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graphy 보리 Editor 박지호 Hair 태석(네함) Make-up 오희진(순수) Styling 이현하
문제의 근원을 따지자면 ‘시네피앙’과 ‘시네피에’의 개념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일찍이 촘스키가 갈파했듯, 말이란 발화하는 바로 그 순간부터 기표와 기의가 서로 미끄러지며 의미가 왜곡되게 마련이니까. 뭐, 그렇다고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 굳이 복잡한 철학 이론까지 끌어들여 설명을 해나갈 생각은 없으니 안심하시라. 안 그래도 나날이 폭락하는 주식 시장을 바라보며 한창 심사가 복잡할 당신의 머릿속을 더 혼란스럽게 만들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다만 인터뷰어의 입장에서 볼 때 인터뷰 기사에 대해 갑론을박이 벌어지는 사태가 썩 유쾌하지는 않다. 가끔 사람들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야기하는 ‘기자는 모두 소설가’라는 언명도 듣기 좋을 리 없다. 딴에는 인터뷰 현장에서 캐치한 인터뷰이의 생각과 느낌을 최대한 생생하고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단 말이다. 한국 연예 매니지먼트 시스템의 한계 탓에 기껏해야 1시간 남짓 주어지는 짧은 인터뷰 시간에도 불구하고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 안다. 주변 여건을 핑계 대는 게 변명이 될 순 없다는 것을. 오늘도 인터뷰이들은 이렇게 항변한다. 왜 평소 내 생각과는 180도 다른 이야기가 인터뷰 기사에 담겼는지, 왜 나와는 어울리지도 않는 의상을 입히는지, 왜 이렇게도 요상한 콘셉트로 사진을 찍는지 등등. 고민이 깊어갈 무렵, 영화 <추격자>에서 눈부신 포스를 발산하고 있는 명민한 배우, 하정우와 조우할 수 있었다.
하정우는 <아레나>가 사랑해 마지않는 동시대 최고의 배우 중 하나다. 왜 아니겠는가. 잘생겼지, 어떤 옷을 걸쳐도 ‘간지’ 나지, 똑똑하지, 성실하지, 무엇보다 막강한 연기력을 자랑하지. 요즘 영화 <추격자>와 <비스티 보이즈>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그와의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문득 섬광과도 같은 아이디어 하나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데뷔 이래 수십 번, 아니 수백 번의 인터뷰를 당해보았을 하정우에게 이런 요청을 해보면 어떨까. ‘배우인 당신 입장에서 보았을 때 인터뷰어의 질문에는 어떤 문제점이 있는가?’ 그리고 ‘만약 당신이라면 어떻게 인터뷰를 진행하겠는가?’
처음에는 핵심을 벗어난 채 주변부만 빙빙 돌던 하정우가 슬금슬금 <아레나>를 비롯한 각종 매체들의 인터뷰, 스타일링 방식 등에 대해 때로는 따뜻한 조언을, 가끔은 날카로운 비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나라면 배우 하정우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겠다”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주변의 스태프들 모두 진심 어린 감탄사를 토해낼 수밖에 없었다. 아하. 한창 신명이 난 이 배우, 마침내 <아레나>의 지난 인터뷰 기사를 샅샅이 분석하는 것은 물론, 눈앞에 앉아 있는 에디터까지 직접 인터뷰하기 시작했다. 아래는 명민한 배우, 하정우가 창조해낸 그만의 독특한 인터뷰 현장에 대한 생생한 기록이다. 인터뷰어와 인터뷰이의 역할이 뒤바뀌는 색다른 쾌감을 당신도 직접 느껴보시라.
오늘 우리, 툭 터놓고 한번 이야기해보자. 솔직히 그동안 인터뷰하면서 짜증났던 적은 없는가? 본인의 의도와는 완전히 어긋난 기사 때문에 열받은 적도 많았을 것 같은데.
