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하고 있습니까?

양날의 검이다. 원작이 있기에 검증된 이야기를 확보할 수 있지만, 원작이 있기에 그 안에 갇힌다. 원작의 득은 취하고 실은 극복해야 한다. 그 실마리는 공통적인 사회 현상과 보편적 감성이다. 작은 바늘귀에 실 넣듯 잘 꿰어야 한다.

2007년 즈음, 한국 영화계에는 일본 장르 소설의 영화화 판권을 구입하려는 열기로 뜨거웠다. 어느 정도였냐 하면, 대개 판권을 구입하기 위해서는 에이전시를 통하게 마련인데, 몇몇 한국 제작자들은 이를 무시하고 아예 일본 출판사에 직접 연락하거나 작가와 바로 접촉해 판권 구입 협상을 벌이기도 했다. 모 작가의 경우, 얼마나 많은 구애가 있었던지 구입 여부와 무관하게 ‘협상’의 순위를 정해놓고 한국 영화 제작자들을 차례로 만났을 정도다.

한국 영화 제작자들이 일본 장르 소설에 목을 맨 이유가 있었다. 좋은 이야기에 목말라하던 차, 당시 한국의 젊은 독자층에게 큰 인기를 모으던 일본의 장르 소설은 그야말로 새로운 이야기의 보고였다. 다양한 소재와 이를 장르로 접근함으로써 흥미를 유발하는 전개 방식, 무엇보다 개인을 통해 사회를 들여다보는 한국 소설과 달리 개인에 집중하는 일본의 장르 소설은 분위기가 덜 무거워 젊은 관객을 공략하기에 안성맞춤이었던 것이다.

그런 이유로 무수한 일본 장르 소설 영화화 판권을 계약했다. 일본 소설의 ‘빅3’로 불리는 미야베 미유키, 히가시노 게이고, 오쿠다 히데오에게 집중하는 형국이었다. 안 그래도 이후 영화화된 작품을 보면, 미야베 미유키와 오쿠다 히데오의 동명 소설이 원작인 <화차>(2012)와 <남쪽으로 튀어>(2012), 그리고 히가시노 게이고의 <백야행>(2011)과 <용의자 X의 헌신>을 스크린에 옮긴 <용의자X>(2012)가 있었다. 개중에는 <화차>처럼 2백50만 가까운 관객을 동원한 작품도 있었지만 2007년 정점에 달했던 일본 장르 소설의 영화화 판권 붐과 비교하면, 전체적으로 작품의 질 면에서나 흥행 면에서나 다소 초라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시나리오가 고갈돼 골치 아픈 한국 영화계를 구원해줄 것만 같았던 일본의 장르 소설들이었지만 그에 버금갈 만한 성과는 올리지 못한 것이다.

그럼에도 일본 장르 소설이 원작인 영화는 꾸준히 개봉하고 있다. 마침 히가시노 게이고의 대표작 중 하나인 <방황하는 칼날>도 동명 영화로 개봉했다. 어느 정도 흥행할지 정확한 수치를 예측할 수는 없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동안 개봉했던 일본 장르 소설 원작 영화 중에서 만족도가 높은 작품이었다. <화차>가 많은 관객을 동원할 수 있었던 요인을 그대로 이어가면서 또한 작품성이나 흥행 면에서 별 재미를 보지 못했던 영화들의 실패 지점을 영리하게 피해갔다는 인상을 받았다.

일본 장르 소설의 영화화 얘기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그래서였다. 모 감독이 미야베 미유키의 <이유>를 원작으로 영화를 준비하고 있다는 얘기도 들려오고, 빅3는 아니지만 쓰카사키 시로의 <게놈 해저드>를 원작으로 한 <무명인>도 개봉할 예정이어서 이참에 일본 장르 소설이 원작인 한국 영화를 중간 점검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일본 장르 소설을 영화화할 때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사항은 어떻게 하면 낡아 보이지 않도록 이슈를 유지하는가 하는 점이다. 영화화됐거나 진행 중인 상당수의 일본 장르 소설은 2007년을 전후해 판권 계약이 체결됐다. 그동안 너무 많은 이들에게 노출되다 보니 그대로 영화를 개봉하면 유효 기간이 지나버린 듯한 느낌을 준다.

<용의자X> 같은 경우가 그렇다. 원작 소설 <용의자 X의 헌신> 국내판이 2006년 발매되어 한국에 소개된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 중 가장 높은 판매고를 기록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같은 소설을 원작으로 일본에서 영화화되었고 한국에도 소개해 결과적으로 <용의자X>는 이들 작품(들)과 차별성을 획득하는 데 실패했다. 감독의 연출력으로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흠모하는 이웃집 여자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는 이야기에서 당대를 관통하는 이슈를, 한국만의 특수성을 끄집어내기에는 애초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화차>는 때를 잘 만난 작품이라 할 만하다. <화차>는 신용불량과 개인 파산으로 몰락한 개인을 등장시켜 자본주의가 지닌악마적 속성을 추격전이라는 장르 요소로 풀어낸다. 이 소설은 일찍이 일본에서 1993년 발표되고 한국에는 2000년에 소개됐다. 시간이 흘렀지만, 변영주 감독의 동명 영화를 개봉했던 2012년 한국은 빈익빈 부익부를 가속화하는 신자본주의의 부채질 속에서 개인의 몰락이 화두가 되던 시절이었다. 원작이 발표된 시기와 상관없이 영화는 시의 적절한 문제의식으로 상당한 관객을 동원했다.

