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 이기원
MBC에서 올 한 해 가장 뜨거운 반응을 몰고 온 드라마는 <하얀 거탑>과 <태왕사신기>였다. 연말 시상식에서 이 두 드라마 중 어느 쪽에 연기대상의 영예를 줄 것인지가 팬들의 가장 큰 관심사였다. 하지만 뚜겅을 열자 결과는 전혀 예상 밖이었다. <태왕사신기>가 8개 부문 수상을 한 것과 대조적으로 <하얀 거탑>은 최우수연기상에 김명민의 이름을 올렸을 뿐, 단 한 개 부문도 수상하지 못했다. 심지어 김명민은 대리 수상자도 없었다. 김명민을 비롯해 대부분 출연진과 스태프들이 시상식에 참석하지도 않는 이례적인 모습까지 보였다. <하얀 거탑>은 완벽하게 이 시상식에서 소외당했다. 승자 독식의 메커니즘은 ‘88만원 세대’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인터넷에서는 난리가 났다. 아직도 <하얀 거탑>을 다시 보기하며 그 인간 군상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마니아들은 수상 결과를 납득할 수 없었다. 언론들도 한몫 거들었다. 모두 시상식의 공정성에 의문을 품었다.
문제는 배용준이었다. MBC 연기대상은 시상식 전부터 배용준의 참여 여부만으로도 화제가 됐다. 누군가는 MBC 최고위층이 배용준의 참석을 강력히 요구했다고도 말했다. 시상식 직전에야 배용준이 시상식에 참여한다는 소리가 들렸다. 이때 게임은 사실상 끝난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어렵게 배용준을 모시고 온 그 순간 대상 수상자는 이미 배용준으로 정해졌던 것이다. 시상식 직전까지도 참석이 불투명했던 배용준의 참석이 전해지는 동시에 대상 후보에 올랐던 김명민, 최민수, 고현정, 최진실은 일제히 출연을 보이콧했다. 자신들이 배용준의 들러리가 될 것을 직감한 거였다. 그리고 목발을 짚은 배용준은 인기상, 베스트커플상, 올해의 드라마상 그리고 대상까지 총 4번에 걸쳐 무대에 오르는 불편한 영예를 누렸다.
사실 시상식에 참여한 연예부 기자들 사이에서 배용준의 수상은 이미 기정사실화됐었다. 누구도 김명민이나 고현정이 대상을 탈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기자들은 MBC가 <태왕사신기>에 들인 공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얀 거탑>은 수많은 마니아층을 낳기는 했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이슈를 만들기는 했지만 시청률은 낮았다. 거기다 원작이 일본 소설이라는 것도 한몫했다. 드라마는 영화가 아니다. 시청률로 말한다.
배용준이 대상을 받자 여기저기서 소문이 들려왔다. 배용준의 수상 배경에는 프로덕션의 입김이 강하게 반영됐다는 거였다. 일반적으로 연기상 수상자 선정은 단순히 방송사의 입장만이 반영되지 않는다. 배우의 인지도만큼 PD와 작가의 파워가 중요한 것이 연말 시상식이다. 김종학과 송지나가 <모래시계>와 <대망> 이후 오랜만에 손을 맞췄다는 점, 배용준을 드라마에 캐스팅하기 위해 MBC가 들인 공을 생각하면 사실 <태왕사신기>의 수상은 드라마 제작발표회에서 이미 결정난 건지도 몰랐다. 덩치 큰 외주 제작사의 파워는 이제 방송국도 들었다 놨다 할 정도의 역량을 키웠다. 더구나 김종학과 송지나라는 네임 밸류를 가진 김종학 프로덕션이라면 더했다. <태왕사신기>를 위해 <뉴스데스크>의 방송 시간까지 조절했던 MBC의 정성은 시상식에서 그대로 빛을 발했다. 대자본과 해외 영향력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한국 방송사의 병력이 그대로 드러난 거였다. 그건 박신양과 김희애에게 공동 대상을 안긴 SBS나 가장 많은 공동 수상자를 남발한 KBS도 마찬가지였다.