음… 글쎄다. 대체로 나쁘지 않았던 것 같은데? 난 운이 좋았는지 내게 호감을 보이는 기자들을 많이 만났던 것 같다. 예를 들어 <씨네21>과의 작업이 그렇다. 막 데뷔했을 무렵 ‘스포트라이트’라는 1페이지짜리 인터뷰에 참여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묘하게도 배우로 성장해가면서 이때 인터뷰를 함께한 기자와 끊임없이 마주치게 되었다. 배우로서 필모그래피는 물론, 인터뷰의 역사 또한 충실히 쌓인다는 느낌에 마음 한 구석이 든든했다. 얼마 전 이동진 기자와의 인터뷰도 놀라운 체험이었다. <추격자>를 꼼꼼히 감상한 다음 일곱 장면으로 분류해 질문을 던지는데 내가 미처 생각해보지 못한 디테일까지 잡아내는 공력이 놀라웠다.
하하. 우리, 말 돌리지 말자. 물론 충실한 인터뷰도 많았겠지만 어이없는 인터뷰도 그에 못지않게 넘쳐났을 거라는 건 불문가지 아닌가.
뭐, 그렇긴 하지. 그런데 기억이 날 듯 말 듯하다.(웃음)
이런, 이런. 그건 정치인들이 청문회에 불려 나왔을 때나 쓰는 어법 아닌가. 명민한 배우 하정우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참, 얼마 전에 이런 경우가 있었다. 한 매체와 <비스티 보이즈>의 작품 세계에 대해 인터뷰를 할 때였는데 “예” 또는 “아니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는 단답형 질문들만 늘어놓더라. 이를테면 이런 거다. “윤계상 씨와 같은 업소에서 경쟁하는 호스트로 출연하시네요. 실제 촬영 현장에서는 두 사람 중 누가 더 인기가 많았어요?” 당신이라면 뭐라고 대답하겠나. 당연히 “물론 계상 씨가 더 많았지요”라는 낯 뜨거운 대답을 할 수밖에. 참,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조금 더 짚고 넘어가자면 내 출연작을 한 편도 보지 않고 인터뷰 장소에 나오는 인터뷰어도 왕왕 있다. 그러면 뭐라 할 말이 없어지는 거지. 영화 제목을 <추적자> <네버마인드> <용서받지 아니한 자>라고 잘못 발음하는 것은 차라리 애교에 가깝다.
슬금슬금 본론이 쏟아지기 시작하는 것 같다. 계속 이야기해줄 수 있나?
<추격자> 때만 해도 그렇다. “김윤석 씨와의 연기 대결이 볼 만했어요. 촬영에 들어갈 때마다 연기 대결에서 이기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셨나요?” “서영희 씨가 안마시술소에서 일하는 도우미 역할로 나오잖아요. 혹시 영희 씨의 안마를 직접 받아보신 적 있나요?” 구체적인 사례를 더 들지 않아도 되겠지? 참, 그러고 보니 예전 <두 번째 사랑>이 개봉했을 때에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서양 여자와 베드신을 찍는 기분이 어떠셨나요? 그 베드신을 혹시 아버지는 보셨나요? 배우들은 베드신을 찍을 때 진짜로 흥분하지는 않나요?” 이 세 가지 질문이 다였다. 그 인터뷰가 혹시라도 해프닝성 질문을 받았을 때 배우의 당황한 모습을 담는 몰래 카메라라면 또 모르겠다. 어찌 되었건 이건 좀 아니지 않나?
흠, 이왕 아버지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한 번 물어나 보자. 인터뷰 때마다 일부러 아버지의 이야기를 피해간다는 지적이 있는데?
하하. 이제 기억이 난다. 예전에 한 인터뷰어가 이렇게 물어본 적이 있다. “아버지가 배우이신데 연기도 직접 가르쳐주시나요?” 음, 이런 난감한 질문에는 과연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부모님께 바깥일을 시시콜콜 다 보고하고, 밥 먹을 때도 잠을 잘 때에도 연기만 죽어라고 고민하는 사람은 아마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보통 집에서는 아무 생각 없이 쉬기 마련이지 않나? 그냥 “아니 뭐, 그렇죠”라며 대충 얼버무리고 지나갔다. 그런데 곧바로 “처음 배우를 하겠다고 나섰을 때 아버지가 반대하셨나요?”라는 질문이 이어지는 거다. 그저 “아니오”라고 짧게 답할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확인해보니 이렇게 기사가 났더라. ‘배우 하정우는 아버지의 그림자에 갇히는 것을 우려해 공식석상에서 아버지 이야기를 언급하기를 극도로 꺼린다’라고. 딱히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렇다면 인터뷰어가 꼭 물어봐주었으면 하는 질문은 무언가. 만약 이 타이밍에 이런 질문을 던졌더라면 술술 속내가 풀려 나왔을 텐데 하는 아쉬움 같은 것도 좋다.
