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 성범수 PHOTOGRAPHY 정재환 COOPERATION 세이코, 카시오, 시티즌
<아레나>도 동조했던 일이다. 남성 잡지에서 일본 시계는 스위스 시계에 비해 노출 빈도가 현저히 적었다. 에디터는 항상 독자들 앞에 서길 원한다. 에디터들에겐 스위스 시계를 제대로 숙지하는 것이, 쿼츠의 시대가 지난 지금 일본 시계를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해졌다. 하지만 시계 선택엔 시공을 초월해 절대적인 취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일본 시계가 2000년대를 맞이하며 스위스 시계엔 존재치 않는 기술로 승부수를 던졌다는 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이제 일본 시계 브랜드들도 1백만 엔 이하의 시계보단 고가의 기계식 시계로 이동하겠다는 움직임을 살며시 드러내고 있다. 스위스 시계의 턱밑까지 쫓아갔다고 말하긴 이르지만, 그들의 신기술로 시계 역사에 전환기가 다시 찾아오는 건 아닌지 의문이 들기 시작한다. 시계 트렌드에서 소외되지 않으려면, 일본 시계 브랜드를 굽어 살펴야 할 거다.
일본을 바탕으로 한 시계 브랜드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그건 틈새를 노리는 송곳과도 같은 기술 개발을 소리 소문 없이 완성해낸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일본 시계 브랜드 세이코, 시티즌, 카시오의 신기술 개발 역사만 둘러봐도 쉽게 알 수 있다.
세이코는 1969년 시계 역사상 전대미문의 쿼츠 시계 ‘세이코 아스트론 35SQ’를 완성시켰다. 파텍 필립, 오메가 등 대략 10개 브랜드들이 뭉쳐 완성해낸 쿼츠 무브먼트보다 먼저 쿼츠 시계를 창조해낸 것이다. 쿼츠의 혁명은 단숨에 세이코를 세계 1등 시계로 전방 배치시켰다. 쿼츠의 득세 덕에 전통의 기계식 스위스 시계는 몰락했고, 장인이라 불렸던 스위스의 고매한 워치 메이커들은 실직자가 돼버렸다. 그리고 자존심을 버린 스위스 시계도 쿼츠 베이스의 스와치 시계를 내놓으며, 쿼츠 혁명 대열에 합류했다.
역전된 전세가 20년을 넘기진 못했다. 90년대 들어 기계식 시계가 대두하며, 일본 시계도 과거의 영광과는 이별을 고하고 만다. 시계를 정신이자 영혼이라 했던 사람들에게 오차 없으나 값싼 일본제 시계는 큰 가치가 없었던 거다. 물론 90년대 웬만한 사람들은 쿼츠 시계 하나쯤 가지고 있었을 테니, 다른 종류의 시계에 눈을 돌리는 건 시기상 어쩔 수 없다고 보는 게 맞겠지만.
90년대, 기계식 시계의 귀환은 현재까지도 유효하다. 스위스 시계 시장은 끝간 데 모르고 성장하고 있으니까. 그건 에디터가 2005년부터 3년 동안 참석했던 바젤 시계박람회와 SIHH에서 직접 확인한 사실이다. 재정적으로 부족함이 없다는 게 여실히 드러나는 공격적인 기술 투자가 도드라졌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도 인기 있는 시계 품목 10위를 살펴보면 롤렉스를 선두로 스위스 시계들만 몰려 있을 정도다. 명품이라 불리는 기계식 스위스 시계에 대한 소유욕은 빈센트&코 사건에서 보듯 광풍과도 같다.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고 보는 게 맞다.
하지만 일본 시계들은 충실도 높은 내수 고객들과 끊임없는 자기 계발을 시계 역사의 명암이 엇갈리는 순간에도 포기치 않았다. 세이코는 1973년 세계 최초 6자리 표시 액정 디지털 시계 개발, 1988년 세계 최초 오토매틱 파워 탑재 방식의 쿼츠 시계 발매, 1998년 배터리가 필요 없는 오토쿼츠 기술의 키네틱 시계 개발, 1999년 키네틱 오토릴레이, 키네틱 크로노그래프 발매, 2005년 하루 1초 내외의 오차 범위를 지켜내는 기계식 무브먼트 스프링 드라이브 시계 출시, 그리고 2007년 스프링 드라이브의 진화 버전 크로노그래프 시계를 극찬을 받으며 바젤에 내놓기에 이른다. 이 시계는 크로노그래프 측정에서 1/10초의 오차도 용인치 않을 만큼 정확하다. 로터가 움직일 때 발생하는 전기에너지 일부를 전자회로로 보내고, 전자회로는 오차를 줄이는 역할을 담당한다. 세이코의 기술력은 ‘틱톡’거리는 소음을 내지 않는다. 이런 기능을 보장하는 글라이드 모션은 진정한 시간의 움직임을 표현하고자 했던 세이코의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기계식 시계의 형식을 취하는 시계 중 가장 조용한 것이라고 한다. 기존의 탈진기 (Escapement)를 대체한 것으로 신개념의 시계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쿼츠 혁명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결코 ‘오버’가 아니다.