<방황하는 칼날>의 강점 역시 소재의 시효 자체가 여전히 유효하다는 데 있다. 성폭행으로 딸을 잃은 아비의 복수를 다루는 이 소설의 문제의식은 고스란히 영화 속에 반영되어 있다. 분노를 이기지 못해 복수를 감행하는 아버지의 행위는 과연 올바른 것인지, 그에 앞서 피해자의아픔을 헤아리지 못한 채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가해자에게 적절한 처벌을 가하지 않는 소년법에 모순이 있는 것은 아닌지, 질문을 제기하며 스크린 밖의 관객들로 하여금 생각해보도록 하는 것이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일본의 소년법이 품고 있는 문제점을 인식하고 이 소설을 쓴 게 2004년이었다. 10년 전의 소설이지만 요 근래 한국에서는 소녀들을 대상으로 폭행 사건이비일비재하게 발생하면서 이에 대해 처벌을 강화하고 예방할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도 높다. 소설과 영화 사이의 10년이라는 간극은 <방황하는 칼날>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다만 <방황하는 칼날>의 이정호 감독은 한국인이 지닌 특유의 감성을 고려한 설정으로 원작의 문제의식을 살짝 비트는 쪽으로 내용을 가져간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법의 모순을 집요하게 제기했다면 영화는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식 잃은 아비의 심정에 밀착해 피해자의 마음을 좀 더 헤아리는 태도로 살짝 방향을 선회했다. 일본의 장르 소설을 영화로 옮기려는 감독들이 놓치지 말아야 할 한 가지 지침을 알 수 있다. 원작의 이야기를 전적으로 믿지 마라! 아무리 이야기가 뛰어나다 한들 관객은 이미 소설 내용을 잘 알고 있기에 영화로 만들 경우, ‘+알파’를 원하게 마련이다. 단순히 한국 유명 배우가 출연해 원작의 이야기 그대로 ‘재연’하는 것에 관객은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남쪽으로 튀어>처럼 설정이 꽤 과격(?)한 경우라면 내용을 순화하거나 다른 식의 접근으로 관객의 호기심을 유발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사실 국가에 대한 가치가 필요 이상으로 강조되는 한국에서 <남쪽으로 튀어>는 꽤 필요한 영화였다. 개인의 권리 대신 의무만을 상대적으로 강조하는 한국에서 주인공은 국민이 되기를 스스로 거부한다. 대신 온전히 개인의 행복과 가족의 안녕을 위해 국가의 지배력이 떨어지는 남쪽 섬으로 향한다는 설정은 분명 생각할 거리를 주기에 충분했다. 다만 내용 자체가 워낙 전복적이기에 원작의 배경을 한국으로 옮기는 것에만 그치지 말고 내용을 순화할 수 있는 장치, 가령 코믹한 설정을 배가한다거나 추격전의 장르 양상을 강조하는 등 다른 요소를 도입해 관객의 호기심을 유도하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

그만큼 관객의 기호를 맞춘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특히나 원작을 읽으며 책에 묘사된 세계를 나름대로 머릿속에 그렸을 관객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보다 구체적이고, 개성 넘치는 영화적 서술이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 <백야행>이 흥행 면에서나 작품의 완성도 면에서 모두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결과를 낸 건 ‘하얀 어둠 속을 걷다’라는 부제의 역설적인 이미지를 관객에게 설득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14년 전 살인 사건 이후 한 명은 화려한 삶을 살며 빛처럼 전면에, 또 한 명은 어둠처럼 숨어 살며 빛을 동경한다는 이야기는 관객이 쉽게 이해할 만한 범위를 넘어섰다. 두 권으로 구성된 원작의 방대한 분량을 두 시간의 상영 시간 내에 구겨 넣다 보니 이야기의 설득력이 부족해, 흑과 백의 상징적인 이미지가 따로 노는 최악의 결과로 치닫고 만 것이다.

물론 결과론적인 얘기다. 하지만 여전히 영화화될 일본 장르 소설의 원작이 많기에 과거 사례를 살피는 건 중요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실패 사례가 생기면서 발생한 문제들, 예컨대 각색의 안일함, 한국적인 특수한 상황을 고려하지 못한 점 등을 극복하며 성공하는 영화가 하나둘 생기는 추세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다. 성공 사례라고 해야 <화차>의 2백50만 관객처럼 ‘중박’ 정도 수준인데 치열한 경쟁 속에서 치솟을 대로 치솟은 가격으로 일본 장르 소설의 판권을 구입한 것을 감안하면 성에 차지 않는 것이다.

2007년과 2008년 당시 떠들썩했던 일본 장르 소설 판권 구입 붐과 비교하면 지금은 그에 대한 관심이 현저히 떨어진 추세다. 한국 제작자와 감독들이 일본 장르 소설에만 한정하지 않은 채 원작 소설을 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일본 장르 소설의 영화화는 꾸준히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관심이 예전 같지 않다고 하지만 여전히 뛰어난 이야기인 데다가 과거 일본에서 특수했던 사회적 상황이 이제 한국에서도 유효한 경우가 생기기 때문이다. 즉, 이야기를 개발할 여지가 충분하다. 결론은, 언제나 그렇지만, 좋은 영화로 만드는 것이다. 이미 만들어진 영화 속에 ‘어떻게’에 대한 답이 있다.