구체적인 사례를 보면서 이야기하면 안 되나? (씩 웃으며) 때마침 여기 내 인터뷰 기사가 실린 <아레나> 과월호도 있는데. 어디 보자. 일단 영화 이외에 최대의 관심사는 패션과 음악이라는 것은 맞다. 어릴 때부터 항상 관심이 많았던 분야니까. 뭐, 당연히 여자에게도 관심이 많겠지. 사지 멀쩡한 남자니까. 그런데 외로움을 많이 타는 성격이기 때문에 싱글인 여자에게 관심을 쏟는 건 아니다. 난 외로움을 많이 타는 성격이라는 이야기를 한 적은 없다.(웃음)
당시 빈센트 갈로에 대해 이야기를 막 꺼냈을 때 인터뷰어가 조금 더 물어봐주기를 바랐다. 내가 지금 꾸준히 적립식 펀드에 투자하는 이유는, 나이 마흔이 되었을 때 만약 내가 원하는 영화를 찍어주겠다는 제작자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직접 내 돈을 투자할 작정이기 때문이다. 다양한 활동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끌어올리고, 그 힘을 활용해 영화를 만들 줄 아는 빈센트 갈로는 내 최종 지향점이나 마찬가지다. 단순히 배우, 감독, 패션모델 등 다양한 직업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당시 스타일링도 지금 보니까 좀 그렇다. 사진 느낌이 좋기는 한데 콘셉트가 조금 과하지 않았나 싶다. 가죽 점퍼와 가죽 장갑을 착용하고 건물 옥상까지 올라가 바닥에 드러누운 채 사진을 찍는 과정이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그냥 조금만 톤다운을 해주었더라도 좋았을 텐데. 하하. 아니다. 그렇게 심각한 표정을 지을 필요까지는 없다. 이 사진, 마음에 쏙 든다니깐.
이런, 거꾸로 지적을 당하고 보니 정말 당황스럽기 이를 데 없다. 더 이야기해보라.
일단 인터뷰이에게 조금만 더 애정이나 관심을 쏟아주었으면 좋겠다. 인터뷰라는 게 난생 처음 만나는 두 사람이 몇 시간 안에 모든 것을 ‘쇼부’ 봐야 하는 과정 아닌가? 미리 신경을 조금만 더 써준다면 인터뷰 때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을 때가 많다.
이를테면 미국에서 <두 번째 사랑>을 찍을 때 이런 일이 있었다. 아침 일찍부터 촬영을 시작했는데 평소와는 달리 낯선 사람이 하나 끼어 있는 거다. 머리가 반쯤 벗겨지고, 배까지 나온 오십대 중년 아저씨였다. 그런데 이 사람이 상대 여배우 베라 파미가와 그렇게 친할 수가 없는 거다. 촬영 내내 옆에 딱 달라붙어서 뭐가 그리 좋은지 웃고 떠들더라. 자정이 넘어서야 휘적휘적 집으로 돌아가는 그를 바라보며 도대체 저 사람이 누구인지 물어보았다. 알고 보니 한 잡지사의 에디터였다. 베라 파미가가 데뷔할 때부터 도맡아서 인터뷰를 해온 베테랑이었던 거지. 십수 년 동안 배우에 대한 기본 정보가 무수히 쌓였을 텐데도 불구하고 고작 1페이지짜리 기사를 쓰기 위해 하루 종일 밀착해 인터뷰하는 모습이 너무나도 부러웠다.
사실 나도 당신을 하루 종일 쫓아다니며 인터뷰를 하고 싶을 때가 많다. 하지만 알다시피 매니지먼트 시스템 탓에 당신을 3시간 이상 만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가. 그럼 다음에는 꼭 한 번 해보자. ‘하정우를 따라다니며 파파라치한 24시간의 기록.’ 이거 제목 좋네.