이런 자기 계발은 세이코에만 한정된 얘기가 아니다. 소수 부유한 계층의 소유물이었던 시계를 일반 시민도 착용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는 뜻에서 탄생된 시티즌(CITIZEN)도 브랜드의 존재 가치를 인정받을 만한 족적을 남겼다. 1976년 세계 최초로 알람 기능의 LCD 쿼츠를 개발하고, 태양빛을 이용해 작동하는 아날로그 쿼츠 시계를 창조해냈으며, 1978년엔 1mm의 벽을 깬 초박형 아날로그 쿼츠 무브먼트, 1995년엔 빛에너지를 이용한 에코-드라이브를 론칭했다. 1997년엔 점자시계, 1998년엔 에코 드라이브를 발전시킨 롱런 에코-드라이브를 시장에 선보였다. 이 제품은 배터리가 완전 충전되었을 때, 빛이 전혀 없는 공간에서도 최대 5백 일간 구동할 수 있는 시계다. 에코-드라이브는 배터리를 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어 배터리 교환으로 인한 자원의 소모를 줄이고 환경보호도 할 수 있는 데서 기원된 이름이다.
마지막으로 카시오는 일본 시계의 암흑기인 90년대에 지-샥(G-Shock)의 성공으로 선전했던 브랜드다. 그후 전파시계라는 새로운 개념을 개발하기에 이른다. 전파시계는 시계 내부에 전파 수신 안테나를 넣어 일본 표준시를 나타내는 표준 전파를 수신하는 기능이다. 정확한 시각이 표시 가능한 건 전파를 통해 자동으로 시간을 수정해주기 때문이다. 1999년 처음 카시오에 의해 개발되었으며, 계속적으로 출력을 증강한 전파 송신소가 곳곳에 신설됨에 따라 전국에서 전파 수신이 가능하게 됐다. 현재는 시티즌과 세이코에서도 이 기술을 장착한 시계를 출시하고 있다. 참고로 전파시계는 1백 년 동안 1초 이내로 오차를 틀어잡을 수 있는 시계다(일반적인 쿼츠 시계도 한 달에 대략 10초 내지 20초 정도씩 늦어진다).
일본 시계가 몰락했다고 생각했던 10년 동안, 실제로는 끊임없이 발전하고 있었다. 시계를 파는 데 있어 얼마나 많은 돈을 버느냐는 중요하다. 판매 개수로 따지면 일본 시계들은 세계 시장에서 엄청난 양을 팔고 있다. 스위스 시계가 따라올 수 없을 정도지만, 문제는 10만 엔 이하의 중저가 시계들이 주력 상품이라는 것. 순이익 측면에서 결코 고가의 스위스 시계를 뛰어넘을 순 없는 근본적 이유다. 결국 일본 시계 브랜드들은 기존의 1백만원 이하 시계 시장의 수성과 함께 저가 시계 브랜드에 쿼츠 무브먼트를 에버슈 상태로 판매함으로써 현 수입 구조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고가 브랜드에 도전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그 전면에 있는 시계 브랜드는 세이코다. 세이코는 스프링 드라이브 무브먼트를 탑재한 그랜드 세이코를 통해 역전을 노리고 있다.
현재 일본 시계 브랜드들의 약진이 돋보이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약점은 있다. 정통성이 느껴지는 고가의 기계식 시계들은 루이 브레게 시대부터 스위스의 전유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재 일본 시계 브랜드들이 자랑하는 오차를 최소화한 시계들이 시장에서 과연 어떤 반응을 이끌어낼지 그리고 배터리 사용을 줄여 친환경적인 면을 주장하는 무브먼트가 과연 스스로 ‘밥’을 주는 오토매틱 무브먼트를 능가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하지만 정밀한 일본 시계 브랜드들의 기술력은 이미 인정받을 만하다. 지금 일본 시계 브랜드들에게 필요한 건 고정관념을 바꿔줄 효율적인 마케팅이다. 브랜드에 힘을 불어넣어주는 건 역시 이미지 변신을 가져올 전략뿐일 테니까. 2008년 바젤 시계박람회가 더 기대되는 이유는 스위스 시계 브랜드와 일본 시계 브랜드가 선보일 새로운 대결 구도 때문이다. 일본 시계의 듣도 보도 못한 기술은 스위스 시계에선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무기가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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