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graphy 박민정 cooperation 프라다
뭐, 그닥 대단한 동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래 봬도 패션지 에디터 아닌가. 비록 피처 담당이긴 하나 매 시즌 최신 패션 스타일이 어떤 것인지쯤은 곁눈질로라도 스쳐 지나가곤 한다. 그런데 그 ‘신상’들 중 ‘So, Trendy’한 제품을 훑어볼 때마다 풀리지 않는 의문 하나가 마음 한구석에서 사라지지 않곤 했다. 청담동 말고 다른 동네에서 저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에디터가 직접 프라다의 최신 캐주얼 수트를 입은 채 거리로(그것도 여의도로) 나서보자는 제안이 회의석상에 등장했을 때 후배들은 아무도 긴장하지 않았다. ‘트랜스젠더 바 잠입’ 아이템 앞에서는 사시나무 떨듯 움츠러들었던 그들이 말이다. 오히려 한쪽 입술만 삐쭉 올린 채 배시시 미소를 머금기까지 했다. 맞다. 나만 모르고 있었던 거다. 0.1톤에 육박하는 에디터 S도, 요즘 미쉐린 타이어 캐리커처에 자꾸만 친밀한 감정이 느껴진다며 너스레를 떠는 에디터 L도 프라다 팬츠를 한쪽 다리에도 끼울 수 없는 그런 몸매를 갖고 있다. 178cm의 키에 67kg에 불과한, 삐쩍 마를 대로 마른 나만이 그나마 시도라도 해볼 수 있는 것이다.
생각만큼 옷이 답답하지는 않았다. 다리에 착 달라붙는 바지 핏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다만 셔츠의 단추가 뒤에 달려 있는 것은 불만이었다. 아하. 집에 하인을 두고 사는 부르주아 계층이거나, 아내를 종처럼 부리고 사는 이슬람권 남정네가 아니라면 입지 말라는 뜻인 건가? 어찌어찌 옷을 갖춰 입고 대형 거울 앞에 섰다. 헤어스타일에 살짝 포인트를 주고 선글라스까지 쓰니 꽤 근사해 보였다. 이 정도면 가벼운 마음으로 거리를 돌아다닐 수 있겠네, 뭐.
역시 한국은 동방예의지국이다. 한산한 버스 안은 내가 올라타는 순간 잠깐 웅성이긴 했지만 대놓고 나를 쳐다보는 사람은 없었다. 한참 졸고 있던 등산복 차림의 60대 할아버지가 깜짝 놀라 나를 바라보긴 했지만 곧 시선을 창밖으로 돌려버렸다. 교복을 입은 여고생 하나는 어떻게든 나를 쳐다보지 않으려고 기를 쓰며 불안한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고 있었다. 이건 혹시 왕따 분위기? 다만 대학생쯤으로 보이는 남자 하나가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손에 쥐고 있던 잡지와 나를 번갈아가며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순간 피식 터져 나오는 웃음. 젠장, 저 녀석 지금 나를 경멸하고 있구나. 더 이상 반응은 없었다. 다만 버스에서 내리려는 순간 등 뒤에서 찰칵찰칵하는 음향 효과가 무수히 들려왔다는 점만 뺀다면 말이다. 이외수 선생의 말마따나 ‘누군가는 UCC 스타가 되겠구나’.
이젠 은근히 사람들의 시선을 즐기는 정도에 이르렀다. 간혹 이글거리는 남성들의 시선이 느껴질 때면 ‘최신 룩으로 쫙 빼입은 내 모습이 부러워서 그런 거겠지, 뭐’라고 치부해버리면 그만이었다. 용기를 조금 더 내보았다. 한국의 맨해튼으로, 가장 보수적인 수트만을 입는 남성들이 모여 사는 여의도로 나가보는 거다. 그것도 한꺼번에 수천 명이 사무실 밖으로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점심 시간에 맞춰서 말이다.
왜 후배에게 이 과제를 떠넘기지 않았을까. 후회를 곱씹기까지는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군중심리란 대단한 것이었다. 비슷한 색깔의 셔츠와 넥타이를 갖춰 입은 수백 명의 사람들이 나를 짓밟듯이 스치고 지나갔다. “쟤, 뭐야?” “연예인이야?” “연예인치고는 얼굴도 새까맣고 키도 작은데?” “그럼, 개그맨이야?” “아니, 몰래 카메라인가봐.” “그렇겠지? 남자가 저런 옷을 입는다는 게 말이 돼?” “야야, 그만해라. 여기 쳐다본다, 야.”
하늘이 잔뜩 흐려졌지만 차마 선글라스를 벗을 수는 없었다. ‘그러고 보니 여의도에 있는 회사에 다니는 친구가 하나 둘이 아니잖아’라는 소심한 생각이 떠오르자마자 곳곳에서 아는 얼굴들이 돌출하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우연히라도 마주칠 일이 없었던 그들이 말이다. 한 번 무너진 자신감을 회복하기란 쉽지 않았다. 혹시라도 누군가 나를 알아볼까 싶어 슬금슬금 피해 다니다 보니 비슷한 유니폼을 맞춰 입은 커리어우먼의 대열 속으로 뛰어드는 악수를 두고 말았다.
여자가 무리를 이루면 얼마나 대담해지는지 난생 처음 깨달았다. 휘파람을 부는 그녀, 경멸의 ‘썩소’를 날리는 그녀, 귀엽다며 깔깔거리는 그녀들. 마치 동물원 우리 안에 갇힌 느낌이었다. 이걸로 충분하다. 얼른 사무실로 컴백하자.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야 비로소 이 룩의 치명적인 단점을 알 수 있었다. 하루 종일 서서 돌아다녀도 끄떡없을 정도로 튼튼한 근력을 지녔거나,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다리를 쩍 벌리고 있어도 되는 고급 승용차가 없다면 반나절 이상 이 옷을 입을 수 없다는 것을. 자칫 비좁은 지하철 의자에 잘못 앉았다가는 팬츠 한구석이 터지기 십상이었다.
이미 기진맥진한 탓에 사람들의 시선은 더 이상 신경 쓰이지 않았다. 내가 주변을 의식하지 않으면 사람들도 나를 주의 깊게 바라보지 않았다. ‘패션의 제1 원칙은 자신감’이라는 한 디자이너의 멘트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아무리 과감한 의상이라도 잘 어울리게 매치했다고 판단된다면 꽁무니 뺄 것 없이 당당해지라는 조언 말이다. 물론 매일같이 이런 파격적인 패션쇼 스타일을 시도해보라고 한다면 정중히 사양하겠다. 패션의 제2 원칙은 절대 서둘지 말고 조금씩 자신에게 어울리는 스타일을 찾아가라는 것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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