자, 이제 워밍업은 대충 끝난 것 같다.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보자. 과거에 경험했던 인터뷰들을 구체적으로 되짚어보자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라면 그 당시 어떤 질문을 던졌겠는가?
글쎄? 그냥 질문 같은 것 신경 쓰지 말고 마음 편하게 잡담을 나누면 안 되나?(웃음) 왜 그런 말도 있지 않은가. 일은 놀이처럼, 놀 때는 일처럼.
그냥 내 생각은 그렇다. 보통 영화 개봉에 맞춰 인터뷰 스케줄을 잡을 때가 많기 때문인지 영화에 대한 질문만 집요하게 던지는 경우가 많더라. 그런데 “영화를 찍으며 경험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무엇인가요?” “이 장면에서 연기 포인트는 어디에 맞추셨죠?”와 같은 딱딱한 질문들은 뭐랄까, 풍성한 대답이 나오기 힘든 것 같다. 나는 마치 잡담을 나누는 것처럼 개인 사생활에 대해 물어보는 것이 좋다. 아, 물론 스캔들에 대해 물어보라는 것은 아니다.(웃음)
요즘 음악은 뭘 들으세요, 어제 저녁에 팩은 하고 잤나요, 요즘 가장 시간을 들여 배우고 있는 취미는 뭔가요 등등. 어차피 영화 속 캐릭터에는 배우의 실제 모습이 많이 담기기 마련이다. 그 영화만의 독특한 정서에 맞춰 실제 생활이 조금씩 변하기도 한다. 저 배우가 요즘 뭘 하고 있는지 알면 영화 속에서 무엇을, 어디에 포인트를 맞춰 연기했는지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거다.
예를 들어 영화 <추격자> 때는 그렇게도 그림을 많이 그렸다. 아무래도 사회를 증오하는 연쇄 살인마 역할을 맡다 보니 저절로 고립되고 폐쇄된 생활을 하게 되더라. 사람들과 대화하고 소통하는 대신 홀로 골방에 앉아 그림에만 몰두하게 된 이유다. 아, 맞다. 왼손으로 낙서를 하는 새로운 버릇도 생겼다. 처음에는 어떻게 연기를 해야 할지 감을 잡기 힘들어 스트레스를 무척 많이 받았다. 그러다 우연히 왼손으로 글씨를 써보게 되었다. 우와! 스트레스 해소에 그렇게 좋은 방법이 또 있을까 싶다. 정말이지 사고가 단순해진다. 어찌 보면 우리의 편견과는 달리 살인에 대해 지극히 단순하게 생각할지도 모를 연쇄 살인마의 심리에 접근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된 것 같다.
아, 맞다. 그렇다면….
잠깐, 나 같은 경우는 한 번 말문이 터지면 끝까지 가는 타입이다. 그냥 조용히 들어주면 안 되겠나?(웃음) 반면 <비스티 보이즈> 때는 유독 사람들과 어울려 술을 마실 기회가 많았다. 일주일에 절반 이상은 술에 절어 살았을 정도니까. 하루 일과를 정리하는 건 고사하고 집에만 들어가면 그 자리에서 뻗어 잠들기 일쑤였다. 그러다 보니 사람이 즉흥적으로 변하더라. 그런 실제 삶의 모습이 영화 속에 그대로 묻어난 것은 물론이고.
사실 난 수줍음을 많이 타는 편이다. 낯도 많이 가리는 편이고. 전형적인 ‘A형’이라고나 할까? 사람들 앞에서 진저리가 날 정도로 능글맞게 구는 ‘양아치’ 기질이 있는 호스트 역할이 솔직히 쉽지만은 않더라. 그래서 본능적으로 사람들과 술 마시는 것에 더 집착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잠깐, 그러니까 나라면 인터뷰를 할 때 ‘인간 하정우’에 대해 초점을 더 맞춰보겠다는 거다. 예전에 한 인터뷰어가 이렇게 물어본 적이 있다. “당신은 언뜻 보기에는 평탄한 삶만 살아왔을 것 같다. 얼굴에 귀티도 나고. 그런데 그동안 선택한 작품들을 보면 왠지 모르게 우울하고 위축된, 결핍감이 많은 남성 역할을 주로 맡아왔다. 이상하게 잘 어울리는 이유가 뭘까?”
