. 생각보다 제가 여러 가지 성격을 가지고 있더라고요.
아이돌 그룹의 리더는 아무나 못하는 거잖아요. 보통 당차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데.
사실 사람들 앞에서 제 자신을 드러내는 게 어색해요. 힘들다는 하소연이나 눈물도 될 수 있으면 꾹 참는 편이에요. 그런데 <어떻게 헤어질까>를 촬영하면서 지금 저에게 닥친 상황과 맞물려서 원 없이 쏟아낼 수 있었어요. 울고 나니까 정말 후련하던데요?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에 꽤나 공감하겠어요.
진짜 그래요. 전 고등학교 때까지만 하더라도 사람들 눈에 띄면 부끄러워서 움츠러들던 아이였거든요.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카라의 큰언니 역할을 맡았고, 그래서 억지로라도 활발해져야 했어요. 그렇게 20대를 통째로 보내고 나니까 ‘스물아홉’이더라고요. 그간 카라 멤버로 더없이 충실한 시간을 보냈다면 앞으론 제 모습을 더 많이 찾고 싶다는 생각이에요.
스스로 ‘여신’이라 칭하는 박규리 말고, 보여주고 싶은 모습이 있어요?
카라는 앨범 활동을 시작하면 정해진 콘셉트에 맞춰서 자신을 드러냈거든요. 이제 더 이상 ‘새로운 모습’을 생각하는 것에 지쳤어요.
아이돌 10년 차면, 회사로 치면 거의 임원급이죠.
아이돌에만 한정해서 말한다면, 아이돌이 되는 데 필수적인 요소들에 관해선 잘 알고 갖추고 있다고 말할 수 있어요. 하지만 그 밖에 음악적 깊이에 관해선 아직 많이 부족하죠. 그렇게 보면, 10년이란 세월은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요. 이제 막 시작하는 아이돌 후배들을 보면 처음부터 질서 정연하게 구성되어서 나오더라고요. 반면에 카라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서툴게 시작했어요.
아이돌 그룹으로서 이름을 알리기 위해 피나는 노력 끝에 성공을 거뒀고, 지금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했잖아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건, 전 매일 노력했어요. 먼 훗날 자신을 돌아봤을 때 후회하지 않았으면 했거든요. 한 번도 ‘안 된다’거나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저는 카라 활동이 자랑스러워요. 누가 뭐라 해도 카라는 제 마음속에서 언제나 1등이에요.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 선택을 해왔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2016년 1월 1일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아, 서른이 이제 코앞이구나’라는 생각을 했어요?
가끔 친구들이나 팬들이 ‘규리도 이제 나이 먹었다’는 이야기를 하곤 해요. 그럴 때마다 솔직히 ‘나는 아무렇지 않은데 왜 다른 사람이 내 나이를 걱정할까?’라고 생각했죠. 나이는 저만 먹는 거 아니잖아요. 하하. 풋풋한 스무 살의 저도 좋지만 지금의 저도 좋아요. 평생 스무 살 모습으로 살아야 한다면, 너무 징그러울 것 같지 않아요? 그 나이대의 아름다움을 온전히 즐기고 있어서 크게 신경 안 써요.
2015년에 ‘내가 생각해도 잘한 일’은 뭐였어요?
2015년 하반기부터 술을 좀 배웠어요. 부산 국제영화제를 다녀오면서부터였죠.
해운대 포장마차에서 돌멍게에 소주 한잔했겠네요?
네. 거기서 처음 ‘쏘맥’을 배웠어요. 원래는 소주를 전혀 못 마셨거든요. 그런데 비율을 제대로 맞춰 제조한 ‘쏘맥’은 정말 맛있더라고요. 그 이후에 이런저런 마음 쓸 일이 많아졌는데, 예전 같으면 아마 집에서 혼자 끙끙 앓고 힘들어했을 거예요. 그런데 이제 술맛을 알게 됐잖아요. 하하. 그래서 좋아하는 사람들과 술 한잔하면서 풀고 하다 보니까 ‘어른이 됐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람들이 왜 술을 먹는지 알겠죠?
그래서 큰일이에요. 얼마 전부터는 친한 언니가 와인과 독주의 세계로 저를 이끌었어요. 레드 와인은 입에도 못 댔는데 조금씩 걸음마를 떼고 있죠. 이렇게 인생과 술을 같이 배우나 봐요.
이제 담백한 맛이 좋아지지 않아요?
아, 정말 그래요. 예전에는 과일 향이 나거나 달달한 맛을 선호했는데 지금은 덤덤한 맛이 좋아요. 입맛도 어른이 된 기분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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