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ds 김경주 Editor 이민정 PHOTOGRAPHY 박원태 IMAGE WORK 김창규
한국 최초로 노벨문학상 수상 후보에 고은 시인이 오르내린 지도 몇 년이 되어가는 것 같다. 영국은 셰익스피어를 인도하고도 바꾸지 않겠다고 한 말처럼 노벨문학상은 개인의 영예일 뿐만 아니라 한 나라의 입장에서 볼 때도 잘 기른 자식 농사인 셈이다. 소위, ‘지적 사회’에서 누구나 받고 싶어하는 상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누구나 대놓고 무시할 만한 상도 아닌 것은 분명하다. 과학상에 비해 객관적 검증이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의견도 분분하고 여성 수상자가 극히 드물다는 판례도 상의 공정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변화를 요구하고 있지만 오슬로 노벨위원회가 첫 상을 지정한 이후 지금까지 1백 주년을 맞이하는 동안 수없이 많은 대문호들은 이 문학 챔피언(?)의 전당에 오르기 위해 밤낮으로 책상에 앉아 쓴 커피를 마셔가며 글을 써댔을 것이다. 그중 동양권 수상자는 지금까지 인도의 ‘타고르’와 일본의 ‘가와바타 야스나리’ ‘오오에 겐자부로’ 이렇게 딱 세 명뿐이라는 사실에 모국어로 글을 쓰고 있는 입장에서 약간의 섭섭함도 있지만 상대적으로 유럽의 어느 작가들에게도 이 상이 아주 가까운 미래에 허용될 것 같은 친밀한 환경으로 보이지 않는다. 하물며 어디 문학상뿐이겠는가? 지구촌의 공정한 시상식에 초대되는 ‘큰일’이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라는 것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마다 노벨문학상이 발표되고 작가의 작품이 번역되어 시장에 풀리는 것을 볼 때마다 씁쓸한 애조가 도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어쩐지 그것은 귀동냥으로 들었다 할지라도 ‘노벨문학상 프로젝트’에 참여하기 위해서 작가들에게 요구되는 내공에 작품 이상의 그 무엇이 필요하다는 의뭉스러운 구석 때문은 아닐까?
어린 시절 모범생이라고 부르기엔 뭔가 많이 부족한 나에게 방학은 읽고 싶은 책을 마음껏 읽을 수 있는 시간에 불과했다. ‘탐구생활’을 충실히 이행하기 위해 방학이 되면 곤충채집망을 들고 산이나 들로 뛰어다니며 열심히 나비나 울긋불긋한 풍뎅이들을 모으는 것도 나름의 즐거운 동심원(同心圓)이었지만,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날, 처마 밑 평상에 엎드려서 ‘삼중당 문고’나 ‘계몽사 전집’의 순번을 하나씩 지워가며 열심히 독파해갔던 재미는 꼭 문학 청년으로 성장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한 번쯤 유년이나 청년 시절 우리를 관통한 독서열 같은 것은 아니었나 싶다. 요즘에야 고전보다 더 재밌고 유익한 만화책도 많이 나왔고 추리소설이나 무협지보다 더 판타스틱하고 상상력을 배가시키는 애니메이션 같은 것들이 많이 있지만(이렇게 말하고 나니 내가 그것들과 너무 멀리 있는 세대처럼 느껴지는 것은 뭐지?), 그때에는 책이 주는 호기심이 꼭 논술이나 교양 상식의 필요성에 적합한 학구열과는 상관없이 작용하기도 했다. 당시의 나에게는 우주비행선을 타고 날아가 달나라 표면에 포스트잇을 붙이고 오거나 발자국을 찍고 오는 일보다 자신의 생을 바쳐 인류 최고 업적 중 하나인 ‘문학’을 남긴 그들이 대단해 보였는데, 무엇보다 내가 그들에게 바치는 흠모는 교과서에서는 배우지 못한 삶의 드라마가 거기엔 무궁무진했기 때문이다. 내 쪽에선 아무리 다시 돌아보아도 청소년 시기에 살짝 삐딱하게 사는 가장 좋은 방법이 자취방에 모여 가스나 본드를 마시거나 지하실에서 맥주를 마시며 기타를 퉁기던 밴드 활동보다 책을 마시고 읽어대는 일이었던 것 같다. 무슨 대단한 문학 청년의 자질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건 뭐랄까? ‘노벨문학상 작품들은 나한테 참 중요한 인형 같은 것이었어. 품고 있으면 좋아지고, 내가 잠든 사이에 미지의 삶을 살고 있을 것 같은 인형들의 세계’ 뭐 대충 이런 느낌이 아니었을까?
