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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graphy 김영진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하는’ 어느 감독이 있었듯이 비오는 날에는 어김없이 버스정류장에 가는 화가가 있다. 물론 버스를 타기 위해서는 아니다. 감독은 시를 썼다지만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도 아니다. 머리에 빗이나 꽃을 꽂은 화가도 아니다. 화가는 사람 구경을 한다고 했다. 비를 피해 달리는 사람, 비에 흠뻑 젖은 사람 등, 비가 올 때만 볼 수 있는 풍경을 감상한단다. 물론 남자는 아니다. 달릴 때 요동치는 여자들의 가슴과, 비어 젖어 드러난 여자들의 몸매와 살결을 볼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했다. 말하자면 취미생활이자 나들이인 셈인데, 변태다. 그런데 그의 변태짓거리가 부러웠다. 굉장히 요긴하고 신나는 클럽활동처럼 여겨졌다. 그가 말했다. “김 기자, 그거 알아. 하얀 실크셔츠가 비에 젖어서 맨살에 달라붙은 느낌 말이야. 보는 것만으로도 그 촉촉이 젖은 살결의 촉감이 느껴진다니까.” 그는 자신의 노하우라며 구경하기 좋은 장소를 말해주기도 했다. 오후에 비가 오면 꼭 여고 앞에 가보라고 추천했다. 그가 말을 잇기도 전에 상상이 갔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여고생들은 꼭 끼는 교복을 입고 다닌다. 그 위에 물을 한 동이 끼얹었다면? “그렇지 김 기자, 작살이라니까. 요즘은 망사 팬티 입은 애들도 많더라고.” 그는 꽤 알려진 화가다. 나이도 먹을 만큼 잡수셨다. 이런 것이 예술가들만이 가졌다는 기인적 풍모인가 싶었다. 그런데 꼭 그렇지만은 않은 듯하다.
단단히 익은 토마토 같은 스칼렛 요한슨이 영화 <매치포인트>에서 빗속을 걸어가는 장면이 있다. 사귀던 남자와 그의 어머니로부터 무시당한 요한슨이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 소나기가 퍼붓는 시골 들판길을 걷는 신인데, 비에 젖은 그녀의 모습을 보고 침이 목울대로 넘어갈까 싶어 혼난 적이 있다. 넘어갔더라면 소리가 참 컸을 것이다. 비에 젖은 그녀는 ‘색스러움’이 뭔지 단박에 보여줬다. 그녀의 얇은 셔츠 위로 떨어진 빗방울은 맨들맨들한 토마토 표면에 맺힌 물방울 같았고, 빗방울들은 요한슨의 몸에 매달려 그녀의 싱그러운 속살을 셔츠 위로 투과시켰다. 걸을 때마다 요동치던 그녀의 가슴은 빗방울을 튕겨낼 기세였다. 맞부딪치는 허벅지와 엉덩이도 밀도 높은 푸딩이 몸서리치듯 빗방울을 후드득 털어냈다. 비는 그녀의 몸을 더 단단히, 그리고 투명하게 그려냈다. 빗속에서 ‘파닥’대던 그녀의 모습은 어금니를 아리게 할 정도였다. 조나단 리스와 함께 호밀밭을 짓뭉개던 그녀의 모습을 보며 호밀밭의 ‘성’스러운 파수꾼이 되어 ‘차진 밭’ 속으로 스며들고 싶을 정도였다.
물론 비에 젖은 여자들이 다 스칼렛 요한슨 같지는 않다. 그러나 화가의 말처럼 비는 없던 ‘색’도 불러일으킬 만한 위력을 지닌 것 같다. 말장난과 비꼬기가 주특기던 노인네(우디 앨런)가 회춘한 것을 보면 말이다. 나이 일흔을 넘긴 그가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보며 자신의 늙음에 뭔가 한 방 보여줘야겠다며 의지를 곧추세웠을까? 아니 스칼렛 요한슨을 보며 ‘고추세웠’을 수도 있다. 한사코 스칼렛 요한슨과 영화를 찍겠다며 생떼를 썼다고 하지 않던가. 비에 젖은 그녀의 모습은 황진이의 유혹에도 끄떡없었던 서경덕도 흔들어놓기에 충분해 보이긴 했다. 하지만 그녀의 매력에 기댄 것이 없진 않지만 호밀밭 섹스 신을 기억할 만한 명장면으로 만든 것은 ‘비’의 조연 덕이지 싶다. 뭔가 다를 것 같은 그녀의 몸을 빈틈없이 어루만진 비의 축축한 연기력은 보는 이의 욕정까지도 다 적셨다. 비는 뭔가 모를 징후를 몰고 와서 요한슨의 마음을 무너뜨렸던 것이다.