‘배우 하정우’의 토대가 된 ‘인간 하정우’에 대해 솔직 담백하게 이야기할 수 있겠다 싶었다. 작심하고 길게 대답을 이어가려는 순간 금세 다른 질문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당시 나는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어머니는 어릴 때부터 내가 당연히 연기자의 길을 걸을 거라고 생각하셨다. 나에게는 배우의 끼가 전혀 보이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노력을 한답시고 했는데 아무리 해도 연기가 늘지를 않는 거다. 여기에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성격까지 더해져 앞으로 연기자의 길을 걸을 수 있을까 회의가 많았다. 더군다나 연기학원에 등록했더니 주변의 다른 친구들 모두 나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빼어난 연기를 해내더라. 난 성인이 되기 전까지 연기를 배우면서 칭찬 한마디 들어본 적이 없다.
그렇게 잔뜩 위축된 채 어찌어찌 중앙대 연극영화과에 진학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곳에서 난생 처음으로 내 연기에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주변의 선후배들 모두 나와 똑같은 사람들만 모여 있었던 것이다. 하나같이 처음 본 사람에게 말 한마디 못 붙일 정도로 내성적인 성격인 것은 물론, 마치 석탄을 캐다가 온 사람들처럼 후줄근한 옷차림이라니.(웃음)
학교에서 별별 선배들을 다 만났다. 한 번은 두 학번 위 선배와 차를 같이 타고 가는데 내게 이렇게 묻더라. “정우야, 너는 차를 타고 갈 때 무엇을 쳐다보니?” “그냥 아무것도 안 보는데요?” “난 간판을 일일이 다 읽으면서 지나가. 발음 연습을 하기 위해서.”
이렇게 물었던 선배도 있다. “야, 너 화장실에서 일 볼 때 어디를 쳐다보니?” “그냥 두리번거리는데요?” “난 벽에다 점 다섯 개를 찍어놓고 1분씩 뚫어져라 바라보는 연습을 해. 무대 위에서 관객들에게 제대로 시선을 분산시키기 위해서.”
내가 배우의 길을 걸을 수 있게 된 배경이다.
아, 나도 이야기 좀 하자. 그래! 바로 그 말을 하려고 했던 거다. 이왕 이야기가 나온 김에 지금까지 배우로서 걸어온 길을 구체적으로 한 번 짚어달라는 것.
또 다른 인터뷰어는 이렇게 묻더라. “그냥 평탄하게 아이돌 배우로 성장할 수도 있었을 텐데 굳이 비주류 작품과 상업적인 작품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이유가 뭔가? 왠지 오만해 보인다.”
하하. 난 일부러 줄타기를 한 적은 없다. 사람들의 오해와는 달리 배우로서 내 인생은 그리 평탄치 않았다. 심지어 지금 소속사에서 몇 년 동안이나 계약을 할까 말까 망설였을 정도였는데, 뭘. 데뷔 초, 정말 끝도 없이 오디션을 봤지만 간신히 합격한 작품은 <마들렌> 딱 하나밖에 없었다. 그나마도 연기자로서 깊은 인상을 남기지도 못했고. 한참 동안 작품 활동을 하지 못하다가 영화 <실미도>에 출연 제안을 받고는 뛸 듯이 기뻤다. 그런데 클로즈업 한 번 받지 못하는 배경과 마찬가지였다. 가장 뒷줄에 서서 훈련에 열중하는 군인 20명 중 한 사람이었으니까. 당시 회사에 소속되어 있던 수십 명의 매니저 형들 중에서 딱 한 사람만 나를 끝까지 믿어주었다. 그 형이 가지고 온 작품이 바로 <용서받지 못한 자>다. 그 촬영이 50퍼센트 정도 진행되었을 때 난생 처음으로 회사가 나를 믿어주었다. “저 녀석, 돈은 많이 벌지 못하겠지만 최소한 연기자 생활은 계속 해나가겠구나”라는 판단이 든 거지. 그 6개월 후에 <프라하의 연인>을 찍었다. 사람들은 <프라하의 연인>으로 쉽게 얼굴을 알렸다고 생각하겠지만 나에게 작품 활동이란 치열한 ‘생존’과 마찬가지였다.