청년이 되면서는 이 노벨문학상에 대한 생각이 조금씩 변해가기 시작했다. 우리에겐 <닥터 지바고>로 잘 알려진 러시아의 작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노벨문학상 수상 거부나 실존철학의 마왕으로 알려진 ‘사르트르’의 수상 거부 같은 ‘아! 위대한 작가들이나 할 수 있는 행위!’에 알 수 없는 동경과 멋스러움을 느껴보기도 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의 지도자로 알려진 윈스턴 처칠이 획득한 노벨문학상 작품을 찾아 읽고 ‘젠장 이건 전쟁 회고록에 불과하잖아. 자신의 전투 경험을 담은 이런 거라면 <나니아 연대기>가 훨씬 재밌는데’ 이런 독백도 중얼거렸던 것 같다. 물론 좀 더 머리가 굵어지고 나서 ‘보리스 파스테르나크’가 한 편의 소설로 유명해진 소설가라기보단 수 권의 시집으로 러시아 예단에 한 획을 그은 정말 훌륭한 시인이었다는 것, 처칠이 히틀러를 제압하고 인도를 지배한 걸출한 정치가였고, 그에게 정말 필요한 상은 노벨평화상이었지만 수많은 사람들의 눈총과 반대로 노벨문학상으로 문학의 역사에 교묘하게 편입되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한마디로 한창 열심히 책을 읽으면서 노벨문학상의 오라에 감염되었다가 관심 영역이 노벨문학상의 숨겨진 ‘부록’으로 옮겨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만큼 노벨문학상이 과거나 지금이나 상당한 의미와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인데, 한 번 자신의 나라 후보가 오르내릴 때마다 온 나라가 들썩이고 그 명예의 전당에 누가 오를 것이냐 하는 문제로 우리가 여전히 심각하게 남아 있는 ‘외경’이자 ‘의심’의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언젠가 대중과 작가들을 상대로 한국의 노벨문학상 후보로 누가 제일 적합하냐는 설문과 그 반응들을 기록한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재밌는 것은 대중과 작가의 관점이 상당히 차이를 보인다는 점이었다. 대중이 작가들보다 보편성에 더 많은 점수를 줬다면 작가들은 대중이 지지하는 보편성보다는 작품의 질을 우선시하고 있는 듯 보였다. 나는 거기서 한 번쯤, 노벨문학상은 현장성을 담보로 가장 보편적으로 읽히는 작가와 작품에게 주어지는 것이냐? 아니면 가장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작품을 소수의 몇몇이 인정하고 그것들을 대중에게 전파하는 역할을 하는 상이냐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적어도 우리가 노벨의 전당에 올리고 싶어하는 의욕은 하나의 상징 같은 것을 반드시 가지고 있을 터, 그것은 서구가 단순히 동양 작품을 신선한 오리엔탈리즘으로 받아들이고 격려하는 듯한 동정표도 아닐 것이고 유럽 대륙에서 당연히 출몰해야 하고 그것들을 고르게 나누어 가지는 ‘분배’도 아닐 것이다.
위대한 문학은 정말 시대적인 행운까지 함께 가져야 가능한 것일까? 언제까지 우리 문학은 번역의 한계 따위 같은 변명이나 늘어놓으면서 모국어에 대한 과도한 충성심만 보여줘야 하는 것일까? 이제는 노벨문학상에 대한 의혹보다 위대한 문학이란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도 중요한 순간이 오고 있는 것 같다. 문학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팩트와 픽션의 경계도 빠른 속도로 허물어지는 세계에 우리는 살고 있다. 판타지가 더 이상 비주류 문학이 아니고 만화도 노벨문학상이 될 수 있는 시대도 머지않아 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것들이 명성을 가질 수 있는지 묻기보다는 그것들을 제대로 읽어내는 독력을 길러야 할 것이다. 마르셀 프루스트, 루이스 보르헤스, 안톤 체홉, 제임스 조이스, 프란츠 카프카, 톨스토이, 베르톨트 브레히트 같은 작가들이 노벨문학상을 목에 걸지 않고 죽었지만 우리에게 그들이 어떻게 살아서 움직이고 있는지는 의미심장하다.
천국으로 가는 티켓인 ‘면죄부’라는 것을 종교 지도자들이 팔던, 그런 세상이 존재하던 시절을 기억하고 있다. 지금이 다 망가지고 더 이상 필력은 없지만 죽기 전에 전당에 올려주는 행위로서 소위 ‘죽음의 키스’라는 상이 노벨문학상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는 시대라는 것도 알고 있다. 노벨문학상을 받고 천국으로 갈 수 있다면 그것은 또 다른 면죄부에 다름 아닐 것이고 그것을 받고 더 이상 쓰지 않는다면 그는 정말 ‘서글픈 장례’를 미리 치르는 것에 다름 아닐 것이다. 노벨, 그는 자신의 이름이 이 시대에 ‘격려’보다는 ‘의혹’의 상징이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에 무덤 속에서 참혹한 표정을 짓고 있을지도 모른다.
문학에 챔피언은 존재할 수 없고, 챔피언이 되고도 도전자를 받지 않는다면 그는 더 이상 챔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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