방송을 지켜본 언론과 관계자들은 어쩔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왜냐하면 이 연기대상이라는 타이틀, 특히 2007년 MBC 연기대상이라는 타이틀은 한국만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 회 촬영에 들인 비용으로 tvN <막돼먹은 영애씨>의 한 시즌을 제작할 수 있었던 4백억원 규모의 이 거대한 드라마는 내수만으로는 손익분기점을 맞출 수 없었다. <태왕사신기>는 제작 초기부터 수출을 목표로 삼았다. 애초에 이 드라마는 배용준의, 배용준에 의한, 배용준을 위한 드라마였기 때문이다. 그 효과는 이미 드러났다. 이미 대만에는 편당 3만 달러라는 역대 최고가로 수출되어 동시간대 시청률 1위를 달리고 있고, 일본에서는 케이블 TV를 먼저 거쳐야만 했던 수입 드라마의 관행을 깨고 최초로 지상파에 직행하는 드라마가 됐다. 여기에 극장 상영과 DVD 판매 등 부가 판권 시장마저 개척했다. 말 그대로 확실한 ‘욘사마 효과’였다. 더구나 지금도 한류 영향권 아래에 있는 국가들에 수출을 타진하고 있는 방송사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태왕사신기>를 올해 최고의 드라마로 등극시켜야 할 ‘의무’가 있었다.
사실 연기대상은 그해 가장 성공한 드라마의 주연에게 주는 것이 암묵적인 관례였다. 정말 연기를 잘한 사람에게 주는 상이 아니라 가장 많은 것을 방송사에게 안겨준 사람에게 주는 상이라는 거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태왕사신기>의 수상은 합당했다. 연기대상이라는 시상식 자체가 어떤 기준을 정하고 그에 맞는 수상자를 정하는 엄격한 관문이 아니라 한 해 동안 고생한 연기자와 스태프들을 위로해주기 위한 자리라고 생각한다면 말이다. 그래서 굳이 얘기하자면 이 시상식(을 가장한 인기상)이 꼭 공명정대해야 할 이유는 없다. 문제는 아무리 집안 잔치라고는 해도 특정 자식에 대한 편애가 너무 심했다는 점이다. 공중파 3사가 공히 그랬다.
2007년은 ‘미드’의 영향 때문인지 유독 참신한 기획이 많았던 해였다. <하얀 거탑> <개와 늑대의 시간>은 완성도 높은 장르 드라마의 이정표를 세웠고, KBS는 8부작 <한성별곡 正>을 100% 사전 제작하며 사극으로서는 보기 드물 정도로 완성도를 갖췄다. <얼렁뚱땅 흥신소>는 4% 미만의 저조한 시청률을 기록했지만 정말 한국 드라마가 맞나 싶을 정도의 소재와 참신한 기획, 연출의 완성도와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 등 드라마가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줬다. 지난 공중파 방송사 연기상들의 가장 큰 패착은 그 점이었다. 드라마적인 새로운 시도와 기억할 만한 기획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 이 드라마들은 상업적으로는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조명받아 마땅한 올해의 발견이었다. 그러나 이 드라마들은 시청률뿐만 아니라 시상식에서도 철저히 외면받았다. 새로운 드라마 포맷을 소개하거나 개발할 수 있는 최소한의 격려가 묵살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시청률 만능주의의 그늘이 집안 잔치에마저 드리워진 거다.
아무리 집안 잔치라도 집안 잔치 나름이다. 적어도 ‘시상식’이라는 이름을 걸고 나올 거라면 최소한의 공정성은 담보되어야 한다. 케이블 채널도 아닌 공중파라면 더욱 그렇다. 비인기 드라마의 수상을 바라는 게 아니다. 잘한 건 잘했다고, 스쳐 지나가는 말이라도 한 번쯤 해주길 바란다. 방송 3사가 연합한 ‘한국의 에미상’ 같은 건 기대도 안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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