참, 주류와 비주류 이야기를 하다 말았지. 당시 그 인터뷰어가, 내가 평소 조니 뎁을 가장 좋아하는 배우 중 한 명으로 꼽는다는 사실을 염두에 뒀더라면 좋았을 텐데. 나는 의무감으로 비주류 작품에 출연하는 것이 아니다. 연기는 내가 살아가는 이유다. 내게 밥을 먹여주는 소중한 직업이기도 하고. 다만 이왕이면 내게 잘 맞고, 재미있는 작품을 하고 싶은 거다. <추격자> 또한 그랬다. 처음에는 이 영화가 이렇게 흥행할 거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시나리오가 너무 재미있었고, 지금껏 해보지 못한 연기에 도전할 수 있겠다는 충만감이 나를 이끌었던 거다. 조니 뎁 또한 그렇지 않은가? <캐리비안의 해적>이건, <스위니 토드>건, <에드우드>건, 아니면 <찰리의 초콜릿 공장>이건 그는 연기를 하면서 즐거울 수 있는 작품만 선택한다. 솔직히 작품을 마음껏 선택할 수 있는 그의 입지가 부럽다.
자, 이왕 인터뷰어가 된 김에 몇 가지만 더 시도해보면 어떨까? 평소에 패션에 관심이 많은 걸로 알고 있는데 만약 화보 촬영을 위해 자신을 스타일링한다면 콘셉트를 어떻게 잡겠는가?
난 내추럴한 느낌의 사진이 좋다. 아니면 아예 초현실주의적으로 나가든가. 가끔 <아레나>를 보면 불만스러울 때가 있다. 모던하고 감각적인 비주얼이라는 건 잘 알겠는데 가끔은 내추럴한 느낌을 강조해보면 어떨까? 평소 영화 홍보 때문에 인터뷰나 화보 작업을 할 때마다 느끼는 건데 굳이 영화의 콘셉트에 비주얼을 맞출 필요가 있나 싶다. 오히려 어색한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그냥 내추럴하게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면 안 되나?
참, 그러고 보니 평소 패션지 에디터에 대해 궁금한 게 많았다. 에디터의 실제 삶은 어떤가?
우리를 직접 인터뷰해보고 싶다는 뜻인가? 하하. 재미있겠다. 어디 한 번 해보라.
자, 당신은 몇 살인가? 서른다섯? 아, 형님이시구나. 혈액형과 별자리가 무엇인가요? 아, A형이시라고요. 그렇게 소심해 보이지는 않는데. 실제 성격은 소심하다고? 에디터로 일하려면 활달한 성격은 기본 아닌가? 그렇다면 혹시 교회를 다니시나요? 이런, 당연히 크리스천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에디터가 되고 싶었던 이유는 뭐죠? 아, 우연히 입사원서를 넣었더니 합격했다고요. 너무 까칠한 대답이시네요. 그럼 마지막으로 와이프와의 결혼 생활은 행복하신가요? 이런, 아직 미혼이시구나. 계속 잘못 짚고 있네.
어떤가. 인터뷰라는 게 그리 쉽지만은 않지?
하하. 그런 것 같다. 막상 질문을 하려고 해도 뻔한 질문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앞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깊은 관심이 없다면 도저히 제대로 된 질문을 뽑아낼 수 없을 것 같다. 아, 그렇다고 당신에게 별 관심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정말이다.(웃음)
오늘 인터뷰어 역할까지 맡아주느라 평소보다 2배 이상 고생했겠다. 혹시 촌지나 차비를 약간 쥐어줘도 될까? 앞으로 잘 봐달라는 의미에서.
뭐, 사람들이 모두 저렇게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있을 때 슬쩍 재킷 주머니에 찔러 넣어주는 것까지야 내가 어떻게 할 수 있겠나. 아니, 정말로 주는 것 아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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