사람의 마음을 요동치게 하는 비의 마력은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하는 것이기도 하다. 술이 당기는 것은 물론 떠난 사랑을 떠올리게 하고, 뭔가 모를 상념에 빠져들게도 한다. 조금은 낭만적인 사람은 사랑을 고백했을 것이고, 조금은 과감한 사람은 비를 맞으며 섹스를 했을 수도 있다. 나이 지긋한 ‘유명’ 화가처럼 에로스가 책동하기도 한다. 그래서 영화에서는 비만 오면 ‘사랑질’을 해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클래식>에서도 비는 두 남녀 주인공의 ‘비릿한’ 첫사랑을 이었다. <말죽거리 잔혹사>에서는 사랑의 메신저가 바로 비였고, <번지 점프를 하다>, 카트린느 드뇌브가 출연한 <쉘브르의 우산>에서도 ‘사랑은 비를 타고’ 왔다. 소설 <소나기>의 초등학생 아이들에게도 비는 얼굴 붉히게 하는 감정을 일으킨다. 비는 그렇게 뜻하지 않은 마음의 길로 몸을 이끈다. 비가 내리면 버스정류장에 가야 하는 화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비에 젖은 여고생을 훔쳐보는 그의 나들이길은 비가 발산하는 위력 중 하나일 뿐이다.
이 기사를 쓰는 시점에서 어제도 장대비가 내렸다. 도저히 2단 접이 우산으로는 내리던 비를 다 감당하기에도 힘든 폭우였다. 우산이 받아내지 못한 비는 고스란히 몸을 흠뻑 적셨다. 버스정류장에 갔다. 비에 젖은 옷은 습자지 같았다. 몸에 달라붙어서 투명하게 맨살을 드러내 보였다. 그것을 의식한 여자들은 가슴께의 옷자락을 손으로 뜯어냈다. 옷은 랩처럼 엉겨붙어 쇄골과 가슴골 사이에서 떨어져나오면 매끈한 아래쪽 가슴 라인에 움푹 말려들어갔다. 몸을 흔들어 조금이라도 물기를 털어내려고 할 때는 손바닥에 가슴을 받치고 어르는 것처럼 탄력을 더했다. 하얀 스커트도 여자들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그녀들의 허벅지에 밀착된 채 어디쯤에서 가랑이가 시작되는지 너무도 선명한 ‘Y’라인을 그렸다. 흘겨보는 나도 민망하게 ‘둔 턱’의 면적도 가늠할 수 있을 정도였다. 내 머릿속에서는 영상기가 돌았다. 어릴 적 본 화면 위에 비가 주룩주룩 내리던 <개인교수>라는 영화가 떠올랐다. 알몸으로 거침없이 활보하던 실비아 크리스텔의 영상이 젖은 여자들 위에 오버랩됐다. 우디 앨런을 회춘하게 한 비의 위력이었다. 나 역시 살 풍경에 젖어갔다. 비에 젖은 여자는 꼭 스칼렛 요한슨이 아니더라도 남자의 숨결을 거칠게 하는 뭔가 모를 매력을 지닌 듯했다. 화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생님, 밖이세요? 이런 걸 그림으로 그리시지 그러세요. 잘 팔릴 것 같은데.” 화가가 말했다. “김 기자가 아직 뭘 모르네. 훔쳐보는 것은 몰래 봐야 제 맛이야. 나눠 볼 게 아니지.” 올여름은 장마가 길다고 했다. 때때로 폭우가 쏟아진다고 했다. ‘즐감’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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